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건 목사(뉴저지신학대학/뉴욕장신 조직신학 교수)

김희건 목사(뉴저지신학대학/뉴욕장신 조직신학 교수)

종말론에 관한 여러 책을 썼던 Richard Bauckham은 종말론을 가리켜 “imaginative picturing of the unimaginable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여 그리는 것)”이라 표현한다. 기독교 신학에서 유독 통일된 해석을 찾기 어려운 분야가 종말론이다. 자칫 종말론은 성경 본문을 자기 상상대로 해석하고 하늘에 그리는 그림이 될 수 있다. 그런 어려운 점을 아는 사람이라면, 종말론에 대해 무슨 언급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다.

종말론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 해석의 방법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과 신약이 동일한 수준의 계시인가? 아니면, 신약의 계시 속에서 구약을 해석해야 하는가? 성경 무오설을 지지하는 한국 교회에서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수용하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가 시대와 상황 속에서 발전하여 신약의 계시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구약과 신약을 동일선에서 수용할 때 체계적, 통일적 해석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항상 신약을 기준으로 구약을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의 방법이라 믿는다.

종말론과 관련하여 항상 논쟁이 되는 것은, 문자적 천년 왕국의 실재 여부 (전천년설, 또는 무천년설의 적용), 문자적 천년 왕국에 있어 세대주의적인 천년 왕국과 역사적 천년 왕국의 논란, 종말에 이스라엘 백성의 국가적 회복과 종말적 사역, 이스라엘의 존귀 여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천년왕국을 “유대인의 꿈”이라 하여 무시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관련한 구약의 예언에 무게를 두는 사람이라면, 그 성취의 장으로 문자적 천년 왕국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각기 나름대로 해석의 틀과 체계로 본문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체계가 다르면 자연히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근래 교회 안팍에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스라엘의 특별한 위상을 주장하는 것이나, 이스라엘의 회복이 종말의 선(先)징조라거나, 주님의 재림에 앞서 이스라엘 나라가 전체적으로 회개하고 옛 땅으로 돌아가는 일이 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교회 또는 선교 단체들의 활동을 들으면서, 과연 그런 주장과 운동이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갖고있는지? 다시 묻게 된다.

Social network의 발달로, 지식이 쉽게 전파되는 것은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학문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내용들이 무분별하게 전파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 생각된다. 목회자들이 어떤 소견을 갖게 되면 그들을 따르는 교인들은 자연스레 그 목회자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정말 '책임적이고 올바른 성서적, 신학적 이해를 갖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다시 언급하고 싶은 사실은, 종말론은 통일된 해석이 쉽지 않은 것임을 알아 조심스럽게 접근,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개하는 내용도 어떤 이들에게는 생소한 의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본 글을 통해 취급하려는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말의 때에 전 민족적으로 회심할 것인가? 과연 유대 백성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재건할 것인가? 또는 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회심이 주님의 재림의 조건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근래 이런 주장을 하는 선교단체나 교회가 있어 적지 않은 교인들도 그것을 사실로 믿는것 같다. 그렇게 믿는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 하나가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롬11: 26)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종말적 회복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열방 속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특별한 위상을 믿고, 그 종말적 존귀, 민족적 구원을 믿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유다) 백성이 다른 이방인들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아래 있으며, 언젠가 미래 역사 속에 성취를 기다리는 구약의 예언을 배경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민족적 회복이나, 독특성(특별성)을 주장하는 견해는 신약 성서 전반의 말씀에 의해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말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8:11-1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 43).

이 말씀들은 이스라엘의 종말적 회복을 지지하는 대신, 그들의 역사적 특권과 지위의 상실을 예언하는 말씀이 분명하다. 또한 사도 바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과 성령 강림 이후, 이제 하나님 앞에서는 유대인, 이방인의 구별이 없어졌다고 주장한다(롬 10: 12, 갈 3: 28-29, 5:6, 엡 2: 19, 골 3: 11 참고). 더 나아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한다(갈 3:9). 이상 몇몇 신약 성경의 증거에서 보는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가 주어지는데, 거기에는 유대인, 이방인의 차별이 없고, 유대인들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 구원이 약속되었음을 읽게 된다(행4: 12).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역사의 종말에 민족적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른다고 믿는 사람들과,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처럼, 유대인들은 복음과 별도로 하나님과의 언약에 의해 종말적, 민족적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구별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로마서 본문 말씀이 과연 종말의 때에 유대인들의 민족적 회개와 구원을 의미하는 말씀인가? 를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본문 이전의 로마서 말씀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 글을 전개함에 Lloyd-Jones의 책 “The Church and the Last Things(교회와 종말 사건)” 속의 유대인 관련 자료를 참고 하였음을 밝힌다.

로마서 8장 마지막 부분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에 의해 끝까지 보존된다고 증거한다(롬8:31-39). 그렇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왜 버림을 받았는가? 로마서 9장 이후는 그 대답을 제공하고 있다. 로마서 9-11장의 설명에 의하면, 혈통에 의한(육신적) 이스라엘 백성이 저절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고, 아브라함의 씨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롬9: 6-7),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9:8), 택하심을 받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증거한다”(9:11). “또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는 자’만 구원을 얻는다”(9: 27). 유대인들은 그런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 하다가 ”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진 자가 되었으나(10: 3), 이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가 구원에 이른다”고 한다(10:12, 13).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는 것은 혈통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백성, 약속을 믿는 백성, “남은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논란이 되고 있는 롬 11: 26,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본문은 종말의 때에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한꺼번에 구원에 이른다는 뜻이 아니라, 종말에 앞서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구원에 이르는 것처럼, 모든 세대에 택하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심을 받고 응답하여 모두 구원에 이른다는 말로 해석되는 것이다. 물론 그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 의한 부르심을 의미한다. 그 다음 본문 (롬 11: 26-27), 이사야서의 인용,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신다”는 예언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초림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구약의 예언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결정적 단서가 되는 것이 행 15: 16-18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야고보가 구약 아모스 9:11-12을 인용한 말씀으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는” 예언을 교회의 설립과 유대인, 이방인들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찾는 일로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구약 아모스 본문과 이어지는 말씀(암9: 13-15)은 장차 유대 나라의 회복을 예언하는 말씀이 분명하다. 그러나 야고보는 아모스의 예언을 해석하여 이르기를, 그 예언은 문자적으로 유대인들의 민족적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설립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 이방인 모든 백성들에게 전파되는 것으로 그성취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회복의 예언은 교회의 설립과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으로 완성되며, 유대인, 이방인을 초월해서 예수의 복음을 통해 택한 백성을 교회로 부르시는 사역으로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주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이스라엘 백성들 중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는다는 말로 해석하게 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유다) 백성 중에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게 된다는 뜻이다. 로마서 8장 후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말씀은 택함 받은 이스라엘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붙드시는 분이심을 증거한다.

복음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대상으로, 복음과 달리 구약의 언약의 전통 속에서 전 민족적으로 회복이 있으리라 주장하는 몰트만과 같은 사람도 있고, 로이드 존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이후 이제는 유대인,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더 나아가 차별의 철폐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차지했던 자리를 신약의 교회가 대신한다고 주장한다(이것이 소위 대체 신학의 입장). 이런 차이는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구약과 신약을 어떤 관점에서 읽는가?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덧붙여, 종말에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리라는 주장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구약의 제사제도가 무효화된 점과 신약의 여러 증거를 토대로 볼 때(특히 히 10: 9-18절 참고), 무용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