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생활인(가라지)들의 특징

†he 2nd Life Foundation 뉴욕퀸즈교회

Pastor Esther Soo-Gyung Kim

열왕기상 18:26-29, 36-40
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하매
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찌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40.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하나님 또는 자기가 만든 하나님에게 예배하는 자들의 비교

인생의 승리는 불이 내리느냐, 내리지 않느냐로 결정이 납니다. 본문에서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바알에게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드린 뒤에 엘리야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참 하나님을 모르면서 예배를 드리는 자들과 하나님을 아는 믿음과 성령충만한 예배자들의 자세를 분별하게 됩니다.

*종교생활인(가라지)들의 특징

(1) 성도처럼 헌금이나 물질을 잘 바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지만 교회에 나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수주일을 해야 복을 받는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서,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으면 마음이 찜찜하기 때문에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며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또 가족이 다니기 때문에 신앙은 없이 함께 나오는 사람도 있고, 자녀 교육이나 친교를 위해 나오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본문 26-29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과 희생은 참 신앙인들과 겉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26절을 보면 그들은 엘리야와 똑같이 번제단 위에 송아지를 바쳤습니다. 외견상 그들이 바치는 헌신은 진짜와 똑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더욱 열심을 다해서 제사를 드립니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굽이 갈라져서 깨끗한 성도같지만, 속은 새김질을 하지 않는 돼지와 같은 부정한 교인 즉 가라지들입니다.

(2) 성도보다 더 눈에 띄게 시간과 정열을 바친다.

이들의 두번째 특징은 시간과 정성을 다해서 헌신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몸에서 피가 흐를 때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희생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할 수 있는 대로 교회의 모든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며, 심지어 오랜 기간 타지에 가서도 인터넷을 통해 자기 교회의 예배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열심을 다해 보고 들으며 시간과 에너지를 헌신합니다.

본문에 보면 아침부터 정오까지 그리고 정오부터 저녁 소제를 드릴 때까지, 즉 아침, 점심, 저녁 쉬지 않고 기도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기도도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열성을 다해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어 피를 흘리는 희생을 하며 열심으로 온 몸을 다해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은 제단 주위에서(교회를 중심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헌신합니다. 오히려 진짜 성도보다 더 열심히 하기 때문에 그들의 교회를 섬기는 모습만으로는 알곡인지 가라지인지 가려내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그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나 목사님을 섬기는 것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령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24시간 기도하는 '기도의 집'이나 해외로 오랜 기간 떠난 이들을 잡아두려고 어디에 가서든 반드시 인터넷으로 자기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라고 하는 교회들이 바로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도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직장에도 나가지 않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도 않고 아이를 데리고 기도의 집에 가서 하루종일 기도만 한다면, 그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생활일까요?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아침부터 정오까지, 그리고 정오부터 저녁까지 쉬지않고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진짜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교회의 중직자들이 열심히 기도하지 않는 모습은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서 그들을 비판하는 이들을 보면, 별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기도를 오래 하지 못하므로 "기도를 많이 해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다"라며 오래 기도하는 이들을 비판합니다. 다른 이들을 비판하느라 그것을 연구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그들을 비판하는데 시간을 투자하느라 기도할 시간도 없습니다. 성경을 보고 연구하더라도 남을 비판하기 위해 보는 것이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보지 않습니다. 성경의 맛이 꿀보다 더 달아서 보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물론 그들의 노력으로 많은 양떼가 이단에 빠지지 않게 되는 좋은 결과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의의 병기와 죄의 병기 모두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2-13)

(3) 성령 없이 열심이다.(진리에 관심이 없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성령의 불이 이들에게 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만든 우상 하나님께 예배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자기들이 만든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며 헌신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져야 하는데, 하나님께는 관심도 없고 자기가 원하고 자기를 만족할만한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자기를 희생시키면서 그렇게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우상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를 들을 수도 응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세벨의 영에 미혹된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가족들과 믿음이 없거나 약한 교인들을 거짓된 생활로 끌어들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선포하는 주의 종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자기가 컨트롤할 수 있는 가족과 교인들을 사용합니다. 자신은 일선에 나서지 않고 바알의 제사장들을 앞세워 엘리야와 싸우게 하듯,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듯이 이세벨의 영에 사로잡힌 이들은, 앞에서는 왕비처럼 고고한 듯 온갖 예의를 지키며 꾸미고 있지만, 뒤에서는 가족들과 교인들에게 거짓말을 넣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엘리야와 같은 주의 종을 죽이는 데 앞장서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에서 열심히 헌신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분별력이 없는 이들에게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므로 성령이나 진리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최선을 다해 선한 모습으로 교회에서 온갖 봉사를 열심히 합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3)

(4) 뜨거운 예배가 아니라 흥분되고 시끄러운 예배를 드린다.

오늘날 우리의 찬양예배를 우리는 조심스럽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수많은 찬양예배가 무척 뜨거운 것 같지만, 사실상 850명의 우상 숭배자들이 드린 제사처럼 시끄럽기만 한 예배입니다. 뜨거운 것이 아니라 시끄러운 예배입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피를 흘리며 제사를 드렸지만, 하늘에는 구름 한점도 없고 불이 내릴만한 징조도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히 악기를 연주하며 큰 소리로 찬양하는 그 찬양속에 왜 성령께서 임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들의 찬양과 예배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육신의 정욕, 안목(눈)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해서 어느 정도만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달란트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때리고 부수는 록뮤직과 같은 굉음을 자아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의 목소리보다 수단으로 사용되는 악기소리를 더 크게 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목소리를 뭍어버리는데 최선을 다합니다.

예배는 희생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 즉 믿음이 없는 것처럼, 희생이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 즉 예배가 아닙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이 예배이지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기도이며 자기의 뜻을 이루어달라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이 없이 자기의 소리만을 더욱 크게 부각시키는 그러한 악기연주자들과 찬양인도자들의 찬양과 예배는 스스로 바벨탑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내려오시지만, 이는 그들의 예배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위해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흩어버리기 위하여 친히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셨다며 기뻐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내려오셔서 그들 가운데에 임재하셨지만, 그들을 흩어버리기 위해서 내려오신 것이지 그들과 함께하기 위하여 내려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창 11:7-8)

(5) 예배 후의 언행이 부정적이다.(육체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는 예배를 드린 후에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보면서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게 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배 전에는 그 사람이 성도인지 가라지인지 젖먹이 상태인지 걸음마 상태인지 장성한 신앙인인지 잘 모릅니다. 시험을 치르기 전에는 학생들의 실력을 파악할 수 없지만 시험을 치른 후에 학생들의 실력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배 전에는 가인의 마음을 알 수 없었지만, 예배 후에 그는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 지를 예배 후에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 후에 그 사람의 언행을 보면 그가 가인의 예배를 드렸는지 또는 아벨의 예배를 드렸는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엘리야도 제사를 지낸 후에 바알의 제사장들을 모두 죽였지만,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제대로 예배를 드렸다면, 예배 후에 교회를 어지럽히고 부정적인 언행을 하는 이들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치리하는 것이 교회를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셔서 각종 제사를 위하여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신 것과 같은 것이며 느헤미야가 성전에 은밀히 들어와있는 세상적인 것을 성전 밖으로 내어 던진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육체의 열매나 부정적인 언행이 아니며 영적인 열매이며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기 위한 사역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며 하나님을 뵙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짜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본다고 해서 모두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았다고 해서 자랑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의 음성과 마귀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만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도 우리에게 생각을 넣어주며 우리를 미혹하기 위하여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어느날 "성령께서 나에게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성경을 많이 알지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 보다는 차라리 성경을 모르고 사는 게 낫다고 그렇게 매일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 "성경에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했기 때문에 엄마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목사님을 핍박할지라도 엄마의 말에 순종하라고 하셨어. 엄마는 나를 낳아 키워준 이세상에서 가장 나를 사랑하는 분이니까"라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성령께서 하신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가 속삭인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속에서 들리는 음성이나 생각이 성령의 음성인지 마귀의 음성인지를 알기 위하여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 하며 성경과 함께 쉬지말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분별력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성경과 다른 내용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혹의 영을 물리쳐야만 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6) 성공에 목숨을 건다.

당신은 인생에서의 승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많은 이들이 성공에 목숨을 겁니다. 무언가 꼭 성공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성공한 것을 보여주려고 이를 악물고 성공하려고 갖은 애를 씁니다. 그리고 성공 후에는 사람들에게 성공사례를 말해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노력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를 자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그러나 자기를 자랑할 마음이 없는 사람은 성공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연단의 과정이므로 그 과정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만 알고 있으면 결코 사람들에게 나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만 자랑하기 때문에 성공에 목숨을 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알고 칭찬할까봐 자랑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알게 되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간증을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이 세상은 성공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에 예배에까지 "성공적인 예배"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인생에서의 승리는 성공이나 실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므로 성령의 불이 임하면 게임은 끝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불이 임하면 살게되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몸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종교적 희생을 하더라도 불이 임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엘리야와 850명의 우상숭배자와의 대결에서 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서 예배를 드린 850명에게는 불이 내리지 않았지만,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에게는 불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에게 불이 내리자 모든 게임은 끝이 나고 불을 받은 엘리야만 살아남고 불을 받지못한 850명은 승리한 엘리야의 명령에 의하여 모두 잡혀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생의 승리는 하늘로부터 불이 내리느냐로 결정된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승리의 기준은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승리는 숫자가 많다고 이기는 것이 아니며, 권력이나 최신형 무기가 있다고 이기는 것도 아니며, 거짓말로 이간질을 시키고 미혹시켜 상대방을 죽이려고 달려들지라도 그리고 죽을 힘을 다하여 희생할지라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승리는 성령의 불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49절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땅에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불에 대해서 "성령의 불이다" 또는 "심판의 불이다"라며 의견이 나뉘어 집니다.   

그런데 제가 보는 견해는 둘 다 맞습니다. 성령의 불이 중생한 사람에게는 영생을 주지만, 거듭나지 못한 자에게는 그 불이 견딜 수 없는 심판의 불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되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불을 받기 위하여 구하고 찾고 두르려야만 합니다. 언제까지요? 성령의 불을 받을 때까지입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9-13)

불로 응답하시며 언약을 세우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실 때에 가시떨기 나무에서 불처럼 나타나셨으며 기드온을 부르실 때에도 반석에서 불이 나와서 그가 바친 예물을 모두 태우셨습니다. 또 레위기 9장24절을 보면,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르니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를 지르며 엎드렸더라"라며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때에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을 하면서 제사를 드릴 때에 하늘로부터 불이 내린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 체험이나 부르심이 없이 신학교에 가거나 사역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생활을 착실히 하거나 교회 생활을 한지 오래된 사람이면 부르심이나 거듭남 또는 성령 체험의 유무와 상관없이 서리집사로 임명하며 교회내의 중책을 맡기기도 하므로 엘리야 시대처럼 바알(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머뭇거리며 주의 신실한 종들을 죽이려고 달려들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는 약속을 할 때에 동물을 죽여서 각을 떠서 그것을 양쪽에 놓고 피가 흐르는 그 사이를 약속한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갔습니다.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 동물처럼 죽을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아브라함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동물의 각을 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브라함과 함께 그 사이를 지나가지 않으시고 횃불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그 사이를 홀로 지나가셨습니다.

불로서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보여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그 사이를 아브라함과 함께 지나가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아브라함은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죽일 마음이 없으시므로 만약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아브라함 대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홀로 지나가시며 그분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택한 이들을 죽이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죽으려고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6)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그 공의를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죽여서 공의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죽어서 공의를 이루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신 것이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하면 약속을 한 쌍방이 함께 지켜야 하는데, 인간은 약속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인간이 죽어야 하는데, 그 죽어야할 우리 대신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약속을 결코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

우리는 얼마나 약속을 안 지키며 살아갑니까? 가장 쉬운 예가 결혼식때 신랑 신부가 했던 약속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검은 머리가 팥뿌리가 될 때까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 존경하며 사랑하겠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결혼해서 신혼여행을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싸움이 시작되어서 평생 원수처럼 등을 돌리며 살아가는 부부들, 그것도 모자라서 별거나 이혼을 하고 (그것도 한두번도 아니고) 자식들을 이집 저집으로 고아처럼 떠돌아다니게 하며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지게 하는 부부가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안에서는 어떻습니까? 세례를 받을 때나 임직식을 할 때에, 주안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교회법에 따라 충성을 다하겠다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결심하며 선서까지 해놓고 자신을 죽이지 못하여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예수 그리스도를 시간이 날 때마다 십자가에 못박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한 결과

불이 임한다는 것은 기도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기도할 때에 어떤 자세로 기도했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엘리야가 어떻게 기도해서 불이 내렸습니까? 엘리야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기도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우리의 성공을 위하여 애를 쓰며 기도합니다. 그래서 불이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불을 내려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을 달라고 구하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부모가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부모가 어디있느냐, 하물며 하나님께서 너희가 성령을 달라고 하는데 안 주시겠느냐며 성령을 받을 때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대접을 받고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대접을 받고 싶으면, 하나님을 진실로 하나님 답게 먼저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즉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간구하면 그분이 그것을 듣고 응답하실 분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그 부분부터 걸려 넘어집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지 말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라고 주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권면하시며 연단시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었던 그 자리를 주께 내어드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므로 진짜 주님에게는 자기의 뜻을 이루어달라며 주님을 자기의 뜻을 행하는 하인처럼 다루며 기도합니다. 자기의 뜻을 이루어주지 않으면 사랑이 없는 하나님이라고 원망합니다. 이처럼 주님을 진정한 주인님으로 모시는데 실패하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인 그분을 믿는 데까지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이 미래에 대한 필요없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인정하며 그분을 믿는 사람은, 엘리야처럼 목숨을 걸고 자기 자신을 제단 위에 바치고 "저에게 성령의 불을 내려주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본문 36-37절에 나온대로 엘리야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

이 기도문을 보며 엘리야의 기도로 생각하지 말고 우리도 엘리야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그리고 나 자신이 정말로 주님의 종인 것과 우리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그 모든 일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임을 '오늘'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6절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단어는 '오늘날'입니다. 이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라는 말입니다. '내일' 또는 '1년 뒤와 같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그리고 '저기'나 '거기'가 아니라 "여기"입니다. "지금, 내가 기도하는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주님! 불을 내려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불을 내려주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인생의 승리로 이끄는 것이지 다른 것이 우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는 불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에 달려있다.

우리는 불을 받아야 살고, 불을 받지 않으면 죽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던 10명의 처녀 중에서 5명은 성령의 불을 받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갔고 5명은 성령의 불을 받지 못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생이 달린 문제로 영생이냐, 영원한 죽음이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시간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성령의 불을 받지 않으면 저는 죽습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살려주옵소서. 엘리야를 살려주셨던 주님, 엘리야에게 내려주셨던 그 불을 저에게도 내려주옵소서"라며 성령의 불이 내릴 때까지 온 몸과 정성을 다하여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날 갈멜산에서 기도했던 엘리야는 엘리야 자신이 죽느냐, 850명이 죽느냐 하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사를 건 기도를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성령의 불을 받기 위하여 생사를 건 기도를 "오늘" "지금 당장" "여기에서" "여러분이 서있는 그곳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생사를 건 엘리야에게 불이 내린 것처럼 생사를 건 사람에게 불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알의 선지자들도 생사를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우상 하나님에게 간구했기 때문에 불이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생사를 걸고 여러분이 만든 우상 하나님에게 간절히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동안 모르고 우상 하나님을 만들어서 여러분 자신의 뜻을 구하여 살아온 것을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가운데 상한 심령으로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창조주이시며 온 우주의 주관자이시며 재판관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긍휼하심을 바라보며 간절히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당신 앞에 나와 간구하는 심령이 가난한 이들을 멸시치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저희 기도를 멸시치 아니하셨도다"(시 102: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

지금 무얼 망설이며 머뭇거리십니까? 진노의 불을 받아 평생을 지옥과 같은 환난 속에서 살아가지 말고 성령의 불을 받아 천국을 이루어가며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오늘, 그리고 당신이 있는 지금 그곳에서 생사를 건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불이 여러분에게 강하게 임하시므로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끝까지 하나님의 증인이 되어 증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4, 5, 8).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