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회자에게는 신실한 조력자로 성도에게는 든든한 어머니로

모세는 그의 충성됨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다. 모세의 충성됨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민 12:7). 모세는 부르심을 받은 후 평생을 하나님의 집을 위해 충성을 다한 것이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보냄을 받고 일평생 충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전도사로 파송되어 60년 가까이 한 교회를 섬긴 충성된 일꾼이 있다.

인천시 부평구 부평동 주택가 밀집 지역 한 가운데, 지역을 넉넉히 품을 만큼의 크고 아름다운 교회가 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부평신촌교회(담임 정찬선 목사)가 그 교회이다. 부평신촌교회는 1956년 15평의 천막에서 시작하여 60년이 지난 지금은 대지면적 530평, 건물 연 면적만 1000평이 넘는 교회가 되었다. 물론 60년의 교회 역사 속에 숱한 어려움도 있었지만, 정찬선 목사의 부임 이후 올해 6월 성전봉헌 예배를 드리고 지금은 은혜 안에서 든든히 부흥하는 교회가 되었다.

부평신촌교회 60년의 교회의 역사와 함께 오롯이 한 길을 걸어오며, ‘부평신촌교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여자 전도사가 있다. 전복순 명예전도사(89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부평신촌교회의 역사가 전복순 명예전도사의 사역과 맞물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복순 명예전도사는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된 삶을 살았다.

전복순 전도사는 192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일제 때 위안부 징집을 피하기 위해 17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전복순 전도사는 해방 후, 1952년 퇴각하는 인민군에 의해 학도병 출신의 남편과 사별하게 된다. 24살의 아직 꽃다운 나이에 5살 아들(천기홍 장로)을 키워야 한 것이다.

그 후 이듬해 먼저 예수를 믿고 있었던 시숙모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그 교회가 화북성결교회(경북 상주 화북면)이다. 당시 화북성결교회는 신효식 목사가 담임으로 있었다. 신효식 목사는 성령의 은사가 특별하셨으며, 기도를 많이 시켰던 분이었다. 교회에 다니기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월에 상주성결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는데, 홀로 된지 얼마 안 된 며느리가 정월에 일주일간 부흥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쉬운 결단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아버지 앞에서 부흥회에 참석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밝히고 부흥회에 참석하게 된다.

그렇게 부흥회에 참석하던 중 기도실에서 잠을 자는데 신령한 꿈을 꾸게 된다. 큰 밭에 배추 모종이 심겨진 곳에 서 있는데, 자세히 보니 배추 모종들이 시들시들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물주전자를 주면서 시들시들한 배추들에 물을 주라고 해서 물을 주다가 꿈에서 깨게 된다. 범상치 않은 꿈이라 여기고 당시 부흥회를 인도하던 이성봉 목사님께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목사님이 놀라면서 “영혼을 살리는 주의 종이 되어야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 일이 전복순 전도사가 신학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후 전복순 전도사는 대전신학교에 가서 졸업을 하고 다시 서울신대 전수과에 들어갔다. 서울신대 전수과를 졸업반이던 1960년 12월 10일 부평신촌교회에 전도사로 부임을 하고 1961년 졸업을 하게 된다. 당시 부평신촌교회는 개척한지 3년 정도 된 교회로 이만신 목사(기성 증경 총회장, 한기총 증경 대표회장)가 목회를 하고 있었다. 전복순 전도사는 산소통으로 된 새벽종을 치며 이만신 목사에게 교회 일을 배우며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이만신 목사는 갓 신학교를 졸업한 전복순 전도사에게 교회 일을 전반을 가르쳐 주었다.

1960년대 전복순 전도사와 주일학교 아이들

어느 금요일 인근 감리교회에 부흥회가 열렸다. 오후에 구역회를 약속하고 잠시 부흥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강사가 “방언 못하는 사람 손들라.” 해서 손을 들었더니 방언하는 사람들이 전복순 전도사를 빙둘러 합심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방언이 터지지 않고 시간이 지나 얼마 후 구역회 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복순 전도사는 속으로 ‘여기서 방언 주시는 하나님이 집에 가면 안주시겠나?’ 생각을 가지고 구역예배를 드리러 갔다. 그날 저녁이 되었다. 전복순 전도사는 낮 집회의 방언 은사를 사모하며 교회 기도실에 들어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날 방언을 받게 되었다.

1970년대 교역자와 당회원 사진 (가운데 이만신 담임목사, 우측에서 두번째 전복순 전도사)

전복순 전도사가 기억하는 이만신 목사는 그야말로 열정적인 목사였다. 주일날 이른 아침이 되면 온 동네 가가호호를 돌아다니며 “주일이니 어서 교회 나오시라” 하며 심방을 하였고, 그 뒤를 따라 전복순 전도사가 성도들을 챙겨 교회에 나오게 하였다.

1974년 안광성 목사가 2대 담임목사로 취임하게 되었다. 안광성 목사는 시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또한 금요철야 때 마다 중간 중간 쉬는 시간마다 한문으로 성도들을 재미있게 해 주었다. 특히 안광성 목사는 설교의 은사가 있었는데, 새로 등록하는 신자들 대부분이 여기저기 돌아다닌 후 결국 안광성 목사 설교에 은혜를 받고 정착하는 일이 많아 교회는 날로 부흥을 하였다.

새성전 건축 전 이전 교회에서

이후 1992년 우창준 목사가 3대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였고 전복순 전도사는 이듬해에 35년 전도사 사역을 마감하고 은퇴를 하게 된다. 은퇴 후 성락원(기성 전국은퇴여교역자 안식처)의 원장으로 섬기게 된다. 하지만 교회가 건축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는 중에 성도들의 요청으로 5년 만에 전도사로 재부임을 한다.

교회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전복순 전도사의 역할은 지대했다. 흩어진 각 구역과 여선교회를 재정비하였다. 이후 1998년 3월 임헌평 목사가 4대 목사로 부임하고 담임목사를 도와 교회를 정상화하는데 노력을 다했다.

전복순 전도사의 사역 철학은 항상 담임목사 중심이었다. 물론 전복순 전도사는 전도사 사역을 하면서도 담임목사에게 할 말은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성도들 앞에서는 항상 담임목사의 대변인이자 성도들과의 중재자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담임목사의 사역을 돕고 있는 부교역자나 다른 전도사들에게 항상 “우리들은 담임목사와 같이 살고 같이 죽을 각오로 사역을 해야 한다.” 가르쳤으며, 담임목사의 허물을 잘 덮어주는 일이 부교역자와 전도사의 최고의 사역임을 강조했다.

전복순 전도사의 충성은 자연스러운 신앙의 유산이 되었다. 철저하고 부지런한 성품으로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엄하게 꾸짖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였다. 항상 그의 손에는 성도들의 이름과 심방기록들이 적힌 수첩이 들려있었다. 또한 25년간 강단 꽃꽂이를 맡아 재능을 키워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전복순 전도사를 어머니 따르듯 따르고 있다.

천기홍 장로(부평신촌교회 수석장로, 루디아기독교백화점 대표)와 함께

어머니 전복순 전도사의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아 아들 천기홍 장로(부평신촌성결교회 수석장로, 루디아 기독교백화점 대표)와 며느리 김영혜 권사는 50여 년간 교회의 신실한 일꾼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손자 천성하 목사(인천 단비교회 담임)가 하나님의 집을 위한 충성의 대를 잇고 있다.

전복순 명예전도사와 아들 천기홍 장로 가족

전복순 전도사의 교회 사랑과 충성은 교단에서도 인정을 받았다. 기성 인천지방회 여교역자 회장, 전국여교역자회장, 전국은퇴여교역자(성은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지금도 교단 내에 각종 행사에 초대되는 성결교단 최고령 명예전도사이다.

한 교회를 평생 섬기며 역대 담임목사들의 사역에 귀중한 마중물처럼 쓰여 진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인가? 전복순 명예전도사의 충성이 파란 가을 하늘에 우뚝 솟은 십자가 탑처럼 굳세고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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