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선생 최흥종』, 최장일 고경태 지음, 바일블리더스, 2018. 74 p.~84p.

1919년 당시에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재학하면서 광주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를 개척하고 있었던 최흥종 전도사는 이러한 영적대결 구도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또한 깊은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최흥종은 삼일운동 때 광주북문안교회(현 광주제일교회) 교인 및 지역 인사들과 광주 만세 시위를 모의하였다. 당시 최흥종은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석키 위해 상경해서 전라남도 지역에 뿌려질 독립선언문을 받아서 광주로 내려가기 위해 인력거를 타고 서울역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마침 3월 5일 서울 학생들이 전개한 만세시위가 벌어지자 최흥종 목사는 자신이 중요한 문서를 소지한 것도 잊은 채, 인력거로 위에서 ‘조선독립’이라 쓴 깃발을 휘두르며 만세를 불렀다. 

《독립운동사자료집》13권, 107쪽에 있는 경성지방법원 예심종결문(1919년 8월 30일)에 보면 최흥종은 1919년 3월 5일의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피고 최흥종은 남대문 역전에서 인력거 상에서『新朝鮮新聞』이라고 題하고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함과 같은 불온인쇄물 수십매를 철포하고 자기 신변에 집합한 다수의 군중에게 개하여 민족자결주의를 述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연설을 하려고 하여 그 冒頭를 述키 시작하자 군중은 독립만세를 고창한 고로 이에 창화하여 함께 대한문 전에 이르러 同處에서 인력거 상에서 '조선독립'이라고 大書한 기를 흔들며 군중에 솔선하여 시위운동의 勢를 부조함으로써 각 피고는 정치의 변혁을 목적하고 불온한 망동을 해서 치안을 방해한 사실이더라.”

오방 최흥종 목사

또한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19년 11월 6일)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피고 최흥종은 장로파에 속하는 야소교 전도사인 바, 대정 8년 3월 2일 경 마침 광주지방으로부터 경성에 와서 이태황 전하(고종 황제)의 국장을 당하여 많은 군중이 경성에 모인 것을 기화로 위의 군중에게 대하여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을 고취함으로써 그 목적을 관철하려고 하던 차 대정 8년 3월 5일 학생단에서 위의 시위운동이 있음을 듣고서 알게 되자 크게 그 취지에 찬동하였으며 … 피고 최흥종은 인력거 위에서〈新朝鮮申報〉라 제한 조선독립을 고취하는 불온한 인쇄물 수 십 매(증 제114호와 동일한 것)를 선포하고 대한문 앞에 이르자 인력거 위에서 '조선독립'이라 크게 쓴(증 제115호) [것]을 휘저으며 군중을 지휘하여 시위운동의 기세를 도움으로써 각 피고는 치안을 방해하였다.(독립운동사자료집 5권, 102∼103쪽)”

그는 결국 3.1운동과 관련하여 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래서 광주와 전라도에는 기미독립선언문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광주 만세운동은 김철 등이 독립선언문을 운송하여 양림동 남궁혁 목사 사택에서 광주북문안교회 성도들을 중심으로 논의하였다. 이 때에 광주에서는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이 활동하며 적극 주도하였다. 최흥종의 법정진술은 다음과 같이 알려졌다. “나는 독립이 될 것으로 믿고 있으며, 어쨌든 나로부터 독립사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광주만세운동은 서울 기독교 신자들과 광주 기독교 신자 김철과 최흥종이 연락하며 진행한 것으로 제시하였다.

삼일운동에서 최흥종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 그런 순박한 열정은 광주의 삼일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광주 삼일운동에서 최흥종이 빠지지 않는 것은 북문안교회와 미션스쿨인 숭일학교와 수피아여자학교를 중심으로 진행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일운동을 향토사에서 보면 광주에서는 3월 1일이 아닌 3월 10일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1919년의 통신과 교통수단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광주는 단독으로 1929년 11월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현재 광주학생항일기념탑이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있다.

최흥종이 1920년 6월 13일 형무소에서 출소된 후 광주에 도착했을 때, 유덕동 공원에 환영인파가 가득찼다고 전해진다. 비록 그가 서울에서 체포되어 광주의 삼일운동을 주도하지 못했지만, 이미 상경 이전에 모든 것을 준비했었다. 오히려 광주에서는 최흥종이 서울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의 만세 운동 모의가 탄로가 날 것을 염려하였다. 만일 일본경찰에 체포된 최흥종이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광주만세운동의 모의자들을 발설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아무일없이 광주에서의 만세운동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2019년 광주의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했던 최철 회장(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은 "최흥종 목사를 빼고 광주의 삼일운동을 논할 수 없다. 특히 그가 사전에 체포되었지만 광주 만세운동 모의에 대해서 함구한 것을 당시 광주의 인사들은 고마워했고, 광주의 삼일만세운동을 있어서 가장 중요안 부분"이라고 했다.    

최흥종은 출옥 후에 광주청년회와 광주기독교청년회(광주YMCA)를 창설하였다. 또 1920년 12월 2일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1월에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광주북문밖교회(광주중앙교회) 초대 담임목회자가 되었다. 그후에는 시베리아와 제주도 모슬포 지역에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1926년 광주로 돌아온 후에는 기독교청년회와 나환자 및 결핵환자 구제사업에 전념하였다.

연결기사  "삼일운동과 오방 최흥종 목사 (1)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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