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춘 목사(천광교회. 역사편찬위원장)

신 목사님, 내가 출마 선언하기도 전에 S장로가 전화가 왔어… 다섯 장을 달라는 것이야, 그러면 당선시켜주겠다는 거야. 두당 170씩 계산해서 그렇게 나왔대...

   몇달 전 인천성문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시던 이원호 목사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저를 보고싶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어디냐고 하니 지금 교회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1층 교육관에서 권사님들이 주일, 음식을 위하여 파를 다듬는 모습을 보며 급히 제 사무실로 오셨습니다. 오시자마자 첫번 말씀이 이번에 부총회장에 출마할 결심을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전만해도 출마할 마음이 없었는데 출마를 결정한 계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 목사님, 내가 출마 선언하기도 전에 S장로가 전화가 왔어. 다섯 장을 달라는 것이야. 그러면 당선시켜주겠다는 거야. 두당 170씩 계산해서 그렇게 나왔대” “그래서요? 드리지 그랬습니까?”라고 웃긴다는 표정으로 말을 건넸습니다. “이 사람아, 내가 무어라 그랬는줄 알아?” “뭐라고 했습니까?” “너, 예수 믿는 것 맞아? 너 천국 갈 것 같아? 하고 전화를 끊었어. 그 뒤로 여러 번 전화가 왔어. 그럴 때 마다 끊어버렸어. 그러고 나서 생각해봤어. 그래 내가 교단을 바로 세워야겠다. 그래서 출마를 결심했어”

   이 목사님이 흥분하시면 얼굴이 벌게지면서 눈빛이 호랑이 눈처럼 번득이는 특유의 모습이 아름다웠고, 그 의로움과 불의에 대하여 분개하시면서도 복음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모습이 선하고 존경스러웠습니다. 그 대화가 이원호 목사님과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그리고 비보를 전해 들었습니다. 교단의 많은 선후배 목사님과 그를 사랑하는 장로님들이 얼마동안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래도 교단에 저렇게 의로운 목사님이 계셨는데......참으로 낙담이 되었습니다. 의인의 죽음, 한창 일하고 교단을 위하여 일해야 할 분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다니?

   오랫동안 고민하며 기도하는 중 이사야 57장 1,2절의 말씀이 문득 뇌리에 스쳤습니다.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진실한 이들이 거두어 감을 당할지라도 깨닫는 자가 없도다. 의인들은 악한 자들 앞에서 불리어가도다. 그들은 평안에 들어갔나니 바른 길로 가는 자들은 그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 리라> (개정 개역판). 개정 개역판 전에 사용하던 개역한글판 성경에는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 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는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로 되어 있습니다.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화액 전에>라는 말은 히브리어 (미페네이 하라하)입니다. 즉“불유쾌한 일들, 사악한 일들, 부정한 일들, 윤리적 죄와 악한 일들의 얼굴을 보기 전에”라는 뜻입니다.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는 말입니다. 악한 자들의 더러운 손길과 얼굴을 대하여 그가 더럽혀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기에 의인을 데려가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선지자가 요절을 당하는 것은 악 인들의 소행에 더럽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일찍 데려가신 일이라는 요지의 말씀입니다. 보통 장수하고 형통하는 것을 신앙의 결과물로 보지만 최소한 선지자의 삶은 그와는 반대의 경우가 허다함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에게 있어서 장수와 형통이 복이 아니라 오히려 단명함이 복일 수 있습니다. 의를 말하고 선함을 외치는 선지자가 정치판에 뛰어 들어 더렵혀지기 전에 하 나님께서 취하여 가신 것임을 깨닫는 자 가 없도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외쳤습니다. 성경에서 악한 왕들이 장수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합, 아하시야, 므낫세 등은 장수했습니다. 반면에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들이 단명했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인들의 장수와 형통이 복이 아니라 저주이며 의인들의 요절이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보살핌이라는 역설적 진리에 접하게 됩니 다. 악인들이 판치고, 악인들이 의인으로 가장하여 사기치고 등치며 오래오래 잘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것입니다. 이원호 목사님께서 일찍 데려감을 당한 것은 그렇게 이해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교단의 정치판 속에 들어가면 그 의분에 찬 목사님, 거친 숨소리를 가졌지만 진실을 가진 목사님, 겉으로는 급하게 보이지만 내면에는 양같은 영혼을 가진 목사님이 당할 그 더러움, 지저분함, 돈맛에 길들어진 부패성, 가야바의 합리론이 난무하고, 유다의 합리론이 판을 치는 종교 집단에서 복음전파자가 당할 수모와 더 나아가 그들과 함께 더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일찍 그를 취하여 가셨던 것 아닐까를 생각해 봅니다. 모쪼록 그분의 취하여 가신바 된 것을 계기로 교단이 정화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혹시라도 주님이 오신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못할 25시에 직면한 것은 아니겠지요?

이사야는 그런 의인들의 죽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고요. 이원호 목사님은 정로로 행하셨기에 이제 침상에서 편히 쉬고 계실 것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 있는 의인들을 위로하고 싶군요. 이원호 목사님의 신앙간증집 <아! 겐그레아>의 에필로그에 있는 글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감합니다. 이 목사님은 Coram Deo(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을 남기며 이렇게 마쳤습니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온 길에 주님께서 늘 동행해 주셨다. 하나하나 지난날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주의 사랑을 뜨겁게 느낀다. 여기 첫사랑을 다시 찾는 마음으로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글로 거짓없이 끌어 모아보았다. 이글을 쓰면서 순간순간 내 자신도 감격하여 울고 웃으며 지나온 세월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오늘도 <코람데오의 신앙>이 나에게 힘을 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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