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저주하는 욥 (욥3 : 1 - 26)

생일을 저주하는 욥(욥3:1-26)

사단에 의해 자식들이 다 죽고 재산도 다 빼앗기고 몸까지 악창으로 만신창이가 된 욥의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기 위해 서로 상약하고 욥을 찾아왔다. 그러나 욥을 본 그들은 위로는커녕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일주일 밤낮을 한마디로 못하고 지켜보기만 했다.(욥2:11-13) 고통 받는 사람을 위로하고 권면할 때가 있다. 그러나 욥의 현재 상태는 사람이 위로하고 권면할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누구나 그를 보았다면 차라리 죽었으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말을 할 것이다. 사람이 너무도 기가 막힌 일을 당하면 당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할 말을 잃어버린다. 욥과 욥의 친구들은 욥이 당한 일에 대해서 말을 한다는 것이 사치인양 침묵하며 일주일을 보냈다.

많은 말보다 침묵하며 함께 있어주는 것도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난 후 드디어 욥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욥과 욥의 친구들의 논쟁이 시작됩니다. 욥이 입을 열어 한 말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욥 자신의 생일 저주였다. 그러니까 욥은 고통 속에서 자신이 차리라 태어나지 말았더라면 하고 자기 생일을 저주하였다. 자기 생일을 저주한다는 것은 현재의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불만과 부정을 말한다. 욥의 자기 생일 저주의 내용들을 보면 사실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부모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라고 할 수 있다.

욥의 세 친구들이 욥과 논쟁을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욥의 발언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의 문제는 욥1장과 2장에서 욥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있다가 왜 이제 와서 갑자기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의도로 자기 생일을 저주해서 친구들이 욥을 공격할 빌미를 주었느냐는 것이다. 욥의 믿음이 변한 것인가? 아니면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욥을 향한 뜻이 따로 있는 것인가?

우리가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접근보다는 최대한 현재 욥이 처한 상황으로 들어가 욥의 심리적 상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욥이 그 고난 속에서 입술로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욥이 기쁘고 즐겁게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았겠는가?

욥1:20절에 보면 욥이 자식들이 죽었다는 소식과 재산과 종들이 다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다”고 했다. 자기 앞에 당한 일들을 보고 욥은 죽기보다 힘들었을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욥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그 후에”라고 했다.

그 후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다는 말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가 하면 욥2:13절에 보면 욥의 친구들이 욥을 찾아왔을 때 욥을 보고 칠일 칠야를 욥과 함께 침묵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욥이 고난을 받은 지가 적어도 일주일은 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욥2:11절 마지막에 보면 욥의 친구들이 욥이 그런 저주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서로 상약하여 욥에게 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친구들이 욥이 고난당하고 있다 하니까 우리가 시간을 내어 욥을 위로하러 몇일날 가기로 하자하고 서로 약속을 하고 욥에게 왔다고 한다면 적어도 시간을 맞추는 시간과 오는 시간이 몇일은 걸렸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욥의 친구들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멀리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욥이 첫 번째 고난과 두 번째 고난 모두 합쳐 고난 받는 기간이 제법 길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서는 욥7:절에 보면 욥이 재앙을 받은 지가 여러 달째라고 하고 있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한 것은 이렇게 고난이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배적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도 심한 고난이 있을 때면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기도하며 가다가도 그 고난의 기간이 길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의심하게 되고 신앙적으로 혼란이 오다가 마침내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하게 된다.

인간은 예수님처럼 일편단심 범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가 필요 없는 사람이다. 욥이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러나 욥도 인간이고 계속되는 고난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이 믿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믿음이 약한 것도 아니다. 욥은 분명히 믿음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고난의 한계선을 넘어갈 때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하고 신앙은 혼란스럽게 된다. 과연 내가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혹 죄는 짓지 않았는지 별 생각이 다 나다가 나중에는 화가 나고 불평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욥이 자기가 당한 처지가 하도 기가 막혀 인생을 탄식하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가하면 욥의 자기 생일 저주는 욥 친구들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고난당할 때 혼자 있을 때에는 말을 할 수 없고 말을 해봐야 소용없다. 그런데 욥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신앙의 친구들이 찾아오니까 그들에게 위로받고픈 마음에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는 넋두리를 했을 것이라는 조심스런 견해이다.(욥5:14)

그러므로 욥1장과 2장에서 믿음으로 고난을 승리한 욥이 이와 같은 자기 생일 저주라는 원망을 한 것은 계속되는 고난과 친구들로부터 위로받고픈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첫째 사람이 나도 그럴 수 있고 나와 함께 한 믿음의 사람들도 그럴 수 있다는 것과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원망하지 말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마지막까지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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