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웬(John Owen, 1616-1683)은 누구인가? 오웬의 1번 대명사는 “청교도(淸敎徒, Puritans)의 황태자(Prince of Puritans)”라고 불린다(Andrew Thomson, John Owen: Prince of Puritans, Christian Focus Pub, 2004). 청교도는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중요 부류이다. 잉글랜드에서 떠나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들을 분리파 청교도(Brownist 혹은 Separatists)라고 하고, 잉글랜드에 남아서 운동을 한 축은 비분리파 청교도(Non-separating Puritans)이다. 전자는 회중파(Congregationalists)로 부르고, 후자는 독립파(Independents)로 부른다. 17세기 존 오웬은 잉글랜드 장로파에서 독립파로 전향했다. 18세기 조나단 웨드워즈는 비분리파 청교도(회중파) 사역자로 식민지 지역에서 사역했다.

오웬은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이 체결된 1643년(27세)에 교구 목사가 되었다. 1649년에 크롬웰의 군종목사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정복 전쟁에 참여했다. 『소요리, 대요리 문답』은 1645년에 서문을 썼다. 『소요리, 대요리 문답』은 오웬 개인이 작성한 소책자이다. 오웬의 청년기 작품으로(29세) 볼 수 있다. 첫작품은 1642년 A Display of Arminanism을 발표했다.

『소요리, 대요리 문답』에서 기억할 것은 표준문서, 표준신학을 근거해야 한다. 칼빈이나 루터의 표준신학은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에서 시작했다. 오웬이 『소요리, 대요리 문답』을 작성하는 기본이 되는 표준신학은 무엇일까? 그것은 독립파의 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소요리, 대요리 문답』 안에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웬은 1642년 잉글랜드 장로파인 에드먼드 칼라미의 설교에 감화를 받았다. 1644년 에섹스의 포드햄(Fordham)에서 에섹스의 코게샬(Coggeshall)로 사역지를 이거(移居)했고, 그곳에서 리챠드 백스터(Richard Baxter)와 존 호른(John Horne)의 논쟁에서 독립파로 전향했다. 오웬은 분리파 청교도 존 코튼(John Cotton, 1585-1652)의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읽으면서 독립파로 전향했고, 『소요리, 대요리 문답』(1645년)을 작성했다.

잉글랜드(의회파)는 1643년 7월 1일에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개최하여(1643-1649), 1643년 9월에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와 함께 “엄숙 동맹과 언약”을 체결했다. 1644년 8월에 신앙고백서 작성위원회를 조직해서, 1646년 11월에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1647년에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채택했다. 1647년 WCF를 근거로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을 작성했고, 1648년에 잉글랜드 의회는 세 종류의 문서를 채택했다. 당시 잉글랜드 의회에는 장로파가 다수였다. 군권은 독립파인 크롬웰이 장악했는데, 그의 군대 안에는 수평파(Levellers, 분배파, Diggers)가 있었다. 1648년 크롬웰은 수평파를 제압했고, 장로파를 무력으로 의회에서 추방시켰다. 그리고 1649년 찰스 1세를 처형했다. 1649년에 오웬은 크롬웰의 군종목사였고, 1652년에 옥스퍼드 부총장직을 수행했다. 크롬웰은 잉글랜드 의회가 결정한 신앙고백서에 대한 효력을 중지시켰고, 아일랜드(1649년)와 스코틀랜드를 점령했다(1650년). 1661년 왕정이 복고되면서 무효법(Act Rescissory)으로 "39개조 신앙고백서"로 전환되었다.

잉글랜드 장로파와 스코틀랜드 장로파(언약도)는 다르게 분류해야 한다. 잉글랜드 장로파는 소수로 전락되었고, 독립파는 영국국교회의 저교회(The Low Church)로 편재된 것으로 보인다. 김경식 목사는 스코틀랜드 언약도는 잉글랜드 장로파보다 독립파와 더 가깝다(아퀴나스 거부)고 분석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존 오웬은 참석하지 않았고, 식민지에 있던 분리파 청교도들도 참여하지 않았다. 독립파로 총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dissenting brethren, 5명의 독립파 청교도) 오웬이 주도한 사보이 선언(Savoy declaration, 1658년)에 모두 참여했다. 정황으로 볼 때 오웬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작성에 대해서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오웬은 신앙고백서가 작성될 때에 개인으로 “소요리, 대요리 문답”을 작성해서 교육했고, WCF를 대체한 “사보이 선언”을 작성했다.

『소요리, 대요리 문답』을 번역한 마르투스 출판사(대표 이동훈)에서 작성한 서문에서 “비록 짧은 소책자이지만 장로파였던 오웬이 왜 독립파로 옮기게 되었는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사보이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는지를 이 책을 통해 그의 사상을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소개했다. 마르투스 출판사의 소개에서 개혁파의 일치신조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는 존 오웬의 사상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존 오웬의 『소요리, 대요리 문답』은 장로파나 개혁파 신학이 아니거나 오웬의 『소요리, 대요리 문답』을 장로파나 개혁파의 신학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읽는 것이 효과적인 독서가 될 것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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