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건 목사(빛교회, 조직신학 교수, Ph. D.)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믿고 섬기는 삶을 그 내용으로 한다. 오늘날처럼 누구의 간섭과 지배를 꺼리는 시대에 예수를 왕으로 고백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

사람이 본래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질서 속에 살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일 뿐 아니라, 법을 정하시고 그 법을 집행하는 분이시다. 지으신 만물 속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어 모든 만물을 지배한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자이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은(창1:28) 축복이자 명령이다. 또한 에덴 동산을 지으시고 그것을 다시릴 것(창2:15)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다(창2:17). 사람은 창조 이후 하나님의 명령 아래 살게 된 것이다.

만물을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았으면서 또한 하나님의 명령 아래 사는 것이 인간의 독특한 위치이다. 창조의 질서란 위로 하나님을 모시고, 아래로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에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질서를 떠나는 것은 인간에게 죄와 죽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런 명령을 주신 까닭은 인간으로 자신의 피조성을 깨닫게 하는 데 있으며,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위치와 사명을 지킴으로 축복된 삶을 사는 데 있다. 인간은 그 명령 안에서 하나님과 축복된 관계를 지킬 수 있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권위 또는 명령 아래 사는 존재였다.

그러나 첫 사람은 그 자유를 남용하고, 하나님의 금하신 명령을 범하였다. 불순종의 배경 속에는 인간이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고자 하는 데 있었다(창3:5). 그 결과 사람은 죄와 죽음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었다(창3:3:19). 만물의 영장으로 왕적 지위를 갖고 살도록 지음을 받은 사람이 자기 지위를 이탈했을 때, 이 땅에 저주를 초래했고(창3:17), 인간 자신 죄와 죽음, 더 나아가서 어둠의 세력, 마귀의 종된 지위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왜 굳이 그런 명령을 부과했을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자유한 인격(자유 의지)을 지니고 창조되었음과, 사람은 자유 의지를 올바로 사용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는 축복의 삶, 창조적 삶을 살도록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은 동물처럼 본능을 따라 살지 않고, 인격과 결정과 책임을 안고 사는 존재이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올바른 선택과 결정을 통해 더 나은 내일을 창조하며 살게 된다. 이는 우리 안에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삶의 방법이다. 또한 우리는 본능과 충동으로 사는 동물과 다른 삶을 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아래서 그 법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창조의 때부터 인간은 하나님의 법과 명령 아래 사는 존재였다. 성경은 우리를 지으시고 다스리는 왕이 계심을 가르친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평강을 가져 오는 “평강의 왕”이다(사9:6). 인간의 행복은 그 통치 속에 사는 데 있다. 그 통치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자는 혼돈과 어둠 속으로 들어가며, 마침내는 생명을 잃어 버리게 된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이런 사실을 알게 되지만,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게 된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결코 평안을 알 수 없다. 그 삶은 반드시 무지와 죄와 우상이 지배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 아래, 하나님의 도움 속에 살도록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은 어둠과 고통과 혼란을 의미한다. 지나간 우리들의 불순종의 경험이 이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이유는 그의 통치 속에서 비로서 우리의 삶은 평강을 찾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살 때는 형통하는 삶을 살았지만,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떠나 살았을 때는 이방 민족의 약탈을 받고 마침내는 나라를 빼앗기기도 했다(왕하17:7-18).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까닭이다.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고는 형통할 수 없었다. 창조의 질서는 곧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모시는 삶은 성경의 가르침과 인간의 삶의 체험을 통해 깨닫는 삶의 원리이다. 세상의 왕은 권력과 심판으로 다스린다. 그러나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로 다스리신다. 그는 강요하지 않고 믿음으로, 인격적으로 그를 알고 모시기를 원하신다. 그를 거부하는 자를 강요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 가셨다. 그러나 그 결과 그 사람들은 어둠의 영의 지배 속에 살게 된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 풍성한 생명을 위해서 왕으로 오셨고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를 듣고 따르는 자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요10:27-28). 그를 믿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활의 생명 안에 살게 된다(요11:25-26). 반면, 그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살 때, 사람은 어둠의 영의 탈취와 압제 속에 살게 된다.

예수님을 거역하고 핍박했다가 그의 사도가 된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불렀다(롬1:1). 그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고후4:5)을 전했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 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는 데 있었다. 그에게는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다(빌3:8). 11세기 중세 시대의 베르나르는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찬송가 85장 1절)라는 가사를 남겨 주었다. 어떤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곤혹스러운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그를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그 인격과 삶을 경배하게 된다.

그 예수는 오늘도 믿는 자들 속에 왕으로 살아 계시며, 그들을 믿음과 성결과 겸손과 섬김의 삶으로 인도하신다. 그가 친히 목자가 되셔서 자기 양들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 창조주이면서 인간이 되셨고, 지금은 믿는 자들의 심령 속에 성령으로 살아 계신 분, 그가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를 알고, 그를 믿고, 그를 섬기는 삶이 피조물인 인생에게 가장 축복된 삶인 줄을 알아야 한다. “왕이신 예수여, 지금 오셔서 우리를 의와 평강으로 다스려 주옵소서!”

맺는 말

복음이란 무엇인가? 성경이 증거하는 복음은 어떤 원리나 교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복음의 주제로 제시한다. 성경은 그 복음의 주제시요, 내용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와 교제로 이끌어 드린다. 거기에 인간의 존귀가 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교제와 연합을 이루는 것, 그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성육신, 생애, 십자가의 죽음, 부활을 통해 우리들의 삶의 실존 속에 참여하시고, 또한 우리를 불러 그의 자취를 따라 오게 하셨다. 사도 바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참여함을 힘쓴다고 했다(빌3:10-11). 복음의 또 다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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