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성경에서 ‘제단’은 제사를 거행하고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자리다. 그리스도교도 ‘제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히브리서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새로운 사상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하여 제단이라는 용어를 이전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용어를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사역과 관련한 제의적 언어의 사용에 관한 유추에 근거하여 해석할 수 있다. 칼빈(Calvin)은 제단을 ‘제물’과 ‘희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장막’은 장막에 딸린 모든 외부적인 상징으로 이해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 국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7.26 11:39
-
온전의 ‘全’자의 본래 글자는 ‘옥’이다. 광산에서 캐어낸 옥을 잘 다듬어 집안에 고이 들여다[입] 놓은 ‘순수한 옥’(純玉)이 본뜻이다. 후에, 잡것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다’ ‘온전하다’ ‘흠이 없다’ ‘온통’ ‘모두’ 등으로 확대 사용됐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다. 하나님의 완전한 아들은 그의 백성의 완전한 구주가 되셔서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예수님의 고난이 도덕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다는 히브리서의 논증은 신약 안에서 독특하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4.14 15:50
-
예수님은 그의 어머니의 장자이면서 하늘 아버지의 맏아들이다. 그가 창조되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가 창조시에 하나님의 대리인이었고, 모든 피조물들 위에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그는 모든 만물의 맏아들이다(골 1:15-17). 맏아들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높아지심과 맞물려 신적 출산 개념을 발전시킨다. 유업과 관련하여 전통적으로 장자가 특권을 지녔다. 죽은 자들로부터 가장 먼저 태어난, 즉 부활의 첫 열매가 되는 예수님은 만물의 유일한 상속자다.신적으로 출생한 그리스도는 유일한 아들이며 또한 맏아들이시며, 또한 맏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4.08 12:30
-
이슬람교는 신체와 영혼 모두를 정결하게 유지하는 데 최고의 가치를 둔다. ‘정결함은 신앙의 일부’다. 이슬람 세계에선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격언이다. 모범적인 이슬람 신도는 매(每) 기도 전, 최소한 하루에 다섯 번 이상 몸을 씻어야 한다. 또한 1주일에 몇 차례씩 몸 전체를 완전히 목욕해야 한다. 정결에 해당하는 ‘kaqarismov"’(카다리스모스)는 부정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죄의 정결은 아주 오래된 종교적 문제다. 성화(sanctification)는 어떤 대상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기 적합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속죄(at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3.29 13:17
-
‘노블레스 오블리즈’는 프랑스어다.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는 ‘오블리주’의 합성어다. 귀족의 의무란 뜻이지만 신분 귀족이 아니라 정신 귀족으로서의 의무요, 출신성분과는 아랑곳없이 남들 위에 서서 일하는 지도자로서의 의무다.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갖는 도덕적 의무라는 뜻이다. 이는 고대 로마에서 비롯됐다. 특권을 누리는 대신 공익을 위해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의무이자 명예라고 생각했다. 전쟁터에서 가장 앞서 싸우고, 재산을 기부해 도로 등 공공시설을 지었다. 이집트의 왕자였던 모세는 하나님의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3.22 10:36
-
코로나19 백신 개발 주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민족이 있다. 유대인이다. 화아자와 모더나의 mRNA가 그렇다. 매독 치료제, 콜레라 백신, 소아마비 백신 모두 유대인에 의해 개발됐다. 피츠버그 의과대학의 유대인 조나스 소크 교수는 소아마비를 일으키는 폴리오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을 만들었다. 유대인들이 의학에 헌신한 역사는 오래되었다. 중세 랍비들은 생활비를 스스로 벌여야 했다. 의사와 무역상이 많았다. 의사가 많았던 이유가 있다. Tikun Olam 사상 때문이다. ‘세계를 고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3.15 13:08
-
직업은 인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늠자이다. 한자로는 '직분(職)'과 '업(業)'이 합쳐진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전자는 ‘사회적 지위’를, 후자는 ‘생계를 유지하는 일’을 뜻한다. 전자는 ‘일자리’, 후자는 ‘일거리’다. 전자는 직위 내지 자리다. 후자는 스스로에게 부여된 과업이다. 사람들은 대개 직에 관심이 많지 업은 뒷전이다. 예수님의 직은 사도와 대제사장이다. 그의 업도 사도와 대제사장이다. 예수님은 타이틀이고 명함인 사도와 대제사장으로 살지 않으신다. 세상에 온 이유이자 하늘이 내린 사명인 업으로 사신다. 예수님이 ‘사도이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3.08 13:50
-
사람은 행동하기 위해 네 단계를 거친다. 인식, 생각, 실행, 회고다. 우리는 생각을 깊이 하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사람을 돈키호테라 부른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까지 고전 필독서로 권하고 있는 세계적인 스테디셀러가 바로 ‘돈키호테’다. 그는 풍차를 거인이라고 생각한다. 결전을 벌린다. 산초가 여러 번 풍차라고 알려준다. 돈키호테는 “도망치지 마라, 이 비겁하고 천한 자들아!”라고 외치면서 달려든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날개가 돌아가자 창은 박살이 나고, 돈키호테는 들판에 내동댕이쳐진다. 돈키호테는 생각이 부족한 게 아니라 인식의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2.23 09:44
-
원숭이와 사람은 지능으로만 따지면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인간은 원숭이가 갖지 못한 세포를 하나 더 가지고 있다는 게 과학자들의 설명이다. ‘거울 신경 세포’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따라 하거나, 처한 상황을 통해 그 마음을 짐작하고, 그 사람의 말에 공감하는 건 모두 이 세포 때문에 가능하다. 공감은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다시 구분된다. 전자는 타인의 마음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다. 후자는 타인의 감정 상태를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관찰하기만 해도 상대의 생각과 행동,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공감 능력을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2.15 10:59
-
미국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프리드만(T. L. Friedman)은 세계는 COVID-19 이전인 BC(Before Corona)와 이후인 AC(After Corona)로 구분될 것이라고 경종을 울렸다. COVID-19는 시험이요 고난이다. 시험은 신자들의 믿음을 저울질 한다. 미국 비영리 연구조사기관인 Pew Research Center가 14개 경제 선진국 국민을 대상으로 COVID-19가 종교에 미친 영향을 조사한 결과를 보고했다. ‘자신의 종교적 믿음이 더 강해졌다.’는 응답은 미국이 28%로 가장 높다. 평균값은 10%였다.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2.08 19:53
-
하나님이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 계획하신 것은 인격이신 그리스도다. 동물도 식물도 광물도 아니다. 한 인격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그 인격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아들을 주심으로써 그분은 자신을 주신 것이다. 거룩한 진노 속에서 그 노가 진정되어야 하는 이는 하나님 자신이다. 백성의 죄를 위한 화목을 위하여 그 아들 속에서 죽으신 이도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는 백성들의 죄로 인해 그들에게 부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이 상황을 해결하셨다. 그분은 필요한 화해를 이루셨고, 따라서 죄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2.02 08:33
-
‘철인왕후’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물에 빠져 타임슬립된다. 조선시대 중전의 몸에 현대 허세남의 영혼이 깃들어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요리하는 남자, 사냥하는 여자 등 기존 사극에 없던 역할 바꾸기로 인기를 모았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형제가 되시는 것은 잠깐 찾아왔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다. 하나님이 전능의 옷을 벗고 인생이라는 드라마에 찾아오신다. 그는 범사에 형제와 같이 되신 것은 마땅하다. 함께 웃고 껴안고 울어주며 즐거이 먹고 마시는 사소한 일까지 같이하는 형제가 되신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은 ‘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1.25 16:27
-
휴식(休息)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소극적 휴식과 적극적 휴식이다. 전자는 움직이지 않고 몸을 쉬게 하는 것이다. 잠을 푹 자거나 빈둥거리는 것을 뜻한다. 후자는 몸을 움직이는 휴식을 말한다. 후자는 근육에 산소를 보내고 혈액 순환을 촉진함으로써 피로 물질인 젖산을 제거할 수 있다. 안식일도 양면이 있다. 소극적으로는 일을 쉼으로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적극적으로 야훼의 절기, 즉 개인적으로나 공식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집중하는 기회로 지키는 것이다. 단지 빈둥거리며 지내거나 아무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담이 에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1.18 18:29
-
고대 근동지방의 노동자들은 아침 일찍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에 정상적인 식사를 먹는 대신 간단하게 해결했다. 작은 빵 덩어리, 치즈, 무화과 열매, 올리브 열매 등을 가지고 가면서 일터로 가는 길에 그것들을 먹었다. 점심은 간단하게 먹고, 일이 끝난 저녁에는 만찬을 하였다. 이집트인들은 그 날의 제일 중요한 식사를 정오에 하였다(창 43:16). 식사 시간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식사시간에 사람들은 우정을 나누고 대화를 하는 창구로 활용하였다.레위의 집에서 가졌던 식사는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이제 집을 떠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1.11 18:26
-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郞)는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아들러를 20여 년간 연구한 일본의 철학자다. 그가 작가 고가 후미타케(古賀史健)와 함께 쓴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에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자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내가 지불해야 할 몫”이라고 설명했다. 기시미는 “행복해지려면 미움 받을 용기도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기 위해 용서를 선포하고 치유를 행하므로 미움을 받고 죽음의 위기까지 처한다. 예수님은 유대지도자들로부터 눈 밖에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2.01.05 08:33
-
새해를 맞는 것과 상속을 받는 것은 유사한 점이 있다.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다. 영어로 선물은 ‘present’다. ‘현재’라는 의미도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 대통령 부인 엘리너가 한 말이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Today is a gift. That’s why we call it ‘The Present’.” “어제는 역사다. 내일은 미스터리다. 오늘은 선물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오늘을 ‘The Present’라고 부르는 이유다.” 둘 다 노력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12.28 06:53
-
요한과 예수님의 첫 번째 선포는 동일하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느니라’이다. ‘회개하라’에 해당하는 ‘metanoei'te’(메타노에이테)는 하나님께로 돌아서라는 요청이다. 이 말은 근본적으로 ‘방향 전환’(a changing of direction), ‘되돌림’(turning back), ‘마음의 변화’(change of mind)를 의미한다. 즉 잘못된 태도, 말과 행동으로부터 돌아서는 것과 관련이 있다. 정서적 차원에서 느끼는 죄의식가 거리가 멀다. 어떤 환경에서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은, 심리학적으로 고려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12.21 17:05
-
먼 옛날 순임금은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제시했다. 부자관계는 부자유친, 상하관계는 군신유의, 부부관계는 부부유별, 친구관계는 붕우유신, 그리고 장유유서다. 우리 역사에서 부자관계는 어떤가. 권력 앞에서는 견원지간(犬猿之間) 못지않게 되는 경우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후백제의 견훤과 신검, 조선조의 태조와 태종, 고종과 대원군의 암투는 TV사극(史劇)의 단골 소재가 되기도 한다. ‘소금의 고마움은 떨어졌을 때 아버지의 고마움은 돌아가신 뒤에 안다’는 인도 속담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은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목사
2021.12.14 11:22
-
돼지는 땅에서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볼 수 없다. 돼지는 지굴성(地詘性) 동물이다. 하지만 돼지도 하늘을 볼 수 있을 때가 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게 되면 볼 수 있다. 발을 헛디뎌 웅덩이에 빠졌을 때도 가능하다. 이런 사태는 불행이요 고통이며 위기다. 그러나 한편, 하늘을 볼 수 있는 기회다. 넘어지고 쓰러져 봐야 하늘이 보인다. 아브라함은 땅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다. 하늘을 보고 살았던 믿음의 사람이다. 믿음의 본보기가 된다. 아브라함의 장막과 하나님의 성은 분명하게 대조된다. 삶의 터가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사실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12.07 08:44
-
생전에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밟을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솔라 피데(sola fide), 즉 오직 믿음으로 바라보고 걸어갈 뿐이다. 믿음의 장은 마치 바둑의 미생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을 대거 등용하여 열거하였을까? 완생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며 왕적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그 때에 이루어진다. 바둑에서 ‘미생(未生)’은 두 집을 만들어야 ‘완생’(完生,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이 되는 바둑에서 한 집만 있어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예수님이 완성(완생)이고 알파며 오메가다. 예수님이 최고다. 미생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11.16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