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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떠난 신학은 허구다. 오늘날 기독교가 위기를 맞은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성서 해석에 있어서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떠난 신학을 했기 때문이다. 신학의 개혁을 위해 먼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근거한 성서 해석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서 ‘전승의 차이’(저자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문체(어휘)의 차이에 의한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저자의 차이를 살펴보았다. 이번호에서는 구조에 차이에 의한 양서
박호용 교수의 아레오바고
박호용 교수
2024.03.25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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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문체(어휘)의 차이’로 말한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서는 양서의 ‘숫자의 차이’를 말하고자 한다. 두 대의 악기로 연주하는 이중주(二重奏)처럼, 구약과 신약, 모세(성막)와 다윗(성전), 메노라와 다윗의 별, 바다와 성전은 짝을 이루는 이중주이다. 전자는 북왕국을 대표하고, 후자는 남왕국을 대표한다. 북왕국 전승인 요한복음과 남왕국 전승인 요한계시록은 각각 전자와 후자를 대표한다. 이는 숫자 사용에 있어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완전수인 숫자 7을 제외하고, 북왕국 전승인 요한복음은 모세오경처럼 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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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3.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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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호에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의 문체(어휘)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가 『요한복음에 비추어본 요한계시록』을 쓰고 있을 때(2020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이 오스카상 4관왕을 차지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빈부격차의 문제”인데, 이를 잘 표현한 대사가 “부자와 빈자는 냄새가 다르다”는 표현이다. 냄새는 속일 수가 없다. 우리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아는 것보다 직관과 감성적 느낌으로 먼저 안다. 이를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 적용하면 “양서는 냄새가 전혀 다르다.” 이 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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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3.11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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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호에서는 ‘경험의 산물로서의 요한복음’과 ‘학문의 산물로서의 요한계시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먼저 학문을 한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의 학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살펴보자.school(학교)의 어원인 라틴어 ‘스콜라’(schola)는 고대 그리스어 스콜레(σχολή)에서 유래했는데, 원래 이 말은 ‘여가, 휴식’이라는 뜻이다. 고대 그리스인은 여가나 휴식 시간에 강의, 토론, 논쟁을 즐겼다. 이로 인해 ‘스콜레’라는 단어가 ‘강의, 토론, 논쟁하는 장소’라는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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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3.04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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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 저자의 차이는 두 측면, 즉 하나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를 배경으로 한 전승의 차이이고, 또 하나는 경험의 산물과 학문의 산물의 차이라는 것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 두 측면은 상호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나누어서 다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전자만 다루고, 후자는 다음 호에서 다루고자 한다. 첫째, ‘예루살렘’과 ‘갈릴리(사마리아)’ 용어 사용에 나타난 전승의 차이이다. 이 차이는 양서가 전승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우리가 조선족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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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2.26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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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지난 시간에 “구약전승의 맥락에서 본 사복음서의 예수 기원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북왕국 전승에 속한 문서이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남왕국 전승에 속한 문서임을 살펴보았다. 결국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기원의 차이는 전승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요한복음과 요한계시록에도 그대로 해당한다. 이 양서의 근본적 차이는 요한복음이 북왕국 전승에 속하는 문서인데 반해, 요한계시록은 남왕국 전승에 속하는 문서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전승의 문제는 저자의 문제와 직결된다. 따라서 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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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2.1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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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리’에 따른 구약 전승의 맥락의 중요성 -나는 그동안 ‘요한 르네상스’와 관련하여 ‘요한복음서’에 집중하여 글을 썼다. 그런데 ‘요한 르네상스’는 ‘요한복음서’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축인 ‘요한계시록’과 관련되어 있다(요한서신은 논외). 따라서 ‘요한계시록’을 다루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을 다루기 위해서는 먼저 필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만이 아닌 신약문서 전체(27권)와 관련된 ‘구약 전승’(삶의 자리)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신구약성경을 둘이 아닌 ‘한 권의 책’(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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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2.12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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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적 요한복음 읽기의 문제점1. 민중신학자인 안병무(1922-1996) 선생의 제자인 김진호 목사는 요한복음과 관련된 『급진적 자유주의자들』(동연, 2009)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책상에 앉아 연구하는 학자로서보다는 현장에서 뛰는 목사로서 요한복음을 읽고 자신의 입장을 개진한 책이다. 이 책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양날의 칼’이다. 즉 비판적으로 수용하면 유익한 책이지만, 잘못 읽으면 상당히 위험한 책이다. 이 책은 주로 텍스트(Text) 연구에 머문 기존의 요한복음 연구에서 콘텍스트(Context)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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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2.0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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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이어 다석 비판의 세 번째 시간으로 ‘삶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하자. 다석은 1937년 정초에 요한복음 3:16을 해석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김교신의 제자 류달영은 그 순간을 거의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석의 생각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다는 것이었다. ‘자기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이 어떻게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외아들을 죽이는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고 하였다. 다석은 말하기를 하느님이 사람에게 독생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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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1.2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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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시간에 이어 다석 비판의 두 번째 시간으로 ‘진리의 보편성과 배타성’의 문제를 다루어 보기로 하자. 다석이 정통 신앙의 껍질을 깨고 비정통신앙으로 전환한 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첫째는 톨스토이의 저서를 통한 사상적인 영향이다. 둘째는 20세에 불경과 노자 등 다른 종교의 경전을 읽게 된 것이다. 셋째는 두 살 아래인 아우 영묵(永黙)의 돌연사이다. 이 세 요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다석이 역사적이고 유일신적 기독교인인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지 못하고 윤리적이고 범신론적 기독교인인 톨스토이를 만난 것은 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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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1.23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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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호부터는 한국 현대 사상가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다석(多夕) 류영모(1890-1981) 선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다석 선생은 도올(桃杌) 김용옥(1948- )선생처럼 신구약성경 가운데 유독 요한복음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다석은 요한복음의 대단히 중요한 책임을 천재적으로 직감했다. 그리하여 동서양을 꿰뚫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요한복음에 대해 뭔가를 말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외람되지만 다석은 요한복음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도올 선생이나 불트만처럼 크게 빗나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 그런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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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1.15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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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복음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역사적(객관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요한의 신학적 의도인 ‘인간의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모델(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그려진 인물들이다(인물상징코드). 가령, 세례 요한은 선구자(증언자)의 모델, 베드로는 순교의 모델, 애제자(사도 요한)은 사랑의 모델, 나다나엘은 구도자의 모델,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순종의 모델,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헌신의 모델,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 증인의 모델, 사마리아 여인은 이방 선교의 모델,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대표의 모델, 빌라도는 이방인의 대표의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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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1.0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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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에 나타난 와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절, 특히 ‘로고스’(말씀)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요한복음이 얼마나 구약적(히브리적) 배경 아래 있는 복음서인가를 살펴보았다. 아래에서 다룰 나 또한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는 요한복음이 헬라적(영지주의적) 배경 아래 있다는 불트만의 주장이 얼마나 빗나갔는가를 또다시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요한은 역사를 구성하는 세 요소, 즉 시간(時間), 공간(空間), 인간(人間)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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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4.01.0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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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은 무시간적 진리를 말하고자 쓰인 책이 아니다. 유대교와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당하는 묵시문학적 위기 상황에서 유대교와 로마 제국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변증하고자 쓰인 책이다. 이를 위해 요한은 다양한 상징 코드를 사용하여 기독교를 변증하고 나아가 유대교와 로마 제국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를 말하고자 하였다. 요한이 사용한 모든 상징 코드는 기본적으로 숫자 상징으로부터 시작한다. 가령 요한이 사용한 ‘일곱 표적’이나 ‘일곱 에고 에이미 말씀’도 ‘일곱’(7)이라는 숫자가 기본 전제가 되고 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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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3.12.26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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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네 핵심 가치인 영광, 진리, 생명, 사랑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불트만의 요한복음 연구가 철저히 빗나갔음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거기에 더하여 불트만은 요한복음이 기본적으로 헬라적 배경 아래 있는 것으로 보았으나 요한복음은 기본적으로 히브리적(구약적, 유대적) 배경 아래 있는 복음서라는 점에서 그의 요한복음 연구는 또다시 빗나감을 면치 못했다. 궁수가 활을 쏠 때 처음 시작이 1mm가 빗나가면 100m 앞에 있는 과녁에는 크게 빗나갈 수밖에 없다. 불트만은 요한복음 1장 1절부터 해석이 빗나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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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3.12.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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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복음은 네 핵심 가치인 ‘영광’, ‘진리’, ‘생명’,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 가운데 마지막인 ‘사랑’ 주제를 다룰 차례다.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주제다.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 22:34-40)이 가장 큰 두 계명이라고 말한다.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이기도 하다. 특히 요한복음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고백한 최고의 ‘사랑의 연서’(사모곡)이다. “왜 요한복음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요한복음이 ‘인류 최고의 사랑의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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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3.12.1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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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시간에 약속했듯이, 이번에는 제자도의 압권이자 백미인 ‘큰 물고기 153표적’(요 21:11)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지금까지 여러 측면에서 불트만의 요한복음 연구가 빗나갔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진짜 외람되고 미안한 얘기지만 불트만의 요한복음 연구가 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히 빗나갔는가를 한방에 보여주는 결정적 실례가 ‘큰 물고기 153표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왜 그런가를 이제부터 말하겠다. 역사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1945년은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분수령이다. 그런 의미에서 1945년 이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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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3.12.0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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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복음은 ‘진리의 책’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의 네 핵심가치(영광, 진리, 생명, 사랑) 중 ‘진리의 문제’를 다루었다. ‘진리의 문제’는 곧 “누가(무엇이) 참 진리인가?”를 통해 참 진리인 그분(그것)에게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진리의 문제’는 곧 ‘영광의 문제’와 직결된다. 요한복음은 ‘영광의 책’이다. 불트만은 요한복음을 ‘영광의 책’으로 보고, 제1부(2-12장)의 제목을 ‘세상을 향한 영광(ΔΌΞΑ)의 계시’로, 제2부(13-20장)의 제목을 ‘공동체 앞에 나타난 영광(ΔΌΞΑ)의 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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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3.11.27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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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얘기를 잠시 멈추고 내가 불트만의 《요한복음 연구》을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현학적인 사변놀이를 하고자 해서가 아니다. 요한복음은 인류 역사상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천하제일지서’라고 할 정도로 참 진리와 생명력과 감동을 지닌 최고의 명작이다. 이런 책을 해석의 오류로 인해 상실되거나 반감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람된 얘기지만 지난 세기 최고의 요한복음 연구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불트만의 요한복음 해석은 부분적인 해석의 차이가 아닌 근본적으로 철저히 빗나갔다. 따라서 왜 빗나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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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용 교수
2023.11.20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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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요한복음 3장과 18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빌라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 주제를 다루었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는 나라”라고 할 때 그러면 “누가 하나님이며 누가 왕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요한복음은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이시며, 왕이시라는 것을 ‘대표성의 원리’에 따라 선정된 니고데모(유대인의 대표)와 빌라도(이방인의 대표)를 통해 증언했다. 결국 이 두 인물은 하나님 나라를 안고 오신 예수를 보았으나(요 3:3) 니고데모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고, 빌라도는 못 들어갔다(요 3:5)
박호용 교수의 아레오바고
박호용 교수
2023.11.13 1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