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은 예수님의 제2차 갈릴리 사역 기간 중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으나 배척받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의 기록으로는 마지막 고향 방문 기사이다. 이는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나사렛 방문과는 다른 사건이다. 누가복음의 기록은 갈릴리 선교 초기에 있었던 사건이나, 본문은 예수님의 선교 사역이 대략 2년 경과했던 시점에 일어난 일이다.

특히 앞선 방문에서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밀쳐 죽이려고 하였음에도(눅 4:30, 31) 또다시 이곳을 찾은 것은 거듭되고 있는 배척에도 불구하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열심을 잘 보여준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 받으신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4-5장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네 가지 비유로 말씀하신 후에, 네 가지 이적 사건을 행하셨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4:35-41), 거라사 광인을 고쳐 주시며(5:1-20),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통 하던 여인을 고쳐 주시고(5:21-34),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주셨다(5:35-43). 그러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셨다.

(막 6: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예수께서 모처럼 고향을 찾았다. 나사렛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치셨다. 많은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며 물었다. ‘저 사람이 이런 것들을 어디서 배웠지? 저런 지혜를 도대체 어디서 받았을까? 기적까지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 예수 아닌가?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가 아닌가? 그 누이들도 여기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가?’ 예수님이 말씀을 가르치는 모습을 본 고향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예수님의 모습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왜 예수를 배척하는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언자는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배척당하는 법이다’”(4절).

그리고는 더 이상 나사렛에서 아무 권능도 행하지 않으시고 소수의 병자만 안수하여 고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셨다. 마13:58 예수께서 그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다고 아주 정확하게 말씀하셨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예수를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나사렛 출신, 그의 부모와 형제들을 알고 있다.

솔로몬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 부와 영화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헛되고 헛되다고 했다. 바울이 그가 세상에서 가졌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이라고 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됨을 거절하였다. 왜 이들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것들을 헛되다고 하고 배설물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을 만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 알기 전에는 세상의 것들이 전부였으나 예수 만나고 나니 세상의 것들이 헛되고 배설물과 같았고 나아가서 그것들이 도움이 되지 않아 다 버리기도 하였다. 예수가 누구시길래 사람들이 왕도 재물도 명예도 권세도 버리는 것을 넘어서 배설물이라고까지 하는가? 예수를 만나면 자기의 생명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예수를 위해 바친다.

그런데 여기서 고향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가? 예수와의 인간관계이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그들이 아는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예수가 야고보과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여동생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마디로 우리가 예수를 잘 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말씀을 해도 어떤 기적을 행하여도 우리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 목수이고 그 동생들을 우리가 잘 알고 예수는 바로 그들의 형제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예수를 쭉 보아왔기 때문에 잘 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안다는 게 뭔가? 그들에게 예수는 메시야나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는 그냥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처럼 예수를 한낫 인간으로 안다는 것이 예수를 모르게 막아 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들이 말씀을 알고 하나님은 안다고 하는데 예수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다.

말씀을 알고 하나님을 알면, 말씀되시고 하나님 되시는 예수를 알아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예수를 모른다. 예수를 모르니 자연 하나님도 말씀도 모르게 된다. 예수는 오늘 본문의 상황을 구약의 선지자들의 상황과 동일하다고 말씀하신다. 선지자들이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 사람들 외에는 존경받지 못함이 없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주의 종이 다른데 가서는 존경받고 영광을 받는데 고향과 친척과 자기 가족에는 존경은 커녕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 이것은 예수를 맞이하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겨냥한 말씀이다.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해서 전하는 사람이다. 목사가 전하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는가? 사람의 말로 들리는가? 이것은 목사와 여러분의 관계 문제이다. 목사를 인간적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의 말을 듣기도 힘들 것이고 순종하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 “내가 너를 아는데 네 말이 하나님의 말씀 일리가 없다.”는 자기 속임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는데 철저하게 사람의 말로 들리는 것이다. 설교자의 언어 행동 눈빛만 이상해도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보지 않는 것이 바로 그런 사례이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그 사람을 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과 결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게 된다. 인간적 관계와 영적 관계를 구분해야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했다. “우리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이 주체가 되지 않는다면 저와 여러분의 관계는 도둑과 강도와의 관계와 다를 바 없는 관계”라고 했다. 인간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성도는 인간관계를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맺어야 하고 그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이 전파되어져야 한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이 내 신앙을 방해하고 예수를 거부하고 배척하고 있지는 않는가? 인간관계에서 말씀 밖으로 나가버리면 복음이 죽고 예수가 사라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만남 속에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이 없다고 생각해 보셨나요?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 않는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그 누구를 만나도 우리는 영적 관계가 아니라 인간적 관계로 맺어질 수밖에 없다. 인간적 관계로 맺어지면 영적 관계가 파괴되고 하나님과 말씀은 들어설 자리가 없어진다. 내가 육으로 살면 누구를 만나도 육의 관계를 유지할 것이고 내가 영으로 살면 누구를 만나도 영의 관계를 만들 것이다.

이제 그 사람의 신앙을 보고 그 사람과 관계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만난다고 하면서 육적으로 만나서, 결국 주님 없는 만남만을 지속할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도 은혜도 상실되어버린 만남은 참으로 비참할 뿐이다. 예수 믿는 우리는 어디를 가더라도 영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를 만나도, 환경이 변해도, 죽어도 살아도 그리스도인이다. 특히 가족 관계에서 영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가정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나누는 분위기를 조성하라. 하나님 앞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눈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직장생활이나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삭막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마인드를 바꾸고 삶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보고도 예수를 배척하는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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