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이미 로마 가톨릭에서 제기된 것, 결코 새로운 것 아니다

장대선 목사 (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교회를 위한 개혁주의 연구회 회원)

최근 S·N·S에서 극명하게 불거지고 있는 전통적 ‘칭의(justification)’의 개념인 ‘법정적 칭의(forensic justification)’에 대한 문제제기와 함께 대두되는 것이 바로 현대 개신교의 ‘무능(선행의 부재)’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논의이다. 즉 작금의 기독교(개신교)가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무능력하고 부패한 원인은 행위에 대한 강조가 약한 전통적 칭의 개념에 그 원인이 있다는 비판이다. 한마디로 전통적 칭의 개념은 성도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대한 관심을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칭의 개념에 대하여 그러한 반론이 제기된 것은 결코 한국에서 비로소 제기된 것이 아니며 더구나 최근에야 제기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칭의 개념에 대한 반론은 16세기 유럽에서 흔히 종교개혁이라 불리는 물결이 일어나던 시기부터 로마 가톨릭에서 제기되었던 것인데, 이는 칼빈의 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서부터 언급되어 있던 비판인 것이다.

1536년 초판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제1장 율법에 대한 주제 가운데서 칭의를 다루고 있는데, 율법의 용도를 다룬 뒤에 칭의를 설명하면서 부연(敷衍)하기를 “이것은 어떤 불경한 자들의 뻔뻔스러움을 반박하기에 충분하다. 그들은 우리가 인간들에 의한 모든 선행의 추구를 정죄할 때 우리가 선행을 폐기한다고 비난하며, 우리가 사죄는 값없는 것이라고 말할 때 너무 쉬운 사죄를 설교한다고 비난하며, 이러한 유혹에 의해 이미 자기 스스로 죄로 기울어져 있는 자들을 유혹해서 범죄케 한다고 비난하며, 우리가 사람은 행위나 공로에 의해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선행을 위한 열심에서 돌아서게 한다고 중상한다(1559년판은 이러한 비판이 스콜라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으로 언급한다).”고 했다.

이처럼 칭의에 대한 뻔뻔스러운 염려는 이미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 시기부터 제기되었던 아주 오래되고 끈질기며 불경한 반박에 불과하다. 그러한 반박에 대해 이미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해 변론하기를 “그러한 비난에 대해 간단한 답을 주겠다. 우리는 선행(신자들의 선행, 곧 성화와 연결되는)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선한 행실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바울도 그러한 행위들을 “하나님의 영의 열매들(갈 5:22)”이라 말함으로써,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스콜라주의자들의 비판에 대해 칼빈은 1559년판(최종판) 기독교 강요 제3권 제2장에서 더욱 자세히 논박하는데, 칭의(혹은 믿음)에 대하여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기 전까지는 불확실하다고 보는 소위 ‘종말론적 칭의’ 혹은 ‘유보적 칭의’의 개념은 이미 오래전 스콜라 신학에서 제기했던 내용일 뿐이다. N·T 라이트나 김세윤 교수의 주장은 이미 16세기 스콜라주의자들에 의해 종교개혁의 칭의 개념을 주제넘게 우려하는 가운데서 제기되었던 것에 대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인 것이다.

칼빈에 따르면(1559년판 기독교 강요) “각 사람이 스스로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여부에 따라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도덕적 판단으로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한 것이 스콜라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즉 “행위를 근거로 삼아서 우리에 대한 주님의 생각을 판단해야 된다면, 우리는 추측으로 은혜에 전혀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스콜라주의자들이 전 9:1절의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사람이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근거로 그처럼 신자들이라고 해도 최종적인 구원은 불확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칼빈은 간단히 전 9:1절의 맥락을 설명하는데, 칼빈에 따르면 그것은 “현존 상태를 근거로 삼아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미움으로 추궁하시며 누구를 사랑으로 안으시는가를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헛수고를 하는 것이며 아무 유익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스콜라주의자들과는 정반대의 근거(신자들이라고 해도 이 땅에서는 최종적인 구원이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땅에서의 행실을 근거로 구원의 여부를 판단하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로서 전 9:1절 본문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칭의 개념에 있어서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에 대한 신뢰 가운데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서 칭의는 반드시 성화, 즉 선한 행실로서 드러난다는 것이 전체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행실(선행)에 대한 맥락인 것이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마치 인간이 어느 정도 성화를 이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원인이 결코 인간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이 항상 선행(先行)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용납(acceptio)’의 개념을 사용하더라도 스콜라주의처럼 ‘수용하는 은혜(acceptantia gratia)’의 개념으로 사용한 것이 결코 아니다.

결국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언급한 스콜라주의에서의 주장들과 이에 대한 칼빈의 반박을 잘 살펴보면, N·T 라이트나 특히 김세윤 교수의 주장하는 내용들은 전형적인 스콜라주의 신학의 패턴임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그러한 주장들이 얼마나 성경 본문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며 적용인지를 칼빈 선생이 충분히 논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특히 153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

단언컨대 작금(昨今) 개신교 신앙의 무능력과 부패는 행위에 대한 강조가 부실한 칭의 개념으로 인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처럼 생각하는 주장들 가운데서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칭의 개념에 대해 얼마나 무지(無知)한지에 대한 적나라한 실상일 뿐이다. 아울러 이를 통해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우리의 신앙이 무능력하고 부패한 모습을 보이는 것 자체가 우리들 자신에게서는 결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와 아울러 우리의 부패와 무능력의 원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무지(일차적으로는 칭의 개념에 대한 무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것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에 대한 무지)’라는 사실이다. 호 4:6절 말씀과 같이 지금도 여전히 “내 백성(신자들)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것이다.

호 4:10절에서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그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음행하여도 수효가 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를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고 하셨다. 이는 곧 말씀을 공급받아도 여전히 주리고 공허하며, ‘간음’ 곧 배교의 행위를 하고서도 수효는 오히려 늘지 않고 줄어들 뿐이라는 말씀이니, 종말론적 칭의 혹은 유보적 칭의와 같이 변질되고 속 빈 주장들은 아무리 먹어도 여전히 주리고 그 삶 또한 전혀 윤택케 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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