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건 목사(빛교회, 조직신학 교수, Ph. D.)

서울대 영문과 졸, 장신대 신대원 졸 (M.Div.) Princeton Seminary (Th.M.) Drew University (조직신학 Ph.D.) 뉴저지 빛교회 담임목사 (현)뉴저지 신학대학(학장), 뉴욕장신 조직신학 교수

신약 성경의 맨 처음은 복음서로 구성되어 있다. 신약의 복음서는 구약의 구성과 차별되는 독특한 이름과 내용을 갖는다. 마태 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한다. 복음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세계”로 시작된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 그 복음의 내용은 논리적으로 어떤 말이나 메시지가 되어야 할텐데,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복음으로 규정한다. 그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 구체적으로 그의 생애와 가르침이 곧 복음이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건 속에 담긴 의미를 밝힘으로 복음의 내용을 이해하고자 한다.

  1. 성육신 속의 복음

먼저 취급할 것은 그의 생애의 첫 시작, 그의 성육신 속에 담긴 복음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한 아기로 세상에 태어나셨다. 이는 인간의 경험으로 보아 매우 신기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이런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한 사실은 복음의 중요한 내용을 구성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배경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참 모습을 계시하시기 위해 오셨다. 복음서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었다(요1:14).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마1:23), 인간의 생사의 모든 경험에 함께 참여 하시며,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짊어 지신 하나님이셨다(마8: 17).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 가까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둘째,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고통과 죽음에 사로 잡힌 인간을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셨다. 그는 소경, 문둥병을 앓는 사람, 중풍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을 고치시고, 죄로 인해 생명을 잃게 된 여인을 용서하시고, 심지어는 죽어서 소망이 없는 사람을 다시 살려 주셨다. 이런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파괴된 세상을 새롭게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가 세상의 마지막에 다시 오실 때,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의 모든 비참한 형상이 회복될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사 35장)

셋째, 예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오셨다는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 45).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죽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어떤 성취를 위해 산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구약의 여러 종류의 제사는 사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우리 죄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우리 죄 값을 치루어야 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세상에 오셨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제물은 흠이 있어서는 안되었다. 정결한 짐승, 흠 없는 짐승이 제물로 바쳐졌다. 이는 우리의 대속의 제물로 오시는 예수님의 정결함과 의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의로운 몸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다. 그렇기 위해서는 인간이 태어나는 자연적인 방법으로 올 수 없다. 왜냐하면, 남자와 여자의 연합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죄의 성품, 죄의 종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우리 자신을 살펴 보면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한결같이 우리 자신의 죄성(sinfulness), 곧 죄의 종 된 상태로 태어 난 것과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고백한다.

예수님은 죄 없이 태어나신 분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우리와 다른 방법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다. 그 방법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태어나신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탄생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그릇이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예수님 탄생의 도구가 되었다. 그의 순종과 헌신은 우리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자신의 꿈과 행복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몸을 비어드린 그 헌신은 우리의 귀감(모범)이 되고 있다.

동정녀 탄생은 일찍이 주전 700년 경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었던 것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그 예언의 성취로 예수님은 동정녀를 통해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한 처녀(사람)를 통해 예수님이 탄생하신 사건은 우리 신앙 생활과 밀접한 관계와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남자와 여자에 의해서만 태어나면, 죄와 죽음의 세력에 사로 잡힌 인간으로 태어난다. 우리가 그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우리 속에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 안에는 육신의 부모로 이어 받은 모습과 전혀 다른 형상, 곧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빚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이처럼 성령은 사람 속에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창조하는 역사(役事)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순종과 헌신의 여인 마리아의 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을 잉태시키고, 마침내 세상에 탄생시키신 성령께서는 죄와 죽음의 종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 속에 새로운 생명, 곧 죄와 죽음을 이기고, 하나님 아들의 형상을 닮은 생명을 창조하고 계신다.

그 성령의 역사로 인해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새로운 피조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요일3:2).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뜻은 우리 속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빚어 지는 것이다(롬8:29). 그 뜻을 우리 속에 이루고 계신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은 “생명의 영,” “창조의 영”으로 우리 속에 참된 생명을 창조하시고 계신다. 그 창조의 역사가 우리 안에 풍성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힘써야 할 일들이 있다. 우리는 의와 믿음 안에 살면서 성령을 근심케 해서는 안 된다(엡4:30). 우리가 짓는 죄는 성령을 근심케 한다. 의로운 삶에 힘써야 한다. 또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기도에 힘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의 역사와 기도는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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