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선 목사, 고백과문답 출판사 대표

요즈음 한국의 기독교 상황은 급속도로 불신앙의 길로 향하는 것 같다. 특별히 그처럼 불신앙의 길로 가는 자가 성도들이나 다른 직분자들이 아니라 목회자인 목사들이라는 점이야말로 한국의 기독교 상황을 급속도로 암전(blackout)시키는 형국이다. 어찌 보면 목사들부터 돈을 좋아하고, 목사들부터 거짓말을 자주 하는 것을 도처에서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편이 되니 당연히 대두되는 것이 목사의 제정이 과연 성경에 있는 것인지? 더불어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제들에게서 다시 성도들에게로 돌려준 것이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견해에 따라, 성경은 신자 개인이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서 신앙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히 찾아 누릴 수가 있다고 하는 주장이 심상찮게 제기되곤 한다. 더구나 그에 더 나아가서 성경의 교리를 이해하고 터득하고 것조차도 신자들 스스로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확산되기도 한다.

그런데 얼핏 장로교회의 신앙의 표준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보면 그 사실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성경에 관해 다루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하 WCF) 제1장 4항은, “성경의 권위는 어떤 사람이나 교회의 증거에 의존하지 않고 진리 자체이시자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하여 그 사실을 언급하는 듯 보인다. 또한 5항에서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적 권위를 지닌 오류가 없는 진리임을 우리가 전적으로 납득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증언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고 하여 더욱 그 사실을 입증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또 WCF은 제1장 7항에서 “성경은 그 자체로 모든 구절이 똑같이 명백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명백하게 이해되지도 않는다.”고 하면서도, “학식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무식한 사람도 평범한 수단을 적절히 사용함으로서 이 내용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즉 성경은 이해하기 쉬운 것만은 아니지만, 또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핏 혼란스러운 모순처럼 보이는 WCF 제1장 7항의 두 논지(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명백하게 이해되지 않음과 무식한 사람도 이 내용들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이를 수 있음)는 필연적으로 교회의 일반적인 직원(ordinary officer)의 필요로 이끈다. 즉 평범한 수단(the ordinary means)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것으로서 평범한 것이 아니라, 그 사역(works)에 있어서의 평범함(ordinary)인 것이다.

무엇보다 WCF 제1장 6항은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교회정치에 관하여 인간의 활동이나 사회에 공통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상황들이 있으며, 그 상황들은 언제나 준수되어야 하는 말씀의 일반적인 법칙들을 기준으로 하여, 자연의 빛과 그리스도인의 주의분별(prudence)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고 하여, 통상적인 사고력의 요구를 전제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신적 권위를 지닌 오류가 없는 진리임을 우리가 전적으로 납득하고 확신하게”(WCF 제1장 5항) 되도록 “우리의 마음속에서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과 더불어 증언하시는 성령의 내적 사역”이란,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WCF 제1장 1항) 계시하시던 것을 따르는 특별하고도 비상적(일시적)인 사역이 아니라, “자연의 빛”(lumen naturale)의 맥락이라 할 수 있는 일반적이고도 통상적인 사역과 직무에 수반하는 은혜의 성격이다. 즉 성령의 내적 사역이란 이제 ‘계시’의 사역이 아니라 ‘조명’의 사역인 것이다. 그리고 그 조명은 신자들의 마음에 내적으로 비취는 것임과 아울러 일반적이고도 통상적인 사역자(pastor)의 사역을 통해 비추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구약시대건 신약시대건,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Holy Scripture)은 언제나 홀로 펼쳐지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고, 오히려 사역자들(선지자, 제사장, 왕)들의 손에 들리고, 그 후로 백성들에게 널리 선포되고 반포되는 역사 가운데서 현대의 목회자들에게로 이어졌다. 그런즉 ‘목사의 제정이 과연 성경에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성경의 구체적 내용과 역사에 대한 지식의 부족에 스스로 만족하는 가운데서나 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아울러 장로라 불리는 직분과 관련한 성경의 무수한 본문들이 목사와 관련한 소명의 근거를 명확히 제시한다. 그런즉 돈을 좋아하고, 거짓말을 자주 하는 목사들이 도처에 넘쳐나는 시대인 오늘날이야말로, 참된 말씀의 사역자인 목사가 교회에 절실히 요구되며 필요한 것이다.

더군다나 이미 프랑스 신앙고백은 신자들의 어머니인 교회에 필요한 목사들에 대해 명백히 고백하고 있으니, 제25조에서 “교회에 필요한 목사”(pastor necessary to the church)라는 제목으로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 동참했으므로, 그리스도의 권위로 세워진 교회의 질서는 신성하게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 없이 교회는 존속할 수 없다(the church cannot subsist unless there are pastors)”고 기록했다. 즉 목사가 있는 곳이 교회인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있는 곳에 반드시 목사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으로 프랑스 신앙고백 제25조는 계속 고백하기를 “목사의 직임은 무리를 지도하는 것(치리)으로, 정식으로 청빙되어서 그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할 때 우리는 마땅히 그를 명예롭게 대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즉 신자들의 어머니인 참된 교회의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에 따라 충실하게 그 직책을 수행하는 ‘목사’(shepherds)가 절실히 필요하며 요구되는 것이다.

교직(목사직)은 왜 동등한가?

한국의 개신교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개혁되지 않은 개신교의 원리 가운데에는 ‘교직(목사직)’의 동등성에 대한 이해가 있다. 간단히 말해서 ‘목사 위에 목사 없다’는 것으로서, 로마가톨릭의 수직적 직제 개념을 전혀 부인하는 개신교의 독특한 개혁된 내용이 바로 교직의 동등성의 원리(수평적 직제 개념)인 것이다.

바로 그러한 원리 가운데서 볼 때에 현제 한국의 개신교회, 그 가운데서도 장로교회들에 남발된 각종 목사직(담임목사, 수석 부목사, 부목사, 교육목사, 전도목사, 음악목사, 원로목사, 공로목사 등)은 오직 ‘목사(a pastor or minister)’로만 통일하여 호칭하는 것이 바른 개신교 직제의 실행이라 하겠다.

한편 수평적 직제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개신교의 교직의 동등성은 교회 안에서의 기타 직분들, 예컨대 ‘장로(a presbyter or elder)’와 ‘집사(deacon)’의 직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따라서 개신교의 직제개념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직분들이 각 직능상의 구별이 있을 뿐 위치나 서열상의 구분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수평적 직제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교직(특별히 목사직)의 동등성 개념은 기본적으로 지교회의 독립성 개념의 근거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즉 장로교회들에 있어서 각 지교회들은 로마가톨릭의 ‘주교구(diocese)’와 같은 개념 하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지교회들이 분명한 독립성 가운데서 존립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목사 위에 목사가 없듯이 교회 위에 교회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현대의 대형교회들이 자기 교회의 이름을 이어받은 지교회를 형성하는 것은 전혀 합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완전하게 독립된 교회로서의 지교회로 설립되어야 하는 것이 장로교회의 교회형성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원리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몇몇 대형교회들을 중심으로 지역별 교구들을 조직해 두고 있는데, 이것은 지역교회로서의 장로교회의 조직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심각한 폐단이다. 단언컨대 지교회를 그처럼 조직하여 운영하는 것은, 로마가톨릭의 주교제도를 답습하는 것이거나 심지어 교황제의 수직적 직분제도를 차용하는 반(反)종교개혁에 해당하는 심각한 악습(惡習)이다.

아울러 장로교회들은 한동안 필라델피아 제1장로교회, 필라델피아 제2장로교회 등의 명칭을 썼었는데, 그러한 명칭은 그 지역 안에 있는 첫 번째 조직교회 혹은 두 번째 조직교회라는 의미이다. 즉 단일한 지역 내에 또 다른 지교회가 세워질지라도, 그 교회는 또 하나의 장로교회로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한 장로교단(혹은 한 장로교회) 안의 지교회(local church)라는 의미로서 장로교회의 통일성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장로교회들은 지교회가 기본적으로 각각 독립적이지만, 회중주의(Congregationalism)의 경우와 같이 완전하게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한 장로교신학과 정치원리 가운데서 통일되며 연합하는 성격을 또한 포함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므로 목사들 또한 각각 수평적으로 사역을 수행하더라도, 신학과 정치에 있어서는 장로교단의 신학과 정치(노회정치) 가운데 하나로 연합되어 있는 것인데, 목사 안수식 때에 하는 신앙고백(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서약에는 바로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결국 장로교회에서 목사는 모두 동등하게 목사로서의 직임을 수행하는 동등한 직제이며, 그런 원리에 따라 지교회를 관할하는 또 다른 지교회(보통 모교회라 불리는)가 있을 수 없고 동등한 직임을 수행하는 목사와 장로들로 구성된 독립된 ‘당회(堂會)’에 의해 독립적으로 형성되어 운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처럼 독립된 지교회의 당회일자라도 회중주의와 같이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한 신학과 교회정치로서의 ‘노회(presbytery)’로 묶여져 연합하는 성격 가운데서 독특하게 운영되는 것이다(총회 혹은 대회는 이러한 노회의 독특한 기능을 바탕으로 하는 가운데서 임시회(臨時會)의 성격이다).

그런데도 최근 목사들(특히 작은 교회들)의 동향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지 대형교회의 목사(담임목사)와 연계되어 도움을 받으려고 애를 쓰며, 그로 인해 지원을 받는 교회에 예속되는 표로서 지원을 받는 교회의 이름을 승계하거나 심지어 모교회의 행사에 동원되는 일까지 기꺼이 감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장로교회는 기본적으로 목사를 비롯한 치리하는 자들의 신학이 중요한 근간(根幹)을 이루는 것이며, 그러한 신학과 더불어 순수한 신앙이 없이는 온전하게 세워질 수 없는 독특한 바탕에서 운영되는 교회다. 그러므로 마 10:16절의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말씀과 같이 지혜롭고 신중한 신학과 더불어 순결한 사랑과 신앙이 필요한 것이 장로교회의 형성(形成)과 운용(運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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