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을 보내며) 가장 기억에 남는 책

올해 번역한 책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생각의 힘에서 나온 『나만의 유전자』입니다. 항상 최선을 다해 번역하지만, 올해 초 난생 처음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여행갈 때도 원고를 들고가 새벽마다 읽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책입니다.

『나만의 유전자』는 면역학에 관한 책인데,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인간의 생명에 관심이 있거나, 앞으로 그쪽을 공부할 분에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하여 책임감을 갖고 번역했습니다. - 양병찬 -

 (나만의 유전자) 간지나는 서문

작년 가을 나를 사로잡았던 책, 『나만의 유전자(원제: The Copmatibility Gene)』! 대중 면역학서의 새 장(章)을 엽니다. (여기서 'Copmatibility Gene'란, 장기이식과 관련된 주요조직적합유전자복합체Major Histocompatibility Complex 또는 간단히 엠에이치씨 유전자MHC gene를 말합니다.)

영국의 엘리트 과학자가 쓴 책이라 차원이 다르군요. 간지나는 서문 다시 한번 읽어보시렵니까?

▶ 시골에서 온 남자가 열려 있는 성문 앞에 서 있다. 남자는 문이 어디로 통하는지 궁금해하며 안을 기웃거린다. 그때 추레하고 힘이 세 보이는 문지기가 나타난다. 남자가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자, 문지기는 지금껏 아무도 그 문으로 들어간 적이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남자가 들어가려는 시늉을 하자, 문지기는 자기를 이길 수 있으면 들어가 보라고 말한다. 게다가 자기는 일개 말단 문지기이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힘센 문지기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남자는 결국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문 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하며 몇 십 년을 성문 앞에서 지낸다. 마침내 죽을 때가 가까워져서야, 남자는 문지기에게 뭘 물어봤어야 했는지 깨닫는다. 남자는 쇠약해진 몸을 겨우 이끌고 문지기에게 다가가 묻는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나 말고 이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이유가 뭐죠?” 그러자 문지기는 이렇게 대답하며 총총히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 문은 오직 당신만을 위한 거니까. 하지만 이젠 너무 늦었소.”

이상은 프란츠 카프카가 1914년에 쓴 『법 앞에서』라는 단편소설의 줄거리로, 나중에 그의 장편소설 『소송』의 제9장에 삽입되었으며, 1993년 상영된 앤서니 홉킨스 주연의 영화 <심판>에도 등장했다. 여러 가지 버전이 있고 사람에 따라 해석도 구구하지만,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이야기를 종종 머리에 떠올리곤 한다. 첫째, 나는 과학자이므로 지금까지 아무도 들어가보지 못했던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늘 간절하기 때문이다. 둘째, 너무나 당연해서 항상 잊기 쉬운 사실, 즉 우리 몸을 분자수준까지 파헤치고 들어가보면 우리들 각자는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도 이 두 가지 이유와 관련되어 있다. 나는 지식의 새로운 성城에 들어가기 위해 분투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그들의 성취를 기반으로 하여 우리 자신의 특이성uniqueness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대니얼 데이비스 지음, 양병찬 옮김, 생각의힘 펴냄, 153☓225 320쪽  

값 16,000원 2016년 3월 21일 발행 ISBN 979-11-85585-21-5 (03470) 

저자 대니얼 데이비스는 맨체스터대학의 저명한 면역학 교수다. 저자는 괴팍하면서도 치열했던 이 분야 연구자(혹은 연구팀)의 분투를 면역 이론과 함께 연구사로 잘 엮어내고 있다. 자칫하면 전문성의 틀에 갇혀 소수만을 위한 책으로 전락할 뻔한 책을 필수 대중 과학서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21세기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이 거의 80세 가까이 다가가고 있지만, 1세기 전만 해도 인간은 그렇게 오래 살지 못했다. 유럽이나 미국이라고 해도 평균수명은 40세를 조금 넘긴 정도였다. 지난 1세기 무슨 일이 있었기에 평균 수명이 두 배 가까이 늘었을까? 이 책은 그걸 가능케 한 지난 60년간에 걸친 면역학 혁명을 집중 조명한다. 

미생물 즉 세균에 의해 병이 감염된다는 것은 오늘날 누구나 아는 상식이지만, 인류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불과 150년이 채 못 된다. 19세기 후반에 파스퇴르와 코흐 같은 과학자를 통해 확증된 이 사실에 기반해 공중 위생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상ㆍ하수도 시설, 항생제 발견 등으로 영아사망률이 낮아지면서 인류의 수명이 증대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 20세기 중반에야 비로소 체내의 면역 시스템이 우리를 세균에게서 보호할 수 있다는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60년 노벨생리의학상은 면역 메커니즘을 발견한 공로로 호주의 프랭크 버넷과 영국의 피터 메더워에게 돌아갔다. 메더워는 화상으로 인한 피부이식 과정에서 자가이식의 경우 효과가 좋고 타인의 피부를 이식하는 경우 거부반응이 자주 일어나는 사실에 착안해 면역반응을 규명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세포의 면역 반응은 개개인의 유전적 구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도 밝혔다. 인체 조직은 외부 물질을 인식하고 유해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아야 한다. 버넷은 ‘인간의 면역계가 자기를 비자기와 구별함으로써 작동한다’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으며 항체와 면역, 클론 선택 등에 관한 이론을 정립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DNA 이중나선의 구조가 밝혀진 이후 본격적인 분자생물학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곧이어 유전자 혁명도 시작되었다. 일부 연구자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유전자와 질병을 일대일로 연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금세 무너졌다. 인간에게는 약 2만5,000개의 유전자가 있지만 이 유전자가 전반적으로 비슷해도, 개인적 특징을 부여하는 부분은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다양성과 차이를 만들어내는 유전자를 면역학에서는 MHC유전자라고 하며 저자는 이를 편의상 적합유전자라고 부른다. 적합유전자의 발견은 면역학 연구의 비약적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저자는 유전자에 대한 통속적 오해와 편견 다음과 같이 일침을 가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남들보다 더 좋거나 더 나쁜 적합유전자를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시 말해서 면역계에 어떤 서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질병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며 진화하는 과정에서 현생 인류의 적합유전자는 매우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전자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현대생물학이 우리에게 선사한 가장 큰 깨달음이다.” 유전형에 따른 맞춤치료가 가능해지는 적합유전자의 시대가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 이형열, 과학책 읽는 보통사람들 운영자

 

우리의 몸은 어떻게 질병에 맞서 싸울 수 있나? 외부로부터 세균이 침투했을 때 내 몸이 이에 맞서 싸우려면 무엇보다 나의 세포(자기, self)인지, 아니면 외부로부터의 이물질(비자기, non-self)인지를 알아내야 한다. 이 질문에 답을 제시하는 과학이 바로 면역학(immunology)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일류 면역학자인 대니얼 데이비스는, 나만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를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유전자(적합유전자 또는 MHC 유전자)를 전면에 내세워 ‘자기와 비자기의 투쟁’으로 면역을 설명한다.

 

면역학의 역사는 멀리 파스퇴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면역에 대한 개념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오늘날에는 일반인들도 세균의 개념을 알고 있지만, 그렇지 못했던 과거에는 미아스마라고 불리는 독성 증기나 악령의 분노 또는 네 가지 체액의 불균형 등으로 인해 질병이 생겨난다고 여겨졌다. 이런 상황에서 파스퇴르는 유명한 S자 형태의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매우 작은 생명체가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어 1876년 로버트 코흐(1905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는 ‘미생물이 사람에게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메더워와 같은 해에 노벨상을 수상한 호주의 프랭크 버넷(버넷은 면역관용 가설을 제기했고, 메더워는 이를 증명하여 노벨상을 공동 수상)은 인체가 자기와 비자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버넷은 ‘항체’에 집중했는데, 다만 항체가 수많은 종류의 세균을 인식하면서도 자기의 세포나 조직을 공격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해야 했다. 버넷은 닐스 예르네(1984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가 제시한 가설을 약간 수정하여 그 유명한 클론선택이론을 제시했다.

 

적합유전자는 왜 나만의 유전자가 되었나?

1960년을 전후하여 장 도세(1980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는 여러 번 수혈받은 적 있는 사람들의 혈청이 몇몇 다른 사람들의 백혈구에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수혈받은 사람의 면역계가 한번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비자기 세포를 만나 반응하기 때문이었다. 같은 시기에 미국의 로즈 페인과 네덜란드의 욘 판 로트는 자녀를 여럿 둔 엄마들이 수혈을 받다가 쓰러지는 사례에 주목했다. 이것은 여러 번의 출산 과정에서 아기 아빠로부터 유래한 비자기 단백질을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었다. 이 세 연구자들이 독립적으로 발견한 연구 결과는 인간에게 다양성을 부여하는 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적합유전자였다. 그리고 이 적합유전자의 형질은 피부, 머카락, 눈색깔 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그렇다면 적합유전자는 왜 그렇게 다양한 것일까? 단지 이식을 까다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 진정한 역할은 무엇일까? 1973년 피터 도허티와 롤프 징커나겔(1996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은 적합유전자가 이식의 적합성만이 아니라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면역 반응까지도 조절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들은 자신들의 발견이 시사하는 점을 설명하면서 ‘면역계가 변형된 자기를 인식함으로써 작용한다’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즉, 인체의 적합유전자 단백질이 바이러스에 의해 변형되면, 면역계가 이를 ‘변형된 자기’로 감지하여 질병의 징후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도허티와 징커나겔은 ‘만약 바이러스를 감지하는 과정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바이러스가 인체에 침입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천재적인 가설을 제시했다. 달리 말해, 인간이 적합유전자의 다양성을 진화시킴으로써 많은 사람이 동시에 바이러스로부터 피해를 볼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하버드의 비요르크만, 와일리, 스트로민저 세 명이 적합유전자 단백질의 구조를 밝혀냈는데, 이는 마치 유전학에서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한 것에 비견되는 발견으로 간주된다.

 

사랑, 마음, 임신에도 영향을 미치는 적합유전자

적합유전자는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상대에도 영향을 미친다. 급진적인 연구들은 DNA 분석을 통해 자녀에게 양질의 유전자를 물려주고 오르가즘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상적 배우자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아직 미지의 영역인 뇌에서도 면역계 단백질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특히 우리가 병에 걸렸을 때 슬픈 느낌이 드는 것은 면역계와 신경계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제기되고 있다. 임신의 성공 여부에도 적합유전자가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적합유전자는 이처럼 다양한 측면에서 우리의 생로병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적합유전자의 이러한 다기능성은 삶의 다양한 측면들이 궁극적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이 질병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시킨 면역계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가 된다.

 

21세기 의학이 갈 길

적합유전자의 특징과 역할을 깊이 이해하고 그에 관한 논쟁을 해결하는 것이 단지 학문적 관심사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예를 들어, 어떤 질병에 대한 반응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다면, 특정한 약물에 대한 반응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멀지 않은 미래에 적합유전자에 따라 맞춤형으로 처방되는 백신 또는 치료제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적합유전자의 비밀을 규명하는 것이 21세기 의학의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차례

옮긴이의 글: 면역학의 기초

 

 

2장 사상가 버넷과 클론선택이론

3장 죽었지만 살아있는

4장 마침내 풀린 수수께끼

 

2부 적합유전자 연구의 최전선

5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 간의 차이

6장 맞춤형 의료로 가는 길

7장 잃어버린 나를 찾아라

 

3부 적합유전자와 사랑, 마음, 임신

8장 냄새나는 티셔츠와 성적 취향

9장 병에 걸렸을 때 슬퍼지는 이유

10장 임신의 역설

 

에필로그: 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들

 

전문 면역학자들에게

주석

찾아보기

 

지은이 - 대니얼 데이비스

영국 맨체스터 대학교 면역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그 전에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면역 시스템을 연구했다. 「네이처」, 「사이언스」 등에 100편이 넘는 학술 논문을 기고한 일류 과학자이며, 또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과학 저술상(Science Writing Prize)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2011년에는 영국 의학회 펠로우로 선출되었다.

 
옮긴이 - 양병찬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기업에서 근무하다 진로를 바꿔 중앙대학교에서 약학을 공부했다. 약사로 활동하며 틈틈이 의약학과 생명과학 분야의 글을 번역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과 포항공과대학교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의 지식리포터 및 바이오통신원으로, 「네이처」, 「사이언스」 등에 실리는 의학 및 생명과학 기사를 실시간으로 번역·소개하고 있다. 번역한 책으로는 『영화는 우리를 어떻게 속이나』, 『곤충 연대기』, 『가장 섹시한 동물이 살아남는다』, 『센스 앤 넌센스』, 『리더에게 결정은 운명이다』, 『잇앤런』 등이 있다. 그의 페이스북에는 매일 아침 다양한 최신 과학 기사들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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