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건 목사, 뉴저지 빛교회 담임목사, Ph.D.

하나님의 교회를 맡아 목회하는 분이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는 이들에게 항상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은 성경적, 신학적으로 사람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일 것이다. 그 대상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모르고 목회하거나, 가르치는 일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신앙생활을 하는 한 개인에게서도 필수적인 요청일 수 있고, 또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목회자, 신학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필수적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주체로서 자기 자신을 올바로 이해함으로 그런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깊이 알 수 있고, 더 나아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이들은 그 대상으로서 사람을 바르게 앎으로, 목회 사역이 감히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임을 알아 더욱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게 될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개혁자 칼빈도 인간 이해의 중요성을 그의 기독교 강요 서두에서 언급하고 있다.

오늘날 다양한 신학들의 차이에서 발견하는 것도, 결국 사람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람에 대한 독특한 이해는 그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전통적, 복음적 신학이 사람의 원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지만,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F. Schleiermacher의 신학 속에는 인간의 원죄와 대속과 구속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연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의 죽음을 부인하고 있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 대답은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찾지 않을 수 없다.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을 창세기 처음 몇 장에서 찾게 된다. 첫째,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피조물이다. 둘째, 사람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복된 사명을 수행하도록 지음 받았다. 셋째, 사람은 그 지위를 저버리고, 스스로 존재하려 했다가 타락하여, 구속의 대상이 되었다. 성경의 긴 내용들은 타락한 인간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이란 인간이 창조의 원 위치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복된 사명을 받들어 사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사는 것이라 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인간 이해는 전통적, 복음적 신학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전통적, 복음적 신학이라 함은, 어거스틴, 루터, 칼빈이 주장하는 인간 이해임을 말한다. 어거스틴의 인간 이해는 Pelagius라는 사람의 주장에 대한 반박 속에서 알 수 있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아담의 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오염되지 않은 자유 의지를 지니고 태어나며, 그 자유의지를 적절하게 구사함으로 죄와 상관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지위에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여하신 자유 의지, 이성을 통한 하나님 이해, 모세와 예수님의 율법과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펠라기우스의 주장에 반박하여 어거스틴은 사람은 아담의 타락의 때에 그 안에 함께 있어, 그의 타락의 성품을 짊어지고 태어난다는 것과, 아담이 창조 시에 가졌던 자유의 능력을 그 후세대 사람들은 상실하였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죄를 피할 수 없고, 선을 행하는 일에는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우리 안의 자유 의지를 회복시키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도록 도우시고, 그 도움 안에서만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이해와 관련한 어거스틴의 주장은 종교 개혁자, 특히 루터에 의해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이처럼 아담의 타락이 그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신학적 인간 이해에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 논쟁과 주제는 종교 개혁 시대에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논쟁으로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1523년에 출판된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론(The Freedom of the Will)”과 그 다음 해에 발표된 루터의 ”노예 의지론(The Bondage of the Will)“은 인간의 의지의 자유 문제, 또는 선행의 능력의 문제에 대해 첨예한 대립을 담고 있다.

에라스무스는 인간의 이성, 또는 마음이 죄로 말미암아 어두워졌지만, 그것이 무능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의 의지는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의 자연적인 수단으로는 개선될 수 없고, 죄를 섬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지가 새로워지고, 그 새로운 의지로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성경을 예로 들면서,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에 있다면, 하나님의 명령과 뜻은 사람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한다. 거룩한 삶과 관련한 모든 명령은 사람이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상태를 전제함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이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도,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인간의 상태를 전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람의 자유 의지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주장은 신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계속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구원에 대한 초청은 인간의 응답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 이 명령은 순종하기가 결코 쉬운 명령은 아니지만, 또한 불가능한 명령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상급과 심판도 인간의 순종에의 가능성을 전제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에라스무스의 이런 주장에 대해 루터의 인간 이해는 다르다. 그는 사람을 표현하는 성경의 말씀, “육체”라는 말은 “죄로 기울어져있는 인간”을 표현하는 말로 이해한다. 이 표현은 창세기 6: 3에 나타나있고, 사도 바울에 의해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루터에 의하면 사람은 날 때부터 그 생각이 악할 뿐이라는 창세기 6:5 인용한다.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한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악을 행하고, 그 의지에 반하여 의의 명령을 들을 때, 그 마음은 분개한다고 말한다:

The will cannot change itself, nor give itself another bent, but, rather, the more it is resisted, the more it is irritated to crave, as its indignation proves. This would not be the case if it were free or had a free will.

(의지는 스스로를 변경할 수 없고, 달리 변화를 원치도 않는다. 그리고 그 의지가 더 저항을 받을수록, 그 분개심이 증명하는 것처럼, 의지는 더 자신의 소욕을 이루고자 자극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의지가 자유하거나,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있을 수 없는 경우이다)

그런 의지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실 때, 성령의 감미로운 영향 아래서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때 의지는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과 성향으로 스스로 반응하게 된다고 한다. 이제 그 의지는 지옥의 문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된다. “사람의 의지는 타고 다니는 짐승과 같다. 만일 하나님이 타시면, 하나님이 의지하는 대로 가게 될 것이다. 사단이 타면, 사단이 뜻하는 대로 가게 될 것이다. 그 짐승은 타는 자를 선택할 수 없고, 무엇을 추구할지도 결정할 수 없다. 오직 그 위에 탄 자가 결정할 뿐이다.”

인간의 의지나 성향에 대한 칼빈의 주장도 루터와 다르지 않다. 그는 인간이 아담의 타락에 동참하였고, 생명의 시작부터 타락한 성품을 물려받게 되었으며, 죄의 유전 속에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칼빈의 인간 이해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 5: 12-19에 근거를 두고 있다. 거기서 죄가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인해 죽음이 들어왔고,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른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아담과 그 후손의 연결된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죽음과 대속의 공로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근거가 되고 있다. 한 사람의 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된 것처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 모두가 그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칼빈의 주장은 소위 칼빈의 오대 강령으로 불리우는 주장 안에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 첫 번째, “전적 타락설(Total Depravity)”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스스로가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죽은 자요, 장님이요, 귀머거리이다. 그의 마음은 속이는 것이 가득 차 있으며 절망적으로 부패해있다. 인간의 의지는 자유하지 않으며, 악과 본성의 종이다. 인간은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악에 대하여 선을 선택하지 않는다. 또한 선을 선택할 수도 없다“

인간의 자유 의지와 관련하여, 이런 신학적인 관찰을 왜 필요한 것인가?

그 이유는 첫째, 신앙생활을 하는 개인에게 올바른 구원의 기초를 제공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하시고자 하는 인간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개인에게 필수적이다. 복음주의 신학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되는가? 그 까닭은 이 구원은 사람이 스스로 이를 수 없는 엄청난 내용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알 수 없는 깊은 타락의 심연, 스스로 고칠 수 없는 영적 질병을 앓고 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의 은총에 이를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뜻과 역사에서 찾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하는 용서와 화해와 자녀 됨, 영광스러운 소망과 부르심과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의 역사를 통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화와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사람 속에 이루시기에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된다.

인간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이해는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을 준행하려고 시도할수록 그 타락한 본성을 체험하게 된다. 인간의 고집과 탐심,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과 삶, 만사를 자기중심적으로 보고 판단하는 그 성향을 극복하는 일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성취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 안에서만 대안을 찾게 된다. 신앙생활 하는 개개인은 그런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피해 갈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가장 우선적인 사역을 그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되찾아야 할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내용을 필자의 책 “핵심성경 주제”에 기록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사셨지만, 자신의 만족을 구하지 않고, 항상 성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 사셨다(요 8:20). 표현하자면, “삶의 목적과 동기를 늘 하나님께 두고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타락한 인간은 항상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삶의 목적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았다. 우리가 본받고 회복해야 할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바,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좇아 살 때 회복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성자 예수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항상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았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6:57에 의하면, 그는 “항상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셨다. 그는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고, 성부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셨다. 광야에서 굶주림 속에서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그는 먼저 성부 하나님의 뜻을 찾음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마 4:4). 말하자면 삶의 자원과 근거로서 항상 성부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셨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통해 보여 주신다. 스스로를 의지하지 말고, 물질을 의지하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삶의 근거와 자원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 형상을 회복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간의 타락한 실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목회 사역하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지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을 맡고 있는가? 수년 전,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느 이민 목회자의 진지한 질문이 항상 가슴 아프게 회상된다: “목회자 여러분, 사람이 정말 변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떤 사연이 있어 그런 질문을 그 모임에서 물었을까? 이민 목회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그 속마음을 짐작할 것이다.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어떤 아픔의 사연 뒤에는 인간의 타락한 형상과 성품의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이런 인간의 참 모습, 성경이 가르치고, 교회 역사 속에서 신학자들이 들려주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의지하지 않고, 또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능력과 지혜를 의지해서 사람을 가르치고 양육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해가 전제되지 않을 때, 목회를 하는 분들이 격어야 할 마음의 고통을 얼마나 큰 것일까!

인간에 대한 성경서적, 신학적 이해의 중요성은 그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로 안내한다. 어떤 인간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기 원하는 인간을 찾으시고, 그런 인간을 불러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시고, 그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회복되도록 양육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아는 일은, 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 위에 가능할 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이 두 가지를 강조할 때, 첫째가 인간의 타락의 실상이요, 둘째가 그런 인간을 찾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아닌가?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아는 일은 사람의 실상, 곧, 그 타락의 실상을 올바로 아는 일과 맞물려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실상을 아는 일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전파되어야 하는 메시지와 연관을 갖는다. 값싼 기복주의, 성공주의가 유행하는 이 시대 교회의 강단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증거해야 할 메시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이 아닐까? 병든 사람이 고침 받지 못하면, 그의 외적 조건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적 문둥병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의 소유와 성공은 무엇을 의미할까? 오늘날 기복신앙의 허상을 깨트리고 강단에서 증거 되어야 할 메시지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라 믿는다.

이상의 여러 이유들은 우리가 인간, 엄밀하게는 인간의 의지에 대해 성서적, 신학적으로 올바른 이해를 갖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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