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48) 사랑(agape)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모든 사랑의 기초, 십자가를 통한 사랑

‘사랑이 무어냐’고 질문을 받았다면 1960년대 나훈아의 히트곡에서는 ‘눈물의 씨앗’이라는 가사를 빌려 눙쳤을 것이다. 그러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미국의 웹스터 사전도 love를 ‘두 사람의 성적인 감정이나 활동’으로 풀이한다. 성령의 은사는 몸의 기능들인 반면, 사랑은 몸의 지체들이 어떻게 기능할지 결정한다. 사랑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결과 서로에 대해 갖는 존중과 애증이다. 자유에 해당하는 ‘free’는 선사 인도유럽어로 ‘사랑하다’인 pri가 어원이다. 사랑의 pri에서 자유를 뜻하는 free가 나왔다. 자유가 있는 곳에 참된 사랑이 싹틔울 수 있다. 사랑이 있기에 자유가 있다.

사랑은 두 방향으로 진행한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또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엔 거짓이 없다는 말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주어가 사람이다.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다. 부부사랑, 부모사랑, 자녀사랑, 친구사랑, 심지어 원수사랑까지 포함한다. 너를 향한 나의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사랑이다. 순수해야 사랑이다. 만일 사랑한다고 말할지라도 거짓이 감추어져 있다면 위선이고 가식이다. 그리스도인이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다. 사랑의 기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바울은 로마서 1장 이하에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을 노래한다. 이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노래하는 찬가에서 절정을 이룬다. 바울은 크게 세 가지를 주장한다. 첫째,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사랑의 기초가 된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른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을 그들의 가슴 속에 넓게 쏟으신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구분될 수가 없다(롬 5:8; 8:37).

1. 순수한 사랑이여라

예수님은 가장 큰 계명이 무어냐는 질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대답했다. 구약의 중요한 두 본문을 결합하여 대답했다(레 19:18; 신 6:4-5). 이처럼 그리스도인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계명에 따른 순종이요, 의무이다. 그러나 그 사랑조차 우리의 노력의 산물이 아닌 성령의 열매다(갈 5:13).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사랑은 거짓이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사회는 위선적이다. 그리스도교를 배경으로 하는 유럽에는 농노제가 있었고 조선에는 노비제가 있었다. 사람도 위선으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의미에서 위선자다. 위선(僞善)은 “겉으로만 착한 체함. 또는 그런 짓이나 일”이다. 언행 불일치가 위선이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사랑에는 위선이 없다’이다. 이는 ‘순수한 사랑’ 혹은 ‘진정한(sincere) 사랑’이다. NRSV는 ‘Let love be genuine’(사랑은 순수하게 하라)로 명령법 동사를 보태어 번역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고 십자가에서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 기초를 마련하였고, 그 사랑의 힘으로 가능해졌다(요 13:34; 요일 4:9-11).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사랑을 언급하였다(5:5-8).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사랑에는 거짓 없을 것을 요구한다(고후 6:6; 참조, 벧전 1:22). 사람들이 겉으로는 친절하고 멋진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 진정한 사랑과 애정이 부족할 수 있다. 사랑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참다운 사랑이 아니라 다만 위선일 뿐이다. 침공한 그리스의 대군에 맞서 10년 여 항전해 온 트로이가 무너진 건 채 하루가 되지 않았다. 트로이 사람들에게 말은 신성한 동물이었다. 목마의 바깥엔 “그리스인이 이것을 아테네 신에게 바치나니 부디 고국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가호를 빕니다”란 글이 새겨졌다. 목마(木馬)는 간계(奸計)의 도구이자 위선(僞善)의 상징이었다.

모든 좋은 선물은 인간을 통해 조작되고 황폐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이 신자들의 마음에 부은 바 사랑(5:5)이 다른 신자들에게 대한 애정과 존중의 표현으로서, 계속 진실한 것이 되어야 하고, 악에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하며, 선한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랑은 거짓 없음을 전제한다. ‘거짓이 없는’에 해당하는 ‘ἀνυπόκριτος’(아뉘포크리토스)는 ‘사랑’에 해당하는 ‘αγάπη’(아가페)의 고정적인 속성을 뜻하게 되었다(고후 6:6-7). 문자적으로 ‘위선 없는’을 의미한다. 따라서 ‘거짓 없는, 진심어린’을 뜻한다. 스펄전 목사님은 위선적 신앙을 빗대어 ‘비 없는 구름’ 같고, ‘말라 버린 개울’ 같다고 했다. 그리고 ‘마치 가난한 연극배우가 왕의 역할을 하다가 연극이 끝난 후에는 가난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허무함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했다.

2. 이웃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랑은 삼척하지 않는다’이다. ‘삼척동자’라는 은어가 있다. 삼척이란 무엇인가. ‘아는 척, 가진 척, 힘센 척’ 세 가지 거짓된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사랑은 남에게 ‘보여주기’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보여주기’가 극대화할 때 ‘스펙터클의 사회’가 형성된다. 현실을 뒤로 미루고 가짜 이미지로 대체한다. 스펙터클(spectacle)의 사회는 거대하고도 강력한 이미지들을 생산함으로써 대중을 압도하고 기만한다. 그것은 대중을 ‘구경꾼’으로 전락시킨다. 이것이 외식 또는 위선으로 일컫는 ὑποκριτης(휘포크리테스)이다. 사랑은 겉과 속이 같아야 할 뿐만 아니라 순전하며 허위가 없어야 한다. 거짓에 해당하는 ‘휘포크리테스’는 가면 뒤에 있는 자신의 진짜 정체를 숨기는 ‘배우’를 뜻했다. 복음서에서 ‘외식하는 자’를 번역한 단어이다(마 15:7). ‘휘포’(~아래에)와 ‘크리노’(분리하다 결정하다 심판하다)’가 합쳐진 ‘휘포크리노마이’(대답하다, 대응하다, 무대에서 대꾸하다, ~인 척하다)’에서 유래했다. 외식(外飾) 또는 위선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속박이’다. 홍콩 무역시장에 ‘코리안 애플박스’라는 무역용어가 있다고 한다. 사과 한 궤짝 사다 뚜껑을 뜯어보면 맨 위에는 크고 먹음직하며 싱싱한 놈이 깔려 있다. 한 층 걷어내면 위에 깔았던 놈보다 약간 처진 놈으로 깔리게 마련이다. 아래로 갈수록 작아지고 모양도 고르지 않으며 더러는 상한 놈도 나타나곤 한다. 이처럼 보이고 안 보이는 위아래가 같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이 지니는 거짓 없는 단순성을 믿는 사람들의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에 단순히 외관상 사랑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자신의 태도에 부합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는 사랑의 실패요 악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와는 일치하지 못하는 것이다.

거짓 또는 위선에 해당하는 휘포크리테스는 양면이 있다. 긍정적인 의미는 무대에 출현하여 합창의 독백적인 가사를 대화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응답자(answer)’로 이해될 수 있고, 관객에게 상황을 설명하여 주는 ‘나레이터(narrator)’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었다. 부정적인 의미로는 ‘마치 인양 인격(as-if personality)’이라는 심리학 용어와 같다. “자신의 사고와 정서에 참여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인격 장애”를 일컫는다. 자신의 역할에 일치시키지 못하는 배우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이로부터 숨김(dissimulation), 가장(disguise)이라는 뜻이 되었고, 위선의 의미로도 사용하게 되었다. 구약에서 말하는 위선 또는 외식의 개념은 표리부동이나 불성실이라기보다는 ‘경건치 않음’과 ‘하나님의 율법을 경시하는 것’ 행위이다.

중국 신해혁명 당시 동맹회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던 풍자가 이종오(李宗吾)는 ‘후흑학(厚黑學)’이라는 책에서 자신이 중국역사 24사(史)를 모두 읽어보니 남는 건 결국 ‘후흑’ 두 글자였다. 문자 그대로 낮 가죽의 뻔뻔함(面厚)와 마음의 음흉함(心黑)을 일컫는다. 뻔뻔함과 음흉함이 없으면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더란 얘기다. 그에 따르면 후흑에도 단계가 있다. 1단계는 낯가죽이 성벽처럼 두껍고 속마음이 숯 덩어리처럼 시커먼 것이다. 가장 고수는 ‘낯가죽이 두껍지만 형체가 없고 속마음이 시커멓지만 색채가 없는’ 경지가 후흑의 극치다. 바울은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말한다. 외식과 위선이 없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뻔뻔함과 음흉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연극 무대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은 연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의 무대는 실제 세상이다. 사랑과 위선은 서로를 배척한다. 같은 필드에 공존할 수 없다. 하지만 거짓 사랑이라면 유대의 배신의 입맞춤일 것이다.

히포크리테스에서 ‘외식’을 뜻하는 ‘hypocrisy’가 유래했다. 신약성경에서 두 가지 근원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고대 헬라어에서 무대의 연기나 행동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하나는 ‘오염된’ ‘경건치 않은’을 뜻하는 히브리어이다. 욥기에서 대다수 나오는 히브리어 ‘חָנֵף’(하네프)는 ‘하나님을 잊어 버린 모든 자’(욥 8:13), ‘사악한’(욥 20:5; 27:8)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바울은 아가페를 누구보다 많이 언급한 까닭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 이전에 거의 쓰이지 않았던 말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아가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 관해 사용되었던 것을 사람을 향한 아가페로 사용을 빈번하게 한 것이다. 로마서에서 인간의 아가페를 이야기하기 전에 하나님의 아가페와 그리스도의 아가페를 앞서 언급한 뒤에 12장에서 비로소 나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은 인간의 아가페는 신적 아가페의 표현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당연시하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거짓 없는 사랑, 즉 순수한 사랑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일체의 거짓이 없듯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할 때 우리의 사랑이 순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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