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내전이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기독교인들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재건을 시도하고 있다. 2011년 3월 15일 반정부 낙서에서 비롯된 이 갈등은 50만 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갔다. 1,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집을 떠났고, 그들 중 절반이 그 나라를 떠났다.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 알-모니터(Al-Monitor)는 시리아 난민 100만 명을 수용하고 있는 이웃나라 요르단에서는 국가들 간의 협상이 시작된지 5개월 동안 오로지 몇천 명만이 고국으로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폭력사태를 경험하고 피난행렬에 동참했는데, 특히 IS 무장 세력이 휩쓸어 마을과 도시를 점령했을 때 더욱 그러했다. 2011년 이전에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2,200만 인구의 약 8-10%를 차지했으며, 2017년 보고서에 따르면, 그 이후 80%의 기독교인들이 피난을 떠났다고 보고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수도 다마스커스(Damascus)에서 북쪽으로 370km 떨어진 알레포(Aleppo)에서 교회를 목회하는 압달라(Abdallah) 목사와 아내 아그나(Aghna)는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시리아를 떠날 수 있었지만 남아 신도들을 위해 사역하기로 결심했다. 압달라 목사는 교회 신도 3명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반군에 납치됐으며 어느 순간 교회는 격렬한 총격전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남자들은 강제징집으로 박해를 겪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탈출하거나 집에 숨어 있고, 생계와 양육을 위한 짐은 아내들의 몫이 되고 있다.

젊은이들의 탈출은 알레포를 움직이던 사회 기반의 붕괴를 가져왔다. 노인 세대들은 자신들을 돌봐줄 자녀들을 잃었고, 교회는 젊은 세대가 사라졌다. 이로 인해 교회는 약화되고 있으며 또한 젊은 세대가 떠나면서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은 점점 축소되고 있다.

8세의 가비 코라지안(Gabi Korajian)은 내전이 발생하기 전에 가족과 함께 알레포에서 살았다. 내전이 발생하자 그들은 다마스쿠스로 도망쳤고, 형제들 두 명이 희생되었다.

"우리 가족은 엄청난 고통을 겪었고, 나는 너무 어려서 가족을 도울 수 있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내 동생이 죽은 이후로, 우리는 모두 우리의 안전을 위해 기도해왔습니다."

반군 세력이 서서히 세력을 잃고 있는 가운데 압달라 목사의 교회 신도 3명을 포함해 납치된 기독교인들의 운명에 대한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는다. 언론은 실종된 유명 교회 지도자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으나,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에서 IS 점령 중 납치되거나 실종된 많은 기독교인들도 많다.

시리아에서 마지막 IS 보루가 함락되면 그들의 상황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압달라 목사는 알레포 공동체의 재건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재건에 필요한 자금은 주된 장기대출 자금을 통해서 이뤄지지만, 많은 NGO들이 시리아 전역에 원조를 중단하고 있다.

"그 때에"  "깨어 있으라"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 13장 후반부인 24-37절이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두 단어가 '그 때에'와 '깨어 있으라'이다. 

"그 때" 곧 "마지막 주님이 구름을 타시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재림하시는 때"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 그러므로 시대를 분별하는 영적 지혜와 감각을 가지고 항상 깨어 있어 두려움 없이 준비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약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딤전1:17),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곧 영광의 소망(골1:27)이라고 단언한니다. 또한 하나님 없는 삶은 진정한 "소망이 없다"고 역설한다(엡2:12; 살전4:13). 이것이 성경적 종말론이다. 소위 세간의 "미래학"은 관련이 있으나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미래학은 인간이 마지막 날까지 '지구'라는 항성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기술하는 용어이다. 미래학이 내다보는 미래는 밝은 미래부터 캄캄한 미래까지 다양하며, 이 둘 사이에 온갖시각이 다 존재한다. 이를테면 1)모든 사람이 중산층 이 되어 잘 먹고 잘 사는 무공해 무제한의 세상을 약속하는 세속 미래학자들이 더러 있다. 2)마르크스주의는 정의와 부가 만민에게 골고루 분배되는 계급없는 사회를 일찌기 희망으로 내놓기도 했다. 3)밝은 미래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다수의 미래학자들은 정반대인 아주 캄캄한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의 자원이 마침내 고갈되고 오존층이 파괴되어 치사량의 광선이 유입되며, 북한의 김정은 처럼 핵 군축협약에 서명하지 않은 자들에 의해 세계 비축 핵무기가 무모하게 폭발하는 우울한 최후의 종말을 내다보고 있다.

최근 '불의 고리'라고 불리는 환태평양에서 지진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이 생명을 앗아가고 세계도처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과 방불한 테러들  과 각종 재난들로 수많은 사람들이 피흘리고 고통받는 일이 매일같이 발생해도 우리는 여전히 아무일도 없는 것처럼 일상의 삶에 매달려 있다. 

종말론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은 삼가 깨어있지도 준비되어 있지도 못한 모습으로 살고 있음을 탄식 속에서 문득 문득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소망의 구심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 성경적인 주님의 재림은 인격적이며('이 예수' '주께서 친히' 행1:11; 살전4:16), 가시적이고('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계1:7), 우주적이며('번개가... 비췸같이' 눅17:24) 영광으로 가득찬 것('그의 힘의 영광' 안에 있는 살후1:9)이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의 재림은 그 분의 초림이 비천하고 눈에 띠지 않았던 것만큼이나 지극히 장엄하고 온 우주적인 영광스런 장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앞으로도  오래고 오랜 기다림일 수 있다. 오랜 기다림은 결코 부질없는 기다림이 아니다. 또한 그 기다림은 아무런 행동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종말에 대한 아름다운 전망은 이 생의 매사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행동으로 움직여야 할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되는 것입이다. 성경의 종말론은 우리의 믿음과 현재의 변화된 삶에 원료와 연료가 되는 것이다.

계절의 여왕 5월도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령강림주일 부부의 날 교사의 날 등으로 어느덧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덩달아 우리네 마음들도 많이 바쁘지만, 오늘도 재림의 왕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준비하며 기다리는 깨어있는 거룩한 신부로서 살기를 소원한다. 그렇게 깨어있는 복된 하루하루가 되도록 주여 은혜 위에 은혜로 능력 위에 능력으로 저희들을 통치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할렐루야!  

                          -신현필 목사. 한국오픈도어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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