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건 목사(뉴욕연합신학교 조직신학교수)

조직신학의 여러 과목을 가르치면서, 가장 마음에 감동을 주는 주제는 성령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처럼, 성령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그냥 성령이라고 표현한다) 성령을 생각하면, 어느 가정 속 조용하고, 헌신적인 어머니가 떠 오른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안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오직 자녀들의 생명을 돌보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이미지가 말이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육신을 입고오신자체가 하나님의 한없는 겸손과 희생의 표현이었다. 죄의 유혹과, 굶주림과 목마름을 겪어야하는 연약함과, 고통과 죽음의 존재로 자신을 낮추시고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영(Spirit)이신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지만, 육으로 오신예수그리스도는 육신의 한계 속에서 사셔야했다. 그런 의미에서 성육신(Incarnation)사건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겸손과 희생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성령은 이 세상 속에서와 하나님의 백성들 속에 전혀 형체가 없는 존재로 임하신다. 인간의 오감으로 감각할 수 없는 존재로 임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 자신의 더할 수 없는 겸손의 표현, 자신을 낮추신 사건이 아닐까? 성자예수님은사람들이보고들을수있는육신을가진존재로임하셨고, 또한 부활 후에도 육을 가진 존재로 승천하셨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존재는 사람이 감각할 수 없으면서도, 항상 우리 가까이 존재하신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전혀 알 수 없는 분으로 우리 옆에 계신다는 것이다. 항상 옆에 계시면서도 사람들의 의식에서 멀리 계신 분이라는 점에서, 성령은 우리 가운데 한없이 낮은 존재로 임하신다. 우리 중 누가 자신의 존재를 몰라보는 사람들 속에 계속 머물기를 원할까?

자신은 그렇게 형체없이 존재하면서도, 사실 신앙생활, 또는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는 생활은 성령의 지원이 없이는 단연코 불가능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 실 때, 먼지(흙)로 지으시고 하나님의 생기(성령)를 불어넣어 주심으로 사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창2:7)은, 사람의 존재에 있어 성령이 차지하는 위치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즉, 사람에게서 성령이 떠나면, 곧 먼지와 흙의 가치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 짤막한 말씀은 사람의 존재와 삶에 있어서 성령의 가치를 분명히 드러낸다. 성령을 떠나 사는 삶이란, 그의 사는 사회적 지위와 가치가 어떠하든, 흙의 가치, 먼지의 가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무가치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성령의 능력의 역사는 에스겔 37장 에스골 골짜기 환상에서도 분명하게 증거 된다. 에스골 골짜기에 즐비한 해골들이 사람의 형체를 갖게 되고, 여호와의 군대로 세움을 받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생기” 곧 성령이었다(겔37:10). 골짜기에 쓰러져 있던 해골들이 “이스라엘족속”이었다는 말씀(겔 37:11)은 비록 하나님의 백성의 이름을 가졌어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떠나 살면, 해골처럼, 무가치하고 흉측한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구약이스라엘백성들의실패의역사에는그들을돕는성령의역사가제한되었다는점에서그이유를찾을수있다. 사람은 성령의 감화, 감동, 지원을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법을 깨달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리하여, 에스겔 36:26-27에서는 “새영(성령)”이 임하심으로 (하나님의)사람들이 “새 마음”을 얻고, 하나님의 율례를 “행(실천)하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우리는 다행히 오순절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모신자로, 성령의 감동과 지원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지난 수십 년 신앙생활, 목회생활을 하면서 갖는 소감은 이 성령의 지원과 능력이 아니고는 도무지 살 수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것이요, 하루하루 자신의 삶과 목회는 이 성령의 도움이 아니고는 도무지 소망이 없다는 감회를 갖게 된다. 오늘도 소리없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임하여주시고, 우리생각을 거룩한 말씀과 믿음의 삶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뜻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음으로 쉽지 않은 삶을 어렵지 않게 살고 있지 않은가!

삶의 현장, 목회의 현장 속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 보혜사 성령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하게 된다. 보혜사(Paraclete)는 Comforter(위로자), Counselor(모사), Helper(돕는 이), Advocate(변호인)로 번역되고 있다. 힘들고 외로운 현실 속에서 조용히 우리를 위로하심으로 그 삶과 사역을 감당케 하신다. 지혜가 모자라는 우리들에게 위로부터 오는 생각과 지혜를 주심으로 현실을 감당하게 하신다. 범사에 “돕는이”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존재와 삶을 지원해주시는 보혜사에 대한 생각에 이를때, 소망과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한없이 겸손하신 분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과 종들의 삶속에 함께하고, 동행하시면서, 그들을 붙들고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신다.

모세가 미디안광야에서 보았던 환상, 떨기나무가 불에 타면서 타지 않는 기이한 현상(출3:2)은 오늘날 성령의 능력 안에 살고 섬기는 삶의 한 모형이 아닌가? 우리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자칫 타고 재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신 성령의 능력 안에서 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푸르른 생명력을 보존할 수 있음은 오직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다니엘처럼 불가마에 들어가는 일은 없겠지만, 거친 현실 속에서 고난과 멸시, 핍박을 겪을 때, 소리없이 옆에 계셔서 우리를 돕는 성령의 지원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손상되지 않고, 푸르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성경의 약속이요, 또한 우리들의 경험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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