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신학연구소가 세웠던 "성결신학 프로젝트"를 위하여

서울신학대학교 강사, 동 웨슬리신학연구소 책임연구원, 서울신학대학 졸업 (BA. M.Div. Th.M.), 공군 군목 5년, Asbury Theological Seminary (MA), 영국 맨체스터에 있는 Nazarene Theological College에서 조직신학(웨슬리신학) 으로 박사학위.

이 글은 장기영 박사가 개인 SNS에 올린 내용이다. 공감되는 측면이 있어 본인의 동의를 구해 옮겨왔다. <편집자 주>

2014년 9월에 서울신학대학교 내에 웨슬리신학연구소가 만들어진 후로 2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그 기간 중 가장 아쉬운 일은, 학교가 처음에는 유급 간사 겸 연구원으로 일하라고 나를 고용했다가 몇 개월 후에 재정이 없다며 급여를 중단한 일이 아니다. 유급으로 일하라는 제안에 대해서는 애당초 원치 않음을 분명히 밝혔고 몇 개월 후에 그 직이 없어졌을 때는 일말의 해방감조차 느꼈다.

가장 아쉬운 일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교의 신학적 토대와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데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 할 수 있는 웨슬리신학연구소의 계획 "성결신학 프로젝트"가 학교재정을 이유로 채택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많은 재정을 들여가며 많은 강좌들을 추진한 것을 비롯하여, 단발성 국제학술대회를 위해 한번에 수천 만원씩을 들여 외국 신학교의 교수단을 수 차례 초청한 일, 교단신학과 크게 관계가 없는 외국 신학교들과의 교류협정을 위해 수천 만원씩을 들여가며 여러 차례 외국 신학교들을 방문한 일 등의 소식을 접할 때, 내 마음에 재차 떠올랐던 질문은 이런 단발성 행사들로 한 교단과 신학교의 신학적 정체성이 확고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나는 교단에서 신학교육정책위원회가 모인다는 기사가 뜰 때마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편이다. 결코 사소하지 않은 중요한 논의가 오가는 것을 보면서 그 일을 맡으신 분들의 고민과 노력이 어떠할지 마음으로 공감하게 된다. 그럼에도 한 교단의 신학적 기초를 튼튼히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안은 여전히 제시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깝다. 이런 상태라면 누가 교단의 신학교육정책위원이 되든 시간은 금방 흘러갈 것이고, 그 다음 임기를 맡은 분들이 또다시 비슷한 논의를 되풀이하는 일만 반복될 것이다.

웨슬리신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서 수개월 동안 숙고한 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내용, 앞으로도 교단신학의 발전과 신학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는 절대로 지나칠 수 없는 일, 꼭 해야만 한다고 믿는 일이 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웨슬리신학연구소가 세웠던 "성결신학 프로젝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웨슬리신학 명저번역 프로젝트"이다.

나는 많은 웨슬리안 교단과 신학교들 가운데 웨슬리신학을 우리 교단처럼, 그리고 서울신학대학교처럼 가볍게 여기는 곳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다. 교단신학인 웨슬리신학이 교단의 신학자들에게는 한없이 가벼워 보이고, 교단 목회자들에게도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원인은 무엇일까? 이러한 상황이 어디서 초래 되었는가?

거두절미하고 핵심은 훌륭한 내용을 가진 "책들", 신학자에게는 신학적 영감을 불어넣고 신학적 사고의 전반적인 틀을 제공해주고, 목회자에게는 목회적 영감을 불어넣어 자기 목회에 적용하고 싶은 내용이 담긴 훌륭한 책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외국에 그런 책이 있는지 없는지는 논외로 하고, 당장 우리에게 그런 책들이 별로 없다는 것이 팩트이기 때문이다. 또 사실상 외국에 그런 책이 있는지 없는지 알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범 웨슬리언 교단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단으로, 그 교단들에서 웨슬리신학은 매우 깊이 있게 잘 발전되어 있다. 웨슬리언 교단들에서 웨슬리신학은 전도와 영성 함양, 목회와 사회봉사를 위한 풍부한 원천과 원리가 되어왔다. 해외의 웨슬리언 교단 신학교들은 매우 다양한 웨슬리신학적 입장의 서적들로 학생들을 교육하고, 웨슬리언 교단의 목회자들은 풍부한 웨슬리언 자료들을 사용하면서 자신의 목회를 풍성하게 해나간다. 내가 미국의 애즈베리 신학교와 영국의 나사렛 신학교에서 경험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성서신학이든, 역사신학이든, 조직신학이든 실천신학이든 매 수업시간마다 웨슬리안 관점에서의 교과서와 필독서로 수업하고, 토론하고, 과제물을 제출하고, 논문을 썼었다. 학생들은 웨슬리신학에서 큰 유익을 얻고 확신을 가졌고, 거기에 기초하여 목회적 비전을 말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런 유익한 영향을 끼친 훌륭한 책들 중 1000분의 1도 우리 나라에, 우리 교단에, 우리 신학교에 소개되지 않았다. 애즈베리의 케네스 콜린스 교수가 정리한 100페이지가 넘는 웨슬리신학 서적 목록, 200페이지가 넘는 웨슬리신학 연구논문 목록, 책 제목 리스트만으로도 도합 300페이지가 넘는 웨슬리신학 연구자료 목록 중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번역된 자료는 손꼽을 정도이다. 그러니 웨슬리를 신학자로 여기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웨슬리신학이 한없이 가벼워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목회자들이 목회를 위해 웨슬리언 관점의 자료를 사용하고자 해도 사용할 자료가 없어 개혁주의 자료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웨슬리학자로서 매우 부끄럽고 한탄스런 일이 있다. 나는 국내에서 웨슬리를 제법 아는 사람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웨슬리신학 전공자 수 자체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웨슬리 연구로 학위를 받았으니 사람들은 웨슬리신학에 관해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인정해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 속에는 웨슬리신학 연구에 있어 남들이 모르는 깊은 열등감이 있다. 나는 내가 박사학위논문을 쓴 일부 영역을 제외하면, M.Div.나 M.A.과정만 졸업한 영국과 미국의 신학생들보다 웨슬리신학의 전반적인 체계에 대해 알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서울신학대학교에서는 "웨슬리신학과 사중복음" 과목을 제외한 다른 수업에서는 웨슬리안 관점의 신학을 접하기가 어려운데, 영국과 미국 신학생들은 웨슬리신학이 아닌 다른 과목들에서도 매 수업시간마다 웨슬리언 관점을 배우고 웨슬리언 관점에 대해 토론한다.

나는 서울신학대학 학부 4년과 신학대학원(M.Div.) 2년과 대학원(Th.M) 3년, 서울신학대학교에서만 총 9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면서도 웨슬리신학 분야의 총론에 해당하는 몇 권의 책을 읽은 것이 전부인데, 그들은 신학교에서 매 수업시간마다 웨슬리언 관점의 교과서와 웨슬리언 관점의 필독서들을 독서하고, 매우 깊은 전문성을 가진 교수들과 계속해서 토론한다. 내가 정독한다면 한달이 넘게 걸릴 원서들을 저들은 자기 말로 짧은 시간 내에 읽는다. 나는 박사과정 학생이 되어서도 책 제목만 알 뿐 읽어보지 못한 웨슬리안 관점의 신학 서적들이 많은데, 그들은 그런 책들을 대학원 과정에서 수업 시간에 이미 읽어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와 연관된 다양한 주제들의 토론에 자주 참여해보았다. 벌써 출발선이 다르다. 사고의 범위가 다르고, 토론의 수준이 다르다. 이러한 생각을 사대주의라고 말해도 나는 기꺼이 수용할 의사가 있다.

나는 그나마 유학을 갔기에, 비록 원서로 읽는 독서량이 많지 않고 독서의 폭이 좁음에도, 그나마 원서로라도 웨슬리언 관점의 책들을 접해 보았지만, 국내에서 신학과 목회를 위해 웨슬리를 활용하고자 하지만 웨슬리신학 총론 서적들이나 손으로 꼽을만한 번역서 외에는 접할 수 없는 많은 분들께 웨슬리신학은 어떤 의미로 와닿을까? 신학자에게든 목회자에게든 참고할 만한 양질의 자료 자체가 부족한 현실에서 웨슬리신학이 깃털처럼 가벼워보이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한국에는 웨슬리신학의 각론들, 신학의 다양한 주제들에 관한 깊이있는 번역서가 태부족이다. 그러니 교단신학을 정립해야 한다는 우려와, 교단신학을 정립하자는 구호는 있어도, 신학정립을 위해 교단이 기본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웨슬리신학 관련 명저의 분량은 지난 수 년간, 아니 지난 수십 년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수십 년 전에 웨슬리로 논문을 쓴 학생이나 지금 웨슬리로 논문을 쓰는 학생이나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의 수에서 도찐개찐이다.
 

웨슬리신학 분야의 명저번역이 없이 교단신학의 발전과 정체성 운운? 수십년 전이나 수십년 후나 도찐개찐일 수 있다. 웨슬리신학과 사중복음, 그 수업 외에는 웨슬리신학 체계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제각각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시간, 웨슬리신학 총론 이외에 웨슬리 조직신학의 각론들에 관한 깊이있는 책들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웨슬리신학은 늘 교단의 구호로만 남지, 학생들과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사고 속에서 자신의 신학의 자양분이 되고, 사고의 체계가 되고, 목회를 돕는 원천이 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국내 학자들이 쓴 책들은 대부분 총론의 형태를 벗어나기 어렵고, 중생, 성결, 신유, 재림, 사중복음 각각의 주제들에 관한 웨슬리신학서들, 그리고 신론, 기독론, 성령론,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은사론, 성례론, 전도론, 종말론, 웨슬리의 계약신학 등등 매우 다양한 신학 주제들 각각에 대해 깊이 있게 쓴 단행본 서적들이 태부족이고, 각론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국내 연구자들이 쓴 수십페이지의 연구논문을 접하는 것이 전부인 상황에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서울신학대학교는 어떤 방법으로 교단신학의 정립을 말하고, 교단신학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신학의 기초가 되는 책이 너무나 부족한 실정인데 무슨 신학적 정체성을 논하며 신학교육정책을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성결신학 프로젝트"를 수립해서 제출하라는 유석성 전 총장님의 오더를 받았을 때, 웨슬리신학연구소가 가장 먼저 제안한 것은 웨슬리신학 명저번역 프로젝트였다. 총장님께서 퇴임하시기 전 2년의 시간 동안 서울신학대학교에서 각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님들께서 각각 자신의 수업에서 사용할 웨슬리신학 명저들을 번역하실 수 있도록 웨슬리신학에서 가장 기본적이고도 훌륭하다는 평판을 받아온 20여권의 책을 선별하고 추천했다. 그리고 연구소의 모금과 서울신학대학교의 지원으로 각 교수님들의 번역작업을 위해 각 책마다 번역료 500만원씩을 후원하여 2년 후에는 최소한 20권의 웨슬리신학 명저가 번역되어 교수님들의 각 수업시간에 직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을 드렸다.

유석성 총장님의 퇴임식 이전에 20권의 웨슬리신학 해외 명저들 번역을 완료한 후 퇴임식에 맞추어 20권을 전체 시리즈로 출판하여 교단신학 발전에 족적을 남기실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재정이 없다는 이유로 이 계획을 받아들여지 않으신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안타깝다. 그런 가운데 수천 만원 이상이 드는 단발성 행사들이 계속해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은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이 글은 건방지다는 비난, 주제 넘는다는 비난을 각오하고 쓰는 글이다. 새까만 후배의 의견을 건방지다고 문제 삼고, 제안한 내용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분이 대부분이시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럴지라도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리신학연구소의 책임연구원은 교단신학 발전 및 신학적 정체성 확립을 위해 매우 중요한 제안을 올렸으나, 수많은 단발성 행사를 위한 재정의 일부만 아꼈어도 충분히 시행할 수 있었을 만큼의 재정을 이유로 이 중요한 제안이 실현되지 못한 것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이제는 말하고 싶을 뿐이다.

또 나는 지금의 교단과 학교를 향해서도 "앞으로 장래에도 이 제안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교단 역사가 또다른 100년이 흐른다 하더라도, 또 서울신학대학교의 주인이 여러 세대가 뒤바뀐다 해도 교단신학의 정체성 확립은 여전히 요원할 것입니다!"라고 크게 소리쳐보고 싶을 뿐이다. 그 결과로 미움을 받든, 팽 당하든, 아니면 나 자신이 제풀에 나가 떨어지든...

글을 마무리 하면서 마지막으로 드는 의문들이 있다. 해외에 이미 충분하게 축적되어 있는 웨슬리신학 책들 가운데 우리 교단신학의 기초가 될 훌륭한 명저들을 번역할 노력조차 하지 않는 그런 교단과 신학교라면, 차라리 웨슬리신학을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도움이 안 되는 신학으로 생각하고 발전시킬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버리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태도가 아닐까? 버리지도 않고 발전시키지도 않으려는 지금의 태도가 과연 바람직한 태도일까?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