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보수교단 젊은 목회자의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의 실상

본헤럴드 객원기자

1. 성장주의 

성장주의는 한국교회가 지금의 형편이 되기까지, 가장 많은 문제점을 양산한 주범입니다. 한국교회는 사람을 많이 끌어 모아야 한다는 패러다임에 갇혀, 인적자원과 물적 자원의 대부분을 교회성장을 위한 사업에 집중시켜왔습니다. 성장은 마치 ‘블랙홀’과 같습니다. 교회의 제도는 물론이고 심지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구성마저도 성장에 초점을 맞춥니다. 한국교회는 ‘성장환원주의’에 빠져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영혼구원을 내세우고 있지만, 교회를 성장시키기 위한 허울 좋은 구실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오직 ‘교세를 확장하고 교회건물을 세우는 것’을 주님 주신 사명으로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하지 못하고,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들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십자가의 복음마저도 사람들을 교회에 가입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생명은 없는데, 몸집만 비대해진 것입니다.

2. 기복주의 
기복신앙 형태는 아주 오래전부터 한국교회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습니다. 교회의 신앙 활동의 대부분이 ‘복을 받기 위해’ 행해지며 소위 말하는 자수성가형 교인들의 간증이 넘쳐납니다. 설교 시간에는 복을 받는 비결과 원리들이 전수되며, 목사가 마치 액운을 몰아내고 복을 빌어주는 무당처럼 치부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이 복을 받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복이 어떤 복이냐가 중요합니다. 한국교회는 주로 ‘현세적이고, 물량적이고, 사람의 탐욕을 자극하는 현상적인 복들’을 구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가신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많지 않다고 하셨으나, 한국교회는 누구나 찾을만한 것들을 찾습니다. 오로지 ‘넓은 대로를 달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이러한 성도들의 탐욕을 이용하여, 그들이 교회에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하며, 성도들은 오직 세상적인 복을 받기 위하여 종교적 열성을 다합니다. 결과적으로 한국교회는 세상에 속한 다른 종교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기복적인 형태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3. 값싼 구원 
근래 ‘이신칭의’ 논쟁이 그 어느 때보다 더욱 활발합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편협한 구원관 때문인데, 한국교회는 ‘그 행실이 올바르지 않음에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잘못된 구원관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믿음은 그 열매를 보아 안다고 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이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는 행함 없는 믿음은 그 자체로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귀신도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 떨었다고 합니다. 구원은 값없이 주신 것이지만, 결코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이것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희생을 통해 주어진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자들마다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이신칭의’입니다. 결단코 ‘행위’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4. 성직주의 
목사를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직분을 받은 자’로 이해하지 않고, 그를 ‘신령한 자’ 혹은 ‘보다 존엄한 자’로 여겨, 목사를 마치 중세교회의 성직자처럼 떠받드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목사’라는 ‘직분’은 분명한 권위를 가지지만, 그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가르치는데서 나오는 것일 뿐, 그 사람의 신분이나 본질이 더욱 특별하거나, 존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 혹은 ‘선지자’처럼 여기거나, 하늘에서 보냄을 받은 천사들처럼 생각하면서, 자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인간 목사에게 신적인 권위를 부여 합니다. 그래서 감히 목사의 권위에 도전할 수가 없어 부당한 행위나, 부정한 일을 보고도 묵과하게 되고, 목사의 말을 분별할 수 없게 되고, 목사를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목사 한 사람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게 됩니다.

5. Fandom culture
이것은 집단적으로 어떠한 대상에게 매료되어 열성적으로 그것을 즐거워하는 사회 현상인데, 신앙생활을 ‘팬으로서의 활동’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순히 기독교 신앙의 매력을 느껴서 인간적이고 정서적인 기쁨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종교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적으로는 자기가 좋아하는 목사를 추종하는 현상이 있습니다. 목사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혹은 어떤 잘못을 하든지 그가 복음적인 설교를 하든지, 말든지 일단 그에게 매료된 이후에는 오직 그만 바라봅니다. 그에게서 만족을 얻고 기쁨을 찾습니다. 그 외 모든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이 됩니다. 한 마디로 ‘우리 목사님 최고’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기반으로 제왕적 목회자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팬텀 현상은 교회를 ‘동아리 수준’의 모임으로 전락시키는데, 이들은 교회 내에서 서로 자위하며, 사회적 스트레스와 심리적 불안감을 해소하고, 종교심을 달래며, 오직 자기들의 기쁨을 위하여 교회를 철저히 이용합니다.

6. 신학실종(복음실종)
요즘은 성도들이 교회를 이동할 때, 그 교회가 속한 교파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별반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감리교회’ 교인이 ‘장로교회’에 출석하여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한마디로 교파간의 특색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거기서 거기’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특히 설교에서 거의 차이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은 설교자들이 각 교파가 표방하는 교의나 신학적인 근거를 따르지 않고, 인본주의적 대세를 따라 설교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윤리적이거나 심리적인 수사들이 많고 기복주의와 맘몬주의적인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설교의 상당부분이 인간을 위로하거나, 인간을 유익하게 하는 말들로 채워집니다. 때문에 한국교회의 강단에는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그들의 종교성을 충족시키는 설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거짓 신자를 양산하며, 많은 성도들을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7. 정치실종 
신학실종과 맞물려서 정치도 실종되었습니다. 각 교파마다 나름의 신학적 토대에 근거한 정치형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습니다. 공통적으로는 제왕적 목회자구조가 가장 많을 것 같습니다. 혹은 교회의 기득권을 가진 몇몇의 사람들이 교회를 사유화하고, 자신들만의 생각대로 교회를 치리하고 운영하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파가 생겨나고 자주 분쟁하게 됩니다. 회중교회이든지 혹은 장로교회이든지 혹은 감독교회이든지 그 제도가 순기능을 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고, 그 제도의 성격이 변질되어 오히려 교회를 그릇된 길로 이끌어 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어떤 정치제도아래 있든지, 하나님의 교회는 한 몸으로서 서로 유기적으로 돌보고 치리해야 하며, 성경의 최종적 권위를 따라 바르게 치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정치제도가 유명무실할 뿐 아니라, 제도의 껍데기를 악용하며, 힘 있는 사람들이 주인이 되어 교회를 장악하려고 합니다. 결국 교회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지 못하며, 질병에 걸려있는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온전한 모습으로 서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8. 직분의 계급화 
한국교회는 직분을 신분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계급화’ 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유교적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 직분은 철저히 기능적입니다. 사도는 사도의 역할이 있고, 목사는 목사의 역할이 있고, 장로는 장로의 역할이 있고, 집사는 집사의 역할이 있습니다. ‘집사’위에 장로, ‘장로’위에 ‘목사’라는 식의 인식은 교회의 질서가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은 평등합니다. 다만 치리나, 목양이나 교회를 운영하는 측면에서 각각의 직분이 맡은 바 고유한 역할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다른 기능을 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손이 다리를 향해서 쓸모없다고 할 수 없고, 손보다 다리가 더 귀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집사들’ 중에서 ‘장로’를 선출하여 그 직급을 승진시키는 것처럼 이해합니다. 결국에는 일방적인 지배적 구조가 형성되어 불필요한 권위들이 생겨나고, 체면문화가 만연하며, 직분이 감투가 되어 교회에서 마음을 상하는 일이 빈번히 발생합니다.

9. 교회의 종교화(율법주의)
한국교회는 불필요한 형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대부분 기복주의 혹은 성장주의가 양산한 것들입니다. ‘특별’은 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일천번제 헌금’부터 각종 다양한 헌금봉투가 교회 로비마다 즐비합니다. 물론 교회는 자주 모여야 하고, 많이 심는 자가 많이 거두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두 렙돈을 드린 여인이 가장 많이 넣었습니다. 또한 그분은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인애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질을 살펴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큰 계명입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는 종교적인 형식들이 너무나 많고, 그것을 잘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가 신앙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종교화’는 ‘율법주의’를 조장하고, 단지 여러 교회의 활동에 참여하고, 헌신함으로써, 좋은 신앙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만듭니다.

10. 샤머니즘과 이원론 
한국교회는 다분히 주술적입니다. 초월적이고 신비한 것들을 사모하며 추구합니다. 영적인 일을 눈으로 보고, 경험하길 원합니다. 이것은 불신에서 비롯된 것들인데, 본래 악한 세대가 이적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세속’과 ‘영적인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은 구분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칼로 무를 자르듯이 둘로 나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시국이 이러한 때에 어떤 사람들은 교회는 영적인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교회에서는 열심을 다하지만, 삶에서는 아무런 열매도 없는 허약한 신자를 양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는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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