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성경연구원 안정훈 목사의 성경강해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요한을 성령으로 감동시켜 하늘나라로 부르신 이유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계1:1-2) 삼위 하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여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즉, 반드시 속히 될 일을 사도요한에게 보여주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삼위 하나님께서 사도요한에게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보여주신 목적은 전부 계2장과 계3장에 있는 일곱 교회의 성도들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일곱 교회에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여주시는가? 계2장과 계3장에 있는 일곱 교회의 영적인 상황 때문이다. 일곱 교회의 영적 상황이 어떠한가? 지금부터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의 영적 상태를 살펴 볼 텐데 일곱 교회를 살피기 전에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왜 하필이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인가이다. 일곱 교회는 지리적으로 에게해 지역에 나선형으로 둥글게 형성되어 있는데 그 옆에는 골로새 교회도 있고 갈라디아 교회도 있고 안디옥 교회 등도 있고 여러 다른 교회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만 편지를 보냈는가?

하나님께서 여러 교회들 중에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만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교회들보다 신앙생활을 특별히 못해서도 아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수를 알아야 한다. 일곱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창조의 수로서 일곱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창조한 교회라는 것을 상징한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영적 상태가 당시의 하나님의 모든 교회를 포괄하고 있고, 그리고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들의 영적인 모습을 충분하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편지를 통해 그들의 영적 상태를 설명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또 책망하면서, 당시의 모든 하나님의 교회들에게도 말씀할 수 있고, 나아가서 오늘 이 시대에 예수를 믿는 교회들에게까지 충분하게 말씀이 적용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곱 교회를 선택한 것이다.

일곱 교회를 보면 신앙생활을 잘해서 칭찬받는 교회가 있고 다른 일을 다 잘하면서 첫사랑을 잃어버려 책망 받는 교회가 있다. 자기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는데도 잘하는 줄 아는 교회도 있다. 세상에 한 다리 걸치고 한 다리는 교회 안에 걸쳐 놓은 교회도 있다. 교회 안에 신앙이 신실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 책망 받는 교회도 있다.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는 교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사도 요한의 편지는 우리 개인의 삶에 모두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것을 알고 어느 특정 교회가 내 영적 상황과 맞다고 단정하기보다는, 일곱 교회 모두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에베소 교회의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계1:20절에 나타나신 주님으로서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분으로 나타나셨다. 왜 에베소 교회에 오른손에 일곱 별 곧 일곱 교회의 사자를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즉 일곱 교회 사이를 왕래하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 에베소 교회는 주의 일을 게을리 한 교회가 아니라 아주 열심히 한 교회이다. 그리고 교회 안의 악한 자들 곧 자칭 사도라고 하는 거짓사도를 밝혀낸 영적 분별력이 있는 교회이다. 그리고 에베소 교회는 예수 이름을 위하여 여러 가지 시험과 어려움들을 잘 참았고 게으르지 않은 부지런한 교회이다. 그리고 주님이 그렇게 싫어하는 니골라당(영지주의, 그노시스 주의 :영은 중요하고 육은 무익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행위 곧 입만 가지고 예수 믿고 행동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자들을 미워한 교회이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가 이 모든 주님의 칭찬을 받았지만 한 가지 책망을 받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처음 사랑 곧 십자가 사랑을 잃어버렸다. 주님은 그 십자가 사랑의 행위를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찾아야 한다고 했고 만약에 찾지 못한다면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약에 처음 사랑 곧 십자가 사랑을 회복한다면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실과를 먹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일곱 교회의 사자를 붙잡고 계시고 일곱 교회 사이를 왕래하시는 주님과 이러한 에베소 교회의 모습과 어떤 조화를 이룰 수 있기에 주님께서 이런 모습으로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셨는가?

에베소 교회에 일곱 교회의 사자를 붙잡고 있고 일곱 촛대 사이를 왕래하시는 모습으로 일곱 교회에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뜻은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이 에베소 교회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일곱 교회 전체를 대표해서 나타난 모습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 메시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곱 교회 뿐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은 에베소 교회에 나타나셨던 주님의 모습이 나타나신다는 것을 알고 처음 사랑의 행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의 기초 위에서 헌신과 인내와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잃어버린 교회와 개인은 처음 십자가 사랑의 행위부터 회복해야 할 것이다. 십자가 사랑의 행위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고전13:1-3) 일곱 교회의 축복을 에베소에 다 주고 있다. 그러나 사랑 없으면 소용없다.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계1:17-18절에 나타나신 주님으로서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으로 나타나셨다. 주님께서 왜 서머나 교회에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 서머나 교회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사단의 집단에게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을 받을 뿐 아니라 순교까지 당하는 교회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을 앞으로도 더 받아야만 하는 교회이다. 이러한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자기 스스로 살았다고 하지만 실상은 죽어 있다는 말씀을 들은 사데 교회와는 정반대이다. 그렇다면 처음이요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의 모습과 이러한 서머나 교회의 모습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이유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고난 받고 순교당하고 있는 서머나 교회로 하여금 이 모든 일들 곧 서머나 교회의 고난과 순교까지도 주관하고 계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마지막까지 충성하면 결국에는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영광을 얻을 것이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서머나 교회에 처음과 나중이시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즉 고난 속에 있는 성도의 고난이 헛되지 않고 부활의 승리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주님은 부활의 주님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받았던 교회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머나 교회의 모습은 서머나 교회에 국한되어 있지 않고, 일곱 교회와 주님의 이름과 말씀 때문에 고난 받고 있는 오고 오는 모든 교회와 우리에게까지 적용되어져야 할 말씀이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도중에 신앙을 버리는 이유가 이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주님을 모르고 부활 신앙이 없기 때문이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부활신앙을 가지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교회의 시금석이다.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계1:16절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으로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셨다. 주님께서 왜 버가모 교회에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셨는가? 버가모 교회는 사단의 위가 있는 교회이지만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죽임을 당할 때에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교회이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인 우상숭배를 하고 그 재물을 먹고 음행을 하며 그리고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다가 주님으로부터 심한 책망을 받은 교회이기도 하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주님과 이러한 모습의 버가모 교회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좌우에 날선 검은 히4:12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다.

버가모 교회가 발람의 교훈을 쫓아 우상숭배하고 음행하고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이다. 말씀을 떠난 교회는 말씀에 의해 심판을 당한다. 그런데 버가모 교회는 자기들이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적당히 타협해도 되는 줄 알았다. 주님께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버가모 교회에 나타나신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말씀으로 제대로 분별시켜주기 위해서이다. 버가모 교회가 주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이긴다면 감추었던 만나를 먹을 것이고, 흰 돌을 받고 그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새기는 생명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인데, 그 이름이 바로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으로서 받은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

버가모 교회의 특징은 하나님께 대한 열정과 헌신과 순교까지도 있지만 자신도 알지 못하게 세상에 타협하고 양보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분명하게 분별하게 하기 위해 주님께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시고 나타나신 것이다. 은혜 안에 있다고 모든 것이 좋은 것이 다 은혜가 아니라는 것이다. 좌우에 날 선 검은 분별력을 요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버가모 교회의 모습은 일곱 교회 뿐 아니라 오늘을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하고 있는 교회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