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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헬의 ‘바벨탑’은 로테르담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이 그림에는 건축자들의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자연의 도움도, 하나님의 호의도 없이 오로지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바벨탑을 보게 된다. 만일 언어가 혼란하지 않았더라면 바벨탑은 여전히 이라크 사막 한가운데 꼿꼿이 서 있었을 것이다. 시날 평지(즉, 고대 바벨론)에서 바벨탑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언어가 하나였기 때문이다. 또한 윤리적, 경제적, 사회적 목적이 하나였다. 협동의 욕망이 하나로 뭉쳐진 것이다. 공통의 목표를 위해 세워진 인류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11.09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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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금융가에는 세계 최고의 옛 증권거래소가 있다. 그 건물 전면에는 라틴어로 Dictum Meum Pactum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다. ‘내가 한 말은 곧 보증수표’라는 뜻이다. 철저한 신용과 단단한 신의가 금융의 생명임을 말해준다. 노아는 하나님이 아직 보이지 않는 일, 즉 아직 명백하지도 않는 홍수 경고를 하실 때 신뢰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증수표처럼 받아들였다. 믿음으로 접수하였다. 홍수 경고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경고하신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창 6:9). 노아는 아벨과 같이 의로운 사람이다.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11.0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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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역사의 시초인 창세기에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린 제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실행 방식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겉보기에는 둘 다 제사를 드렸다. 옳은 일을 했다. 제 때에 드렸다. 자신의 직업에 알맞은 것을 드렸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셨다. 창세기에는 아벨의 믿음을 언급하지 않는다. 왜 그의 제사가 더 나은 제사인지에 대한 암시는 제공되지 않는다. 힌트가 있다면 가인도 잘했다면 그가 인정받았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창 4:7). 여기에 하나님은 예물을 드리는 자들과 ‘그 제사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10.26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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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견해에서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요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범이다(창 13:2). 시편 기자들은 물질적 축복을 노래한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성한다(시 1:3). ‘부요와 재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집에 있다(시 112:1, 3).사데 교회에 전하는 메시지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에 전하는 메시지는 그 교회의 자기만족적인 태도에 대한 갑작스러운 비판으로 시작한다. 라오디게아는 B.C. 2세기 말 동안 번창했다. 티베리우스와 네로의 통치 시대에 지진으로 큰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10.1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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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디게아 도시는 히에라볼리 및 골로새와 비교했을 때 리쿠스 강 골짜기에 있는 세 도시 중 가장 유명했다. 이 도시는 리디아, 브리기아, 갈리아 세 지역의 중심 중추였다. 라오디게아 도시 자체는 두 가지 문제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지진이 발생하기 쉬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음은 물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좋은 물을 내는 수원이 없었다. 그래서 다른 두 도시에서 물을 끌어와야 했다. 리쿠스 강은 여름이면 말라버렸다. 라오디게아는 물을 구하기 위해서 긴 수로를 사용해야 했다. 골로새의 질 좋은 식용수가 되는 차고 맑은 시냇물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10.12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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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으로 이뤄진 지역에서는 주로 천막을 치고 유목생활을 한다. 천막은 모래 위에 튼튼한 나무 기둥을 땅에 단단히 꽂는다. 가죽을 지붕으로 올려서 만든다. 기둥은 힘찬 발걸음, 즉 step을 딛듯이 땅에 세게 꽂아야 한다고 해서 stebh라고 불렀다. 지팡이를 뜻하는 staff는 ‘떠받들다’인 선사 인도유럽어 stebh에서 나왔다. 기둥은 제라쉬(Jerash)에서 도시의 중심 도로의 장식 용도로 주로 사용되었다. 신전에 기둥들을 줄지어 세웠다. 몇몇 기둥들은 사람처럼 보이도록 조각했다. 인간의 형상을 각인시키는 것은 흔한 풍습이었다.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10.05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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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편지와 그 후에 이어지는 환상 내용을 담고 있는 여러 장들에 시험이 나타난다. 성도들과 불신자들을 동일하게 경험하는 시험이다. 성도들에게 시험은 다르다. 믿음을 단련하는 시험이다. 불신자들에게 시험은 그들을 강퍅하게 하는 시험일뿐이다. 하나님의 보호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오레스테스에게 한 아폴로의 보호와 다르다. 오레스테스는 아버지 아가멤논을 죽인 어머니 클리템네스트라를 죽인다. 피로 물든 칼을 들고 델피 신전으로 들어갔다. 아폴로는 ‘끝까지’ 보호하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환난을 당할 때에, 특히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09.28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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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은 제의적, 도덕적 정결 개념에 중심을 둔 긍정적인 의미를 상징한다. 더럽다는 것은 이교도의 생활과 혼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순결성을 잃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사데교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영적 상태가 그러했다. 하늘의 사자들은 종종 흰 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된다. 아시아 도시들에서 Greco-Roman 예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흰 옷을 입었다. 그 이유는 흰색이 신들에게 가장 합당한 색깔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흰 옷은 신부의 예복, 순수함, 구원, 빛, 천사들, 공의, 정의, 하나님의 군대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09.22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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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람들은 행성인 금성, 즉 새벽 별의 영광을 강조하였다(시락 50:6-7). 그 이미지를 위대한 통치자들에게 적용하였다(사 14:12). 고대는 Ishtar, 현재는 금성(Venus)을 지칭하는 세 가지 이름이 있다. 새벽 별(morning star), 샛별(day star), 저녁 별(evening star). 금성은 동틀 녘에 나타난다. 새 날을 알리는 별로 인식되었다. 새벽 별은 환난의 긴 밤이 끝나고 새로운 종말론적인 날 곧 동틀 것이라는 약속이다. 성경에는 약 70여 구절에서 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천체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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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
2021.09.14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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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은 특정한 지역이나 민족이 아닌, 우주적 대격변을 제시하면서 복음의 대상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한다. 복음이 지구촌 구석구석 전파돼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땅의 약속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창세기 1-2장에서 나타난다. 황량한 광야에서 하나님이 임재 하는 유일한 장소는 성막이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유일한 처소는 성전이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독특한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였다. 최초의 성소는 에덴이었다. 하나님이 거니시는 성소였다. 아담이 하나님과 거닐면서 대화를 하던 곳이었다. ‘거니셨다’에 해당하는 ‘הלך’(할라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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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
2021.09.08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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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이슬같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서리처럼 과립 형태로 되어 갓씨 모양을 닮았다. 맛은 꿀 섞은 맛이다. 매일 거두어야 한다. 만나는 갈은 후에 구워 먹을 수 있었다. 만나는 모세 시대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여행하는 중에 광야에서 먹은 주된 음식이다(출 16:35). 초자연적으로 제공된 음식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 도착했을 때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떡’을 주었다. 그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의 음식을 먹을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 이 명칭에 대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08.31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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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함은 세상의 반대의 와중에서 성도들을 규정하는 요한계시록의 핵심 특징이다. 이 충성됨은 먼저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신실하신 예수님과 요한계시록 자체의 ‘신실한 말씀’에 대하여 사용되고 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요청은 독자들을 전쟁터의 군인으로 생각하여 주어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에서도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신자들이 순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두에게 헌신을 요청한다. 이것이 이긴다는 의미다.‘충성’에 해당하는 ‘pistov"’(피스토스)는 ‘신뢰하는’(tr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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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
2021.08.24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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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고난은 창조된 세상에 침입한 것으로 간주된다. 창조는 선했다(창 1:31). 죄가 들어왔을 때 고난도 들어온다. 싸움, 고통, 힘든 노동, 죽음의 형태로 진입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고난은 궁극적으로 말소된다.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는 특별히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것이다. 요한은 장차 임할 고난을 피할 길을 찾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됨은 고난 받음을 의미한다. 독자들에게 끝까지 잘 견디어서 예비 된 복을 받으라고 권한다.‘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08.17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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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해당하는 ‘basileiva’(바실레이아)의 본래의 의미는 왕이 되는 것이다. 왕의 지위와 왕권을 뜻한다. 왕위(office of king) 또는 왕정(kingly rule)으로 가장 잘 번역된다. 요한계시록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고 하늘 보좌에 앉으신 예수님이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고, 그를 믿는 공동체를 ‘나라’라고 언급하고 있다. ‘나라로 삼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해방 받은 자, 즉 구원받은 자가 현재 통치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라에 속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정당한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08.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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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시인의 시 ‘슬픔의 실체’는 한 줌으로 변한 자식을 상실한 애가다. “내 삶의 원천이며/ 원동력인 슬픔이여/ 막막한 슬픔이 나를 일으켜 세우곤 했다.”고 읊고 있다. 슬픔보다 애통이다. 기쁨보다 슬픔이, 슬픔보다 애통함이 더 힘이 있다는 말이다. 애가는 ‘슬픔의 표시로 머리나 가슴을 주먹으로 치다’를 뜻하는 동사에서 유래한다. 그리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렉스’에서 자신의 눈을 상하게 한 오이디푸스가 불렀던 노래다. 애통함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좌절을 극복하는 모멘텀을 찾는 기술을 자연스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08.04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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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Emmanuel Levinas는 ‘신, 죽음 그리고 시간’의 도입부에서 답한다. “경험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어떤 행동이 멈추는 것이다. 죽음은 회복할 수 없는 간격이며 분해이며 응답/반응-없음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자문자답한다. “수만 년을 살 것처럼 행동하지 마라. 죽음은 항상 너의 머리 위에 머물고 있다. 잠시 후면 너는 모든 것을 잊을 것이다. 잠시 후면 모든 것이 너를 잊게 될 것이다.” 미국 통계청에 의하면, 1초에 1.8명씩 죽는다고 한다. 태초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07.2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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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찬송은 요한계시록의 절정에 이른다. 하나님이 세상 왕국과 사탄의 왕국에게 승리한다. 이 분위기는 ‘통치하시도다’로 잘 표현되어 있다. 구약의 배경에 비추어 보면, 발단의 의미를 가진 말로 ‘통치하기 시작하셨도다’로 번역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어린 양의 죽음으로 성취되었다. 이미 바벨론이 멸망했다.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행해졌다. 성취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심판 이후에 세워졌다는 것을 시사한다. 부정과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성취된 통치의 절정 또는 마지막 결론을 강조하는 완성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07.2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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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한 자’의 문자적 의미는 ‘소녀들, 처녀들’을 뜻한다. 여성의 비유적 표현은 육체적으로 처녀라는 의미의 소녀, 결혼 연령의 젊은 여자를 가리키는 파르테노이로 시작한다. 여자를 가리키는 ‘순결한 자’는 남자와 여자를 모두 망라하는 개념이다. 처녀를 뜻하는 파르데오이를 남자에게 적용한다. 극히 드문 일이다. A.D. 1세기 이전에 분명히 알려져 있지 않는 용법이다. 순결한 자는 여러 면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비유다. 그들은 정혼한 처녀로서 절개를 지켰기 때문이다. 짐승을 숭배하기를 거부한 자들이다. 신앙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07.1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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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과 속량은 예식과 상업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를 생각하게 한다. 전자는 성전, 후자는 시장이다. 전자는 종교의식에서, 후자는 사업상 거래로 넘어간다. 전자는 십자가에 의하여 진정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초점을 맞춘다. 후자는 십자가에 의하여 죄인이 속함을 받아야 하는 바, 죄인의 궁지에 초점을 맞춘다.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인을 떼기에 합당한 어린 양께 새 노래를 부른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다. 속량은 땅의 거주하는 자의 폭정과 짐승에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07.0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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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육체의 생명을 위해 필수적이다. 피가 몸 안에 흐르고 있는 동안 육신은 살아 있다. 그러나 몸 바깥으로 나온 피는 생명이 없음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언급된 피에 관한 내용은 대부분 몸 바깥의 피를 가리킨다. 피라는 단어는 자주 폭력적인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나타내는가 아니면 죽음을 나타내는가. 전자는 희생제사에서의 피다. 희생의 피가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육신으로부터 해방시킨 생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후자는 폭력을 동반한 죽음이다. 피는 죽음을 의미한다. 죽음은 희생의 본질이 아니다. 희생에 대
이승희의 묵상칼럼
이승희 목사
2021.06.29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