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인, 본푸른교회 최원영 목사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삶의 자리에서 어떻게 반응 하는가?로 신앙의 무게가 측량된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맞이하는 그 시간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인가를 고려하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따르려는 영적 본성을 유지하는 것이 영에 속한 사람의 삶이 자리인 것이다.

  산업지표도 흔들거리고, 미래 산업육성도 속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청년들의 암울한 삶의 모습을 대변했던 수저계급론이 사회적 분위기를 더욱 침울하게 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서 암울하다고 앵무새처럼 노래하며 어둠을 몰고 다니는 역할을 해야 하는가? 그렇게 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지 않았다. 2016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지혜일까? 크로노스의 삶이 아니라 카이로스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에서 답을 찾는 혜안이 있어야 한다.

  첫째, 말씀을 더욱 묵상하라. 2016년을 살아가는 삶의 나침반이 필요하다. 이것은 성경이다. 성경은 길을 제시한다(시119:105). 성경이 주는 영적,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관계적 에너지는 이미 검증되었다. 시편기자는 말씀의 완전성을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하고,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하신다”(시19:7-8).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히4:12). 성경을 사랑하면 성경에서 세상을 넉넉히 이길 영적에너지가 나온다. 이 에너지가 있을 때 고난을 고난이라 말하지 않고, 슬픔이 오히려 기쁨으로 승화시키고, 상황을 반전시키는 힘이 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자신의 삶의 자리를 툭툭 털고 지시하는 땅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결단을 성경은 “말씀을 따라” 쫓아갔다고 한다. 말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세상의 유혹과 더러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정결함을 유지할 수 있고, 공공체를 위해 거룩한 드림을 위한 결단을 쉽게 할 수 있다.
  둘째, 충성된 증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해야한다. 이 땅의 마지막 희망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를 이끌어가는 책임선상에 있는 목회자와 장로는 생각과 언어와 헌신의 태도와 순종의 모습과 삶의 가치관이 달라야 한다. 삯꾼 목사, 뒤돌아 보는 중직자로서는 더 이상 교회를 치유할 능력이 없다. 진짜 주님의 충성스러운 제자로서 사명을 붙들어야 한다. 나의 이익보다는 교회의 유익이 먼저이다. 나의 편리함보다 성도들의 편리함을 더 존중할 수 있는 servant leadership(섬김의 지도력)을 감당해야 한다. 목회자들과 중직자들은 시간, 재능, 물질, 가정, 사업, 생명에 대한 가치관이 달라야 한다. 나의 소유물로 여겼던 것들이 주님이 나에게 맡겨준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하며, 선물을 즐거움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산상수훈의 관점으로 보면 거꾸로 사는 것이다. 남보다 하나 더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공동체를 위하여 내려놓는 삶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증인의 삶이 되어야 한다.
  셋째, 유일신 신앙을 고백하라는 것이다. 삶이 풍족해 질수록 절대적인 여호와중심의 신앙관이 점점 약화되어 간다. 또한 다문화 사회에 도래 하였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다문화, 다종교, 다인종의 시대를 맞았다. 민주사회이며 선진국임을 입증하는 방법은 타 종교와 인종, 문화 등을 인정하고 연합하는 것은 기본적 가치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탁월한 본질이 훼손 받아서는 안 된다. 아합왕 시대에 혼합종교로 인해 바알신과 여호와 신 사이에 백성들은 선택의 능력을 상실했다.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거리는 것이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관이었다. 우리가 믿고 지향하는 주님에 대한 철저한 고백을 잃어버리고 타 종교인들과 연합할 경우 한국의 기독교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혼합종교에 의해 무력해져갈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다시 상기시켜야한다.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16:16). 이 완벽한 고백 앞에서 예수님은 기뻐하셨다. 이 고백의 가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탁월한 고백이다. 마음과 입술의 고백이 살아있을 때 복음의 힘이 공동체를 더 낳은 쪽으로 세워갈 것이다. 우리는 왜 다윗을 좋아할까? 고백이 병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16:2). 다윗의 고백이 너무도 아름답지 않는가? 주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한다. 주만이 나의 복이라고 한다. 절대적인 여호와 중심의 신앙관을 고백하고 있다.
  넷째, 여호와는 나의 기업(시16:5)이라는 고백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순례자의 삶을 걸 어가는 선택받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순례자들은 어떻게 “삶의 자리”들을 해석해야 하는가?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다. 오직 주님만이 내 일터의 주인이시고, 나의 소득을 지켜주실 수 있다. 주님이 지켜주지 아니하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인생이 되고 만다. 가장 복된 인생은 누구일까? 주님이 나의 삶의 전부임을 고백하는 분이다. 이삭이 거주하던 불레셋 땅에 큰 흉년이 들었다. 흉년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셨다. 우리들의 상식이나 합리성이나 경험된 지식에 어울리지 않는 결정이다. 그러나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블레셋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다른 땅들은 흉년인데, 오히려 이삭의 토지는 풍년이 들었다. 그해에 100배나 소득을 얻었다. 성경의 증언은 간단하다.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종이 심히” 많았다. 
  이런 결과가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성경의 증언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우연일까? 아니면 운이 좋아서 일까? 아니면 이삭이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일까? 아니다. 여호와가 복을 주셨다. 하나님이 이삭의 분깃이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삭이 거부가 된 것에 어떤 해석도 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 변두리에서는 더 이상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우리 사회를 한탄하며 계층이론이 더 견고해져가고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현실의 상황을 해석하는 것에는 맞는 말이지만 정답은 아니다. 정답은 여호와가 나의 기업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 일터에 생명의 씨앗이 자랄 것이다.
  다섯째, 삶의 자리를 존중하라. 하나님이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답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16:6).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그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하게 살아난다. “줄로 재어서 나에게 준 그 땅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땅입니다. 참으로 나는, 빛나는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의 자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줄로 재어준 땅은 기쁨이 땅이요, 빛나는 유산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삶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겼다. 하나님은 하와와 이브에게 에덴동산을 삶의 자리로 구역을 정해 주셨다. 에덴동산은 어떤 땅입니까? 모든 것이 풍부한 땅이다. 인간이 살아가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땅이다. 
  그런데, 왜, 아름다운 땅에서 쫓겨났는가? 왜 주인이었던 땅에서 노예로 전락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삶의 자리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답고 기쁨의 땅이라고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일터, 가정, 교회, 대한민국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이다. 
귀하게 여겨야 될 것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이것이 신앙이다. 그런데, 귀한 것을 천하게 여기는 사회적 풍토가 우리 사회를 어둠으로 몰고 가고 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구역을 존중히 여기면, 캄캄한 지하실 예배당에도, 오지에서 땀을 흘리는 선교 현장에도 은혜가 흘러가고, 하나님의 부요심이 흘러간다. 웃음과 기쁨과 따뜻한 대화가 흘러간다. 아름다운 것은 나의 모든 것을 헌신하고 희생하여 지켜야 한다. 지키지 아니하면 쓰레기가 되어 버린다. 쓰레기에는 악취가 진동한다.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며, 똥파리들이 득실거리고 결국에는 주변의 공기를 더럽힌다. 
  하나님이 아름다운 구역으로 정해준 가정과 교회와 일터와 나라가 혼돈과 무질서와 파괴와 갈등의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의 자리를 존중하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삶의 자리를 존중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은 그 장소에서 쫓아내신다. 하나님이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을 현실이라는 상황 앞에서 타협하며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정해준 구역을 망가뜨리고, 부서뜨리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2016년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교회 리더들이 지켜야할 시대적 책임과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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