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 목사의 교회 이야기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국제신학교학장. 본월드미션(재)이사. 새길과 새일(사)부이사장. 본국제기독대안학교이사장. 벧엘의료재단이사. 본헤럴드 발행인 저서: 충성된일꾼되어가기. 주기도문, 40일영적순례. 등.

"내 인생의 첫 번째 자리는 오직 하나님"

인생에는 중요한 것들이 참으로 많다. 누구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다. 돈, 공부, 결혼, 취직, 가정, 사업, 인생의 꿈은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지만 하나님보다 앞서서는 안된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우연히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목회를 한다면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가족도, 교회도, 하나님도, 공부도 다 무시할 수 없는 소중한 가치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인생의 첫 번째 자리에 둘 수 는 없는 일이다. 우선순위를 선택해야 한다. 우선순위가 분명할 때 삶의 자리가 질서 정연하게 안정된다.

단독목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치에 대한 물음에 나름대로 원칙을 정하고 살았던 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였다. 첫째는 하나님이고, 둘째는 교회이고, 셋째는 가정이고, 넷째는 나의 꿈이었다. 이런 순서로 가치를 정하게 되었다. "하나님 보다 앞선 가치는 절대적으로 없다." 얼마나 명쾌한 명제인가!

사역의 현장에서 늘 가치대로 행동했고, 결단이 필요할 경우에 고민하거나 우왕좌왕하지 않았다. 교회를 개척하고, 자비량으로 목회를 하는 것이 나에게는 그리 어려운 삶의 숙제가 아니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다. 개척교회를 하다 보니 항상 교회운영비와 건축비를 부부가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주셨다. 그것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님이 우리 부부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셨고, 모든 것을 다 드릴 수 있는 기쁨으로 헌신할 수 있는 교회를 허락하신 것 그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했다. 아이들도 학원 공부 없이 스스로 공부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기에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던 것 같다. 학원을 보내달라고 요청도 하지 않고, 좋은 옷이나 신발을 사달라고 심통을 부린 적도 없고, 왜 우리는 그 흔한 가족 여행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지도 않았다. 목회자 자녀의 삶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 않고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생이 되었다.

예를 들어, 물질이 생겼다고 가정해보자. 물질이 생겼을 경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가치를 알 수 있다. 가치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자리가 하나님이다 보니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을 늘 찾아서 하게 된다. 하나님을 삶의 첫 번째 자리에 둘 때, 우리는 선택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다. 또한 삶의 질서가 세워진다. 무질서란 삶의 우선순위인 원칙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삶의 첫 번째 가치가 주님이시기에 주님께 드리는 것이 행복하다. 주님께 드린다는 것은 너무도 행복하고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드림의 깊이도 , 헌신과 순종의 질도 양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씀이 정말로 명언이다. 주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셨다. 그 생명의 빚을 이어가는 것이 제자의 삶일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없다. 변명이 없다. 그저 감사함으로 따라갈 뿐이다. 이것이 제자이다. 제자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부르심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다. 나는 왜, 이렇게 험지에서 사역을 해야 하는지, 응달에서 고생하며 살아가야하는지, 내 목회 인생은 왜 이렇게 고달픈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 이유를 묻지 마라. 음지의 현장으로 나를 부르신 주님의 뜻을 모르더라도, 그곳에서 바른 헌신과 올바른 순종으로 드릴뿐이다. 이것이 제자가 걸어가야 할 성경적인 가치관이며, 목회자가 있어야할 이유이다.

사람을 사랑하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은 축복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목회자의 길이다. 목회란 무엇인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긍휼함으로 보았다. 긍휼함이란 원어로 보면 내장을 말한다. 희랍인들은 정서의 깊이, 감정의 깊이를 내장이라고 보았다.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일까? 긍휼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불쌍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긍휼한 감정으로 대하는 것이 목회자의 삶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앉은뱅이, 중풍병자, 배고픔에 지친 무리들, 한센병 환자, 세리와 창녀들을 바라보실 때 긍휼한 마음으로 보셨다. 여기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고, 치료와 회복이 일어났다.

교회를 개척할 때, 성도들이 카드빚으로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너무도 가난하고 힘이 없고 연약하여 스스로 힘든 세상을 살아갈 여유와 능력이 전혀 없었다. 처음보고, 그들의 카드빚을 갚아주었다. 그리고 “내가 당신들의 빚을 갚아주는 것은 빚으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마음에 상처를 가지고 살아갈까봐 갚아드리는 것입니다. 나도 돈이 없습니다. 은행에서 2000만원을 빌린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빚을 갚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잘 믿으세요. 그리고 저와 함께 교회를 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함께 계시고, 떠나시는 것도 자유롭게 선택하세요.” IMF때 성도들의 카드빚을 대신 갚아주면서 개척을 하게 되었다.

왜, 가난한 전도사가 돈이 있어도 힘든데, 은행에서 대출받아 성도들의 빚을 갚아주었을까? 그리고 비싼 은행이자를 감당하는 것은 너무도 버거운 일이었다.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했을까? 연약한 성도들이 불쌍했기 때문이다. 젊은 청년들이 너무도 연약해보였기 때문이다. 나와 아내는 아무것도 없어도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강인했다. 어떤 어려움도 뚫고 나갈 수 있는 사랑의 힘이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다.

성도를 사랑하면, 교회를 사랑하면, 자신의 몸처럼 교회를 사랑하면, 사랑하는 만큼, 사랑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 카드빚을 지었는지, 왜, 신용불량자가 되었는지, 왜 그렇게 삶을 살았는지 묻지 않는다. 계획적인 삶을 살았다면,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이란 때로는 묻지 않는 것이다. 그냥 지켜봐주고, 무조건 사랑해주고, 이해해주고, 품어주는 것이다.

목회의 첫 출발을 이렇게 시작했다. 하나님이 나에게 연약한 공동체를 맡겨주셨다. 하나님이 맡겨주셨다는 것은 우리 공동체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하고, 그 십자가의 짐을 가장 잘 지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에 나에게 양을 맡겨주신 것이다. 목사는 양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목사에게 건물을 짊어지고 가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았다. 목사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교회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라는 것은 영적인 문제만 책임만 지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모든 것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이기에 말없이 가슴으로 삼키고 마는 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할 말을 다하지 않는다. 그냥 참는다. 그리고 묵묵히 옆에서 든든하게 마지막 힘을 다해 지켜준다.

아버지는 자녀의 영적인 문제, 육적인 문제, 정서적인 문제, 관계적인 문제등 종합적으로 자녀들의 문제들을 살피고 함께 대화하고 함께 풀어가는 것이다.

요즈음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란, 말씀만 충실하게 전하는 것이라고만 한다. 성도들의 문제나 교회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답은 아니다. 세상적인 지혜가 될 수는 있지만, 십자가의 법칙에는 미치지 못하는 답이다. 사람을 사랑하라 이것이 영적 리더의 일이며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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