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인간론의 기초가 무너지면 편중된 인간론을 가질 수 있다.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 대표한우리교회 담임목사 Senior Pastor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음 / 동아대학교 환경공학과에서 대기오염 수질오염 전공

1.인간론의 중요성

“인간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인류의 존재와 더불어 늘 있어왔던 질문이며 오늘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로 대두되어 있습니다.

판넨베르크 같은 사람은 “우리는 인간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정도 (W. Pannenberg, Was ist der Mensch?, 허혁 역, ‘인간이란 무엇인가’ 성광문화사, p.1)로 인간론에 관한 이 시대의 관심은 뜨겁습니다. 그러나 근래의 인간론의 경향은 모든 영역에서 철학자들, 사회학자들, 심리학자들, 의학자들, 윤리학자들, 문학가들이 나름대로의 대답을 찾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그 노력이 인간에 대한 궁극적 실체나 존재론에 관한 관심 보다는 인간자체를 신적존재로 부상시키는 인본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은 존재합니다. 존재하기에 그 기원에 대하여 회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적이고 존재론적 대답들은 보류하고 단지 인간이 실존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에만 집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런 인간에 대한 현실들을 인식하면서 어떻게 성경이 말하는 인간에 대한 바른 지식과 그에 근거한 바른 믿음의 태도와 삶의 교훈을 배울 수 있는가?하는 것이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내용입니다.

2.인간론에 대한 세 가지의 태도

인간론을 공부할 때 주로 다음 세 가지의 태도로 연구해왔습니다. 첫째는 철학적 연구에서 비롯된 관념론적 인간론이 있고, 둘째는 인간을 자연과학적인 방법으로 이해해보려는 물질주의적 인간론이며, 셋째는 성경에 근거해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는 기독교적 인간론, 성경적 인간론이 있습니다.

1)관념론적(Idealistic) 인간론

고대 희랍철학의 이원론에서 유래된 것으로 철학적 인간론의 결과라고 볼 수 있는데 인간은 근본적으로 정신이며, 육체는 인간의 근본적 본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생소한 부분이라는 견해입니다. 예를 들어 플라톤은 사람에게 있어서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사람의 지성(이성)일 뿐이며 이 지성(이성)은 인간 안에 있는 신성의 불꽃으로 육체가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육체는 우주의 실체 중에서 가장 저급한 질료(물질)를 취한 것으로 정신에 대해서 방해물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료(물질)가 없어야만 사람은 더 고급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죠.(플라톤은 인간을 육체와 결합되지 않는 순수한 이데아적인 부분과 육체와 결합된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이원론적 존재로 규정한다. 그는 영혼만이 중요한 인간의 실체이며 육체는 비본질적인 것이며 무가치한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이런 견해는 영혼의 불멸성은 가르치나 육체의 부활은 부인하게 됩니다. 또한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를 인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초대교회의 영지주의 이단이 그러한 경우입니다.

2)물질주의적(materialistic) 인간론

자연과학적 인간론으로 부를 수 있는 이 견해는 어쩌면 오늘날 가장 팽배해 있는 인간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오직 물질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외의 정신적, 감정적, 영적 삶이란 인간의 물질적 구성의 부산물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막스주의자에게 있어서 인간은 단순히 자연의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론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치 못할 일이며 창조주의 존재마저도 부인되기에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책임의식이니 윤리적 지상명제이니 하는 개념은 있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들은 인간은 사회구조의 한 부분일 뿐이라 생각하기에 인간의 악도 사회구조로부터 발생하기에 사회구조의 변경을 통하여 해결하거나 제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개인은 자기가 행하는 악에 대하여 일차적 책임을 지지 않고 사회가 그 책임을 다 지게 되는 것입니다. 막스주의에 있어서, 인간이란 한 인격적 개인으로서 중요성을 갖지 못하며 오직 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만 그 가치가 인정됩니다. 오늘날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간행위를 결정짓는 요소가 인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스키너의 주장도 그런 경우입니다. (안토니 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기독교 문서선교회, P11)

3)성경적 인간론

위의 두 종류의 인간론이 현상적이거나 경험적이거나 귀납법적으로 인간을 이해하려 한다면 성경적 인간론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에 근거해서 인간에 관한 우리의 물음과 해답을 찾고자 하는 연역적 방법으로 인간에 접근합니다. 성경적 인간론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지 않고서는 인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인간론 연구 목적 자체를 인간을 배움으로 하나님을 더 알고 그를 경외하며 더욱 깊이 섬기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관념론적 인간론이 인간의 “영혼”, “정신”, “이성”에만 강조점을 둔다면 막스나 스키너의 견해로 대변될 수 있는 물질적 인간관은 인간의 육체적 측면만을 절대화시키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간론들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간실존의 의존성 내지 책임성을 제쳐놓고 있으므로, 우상숭배의 죄책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인간에 관해 가르치고 있는 교훈에 주목하면서 성경적 인간론이 어떻게 비기독교적 견해들과 다른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적 인간관이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는가에 관한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이해는 모순과 파라독스로 가득 차 있다. 인간이 선한가하면 악하고, 강한가하면 약하고, 제한되어 있는가하면 초월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인간을 자연주의적 이해와 이성주의적 이해, 심리학적인 이해로만 인식할 수 없다,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고 우주의 끝을 지향하며 순간적 존재이지만 영원을 사모한다. 이러한 모순적이며 역설적인 인간을 가장 완전히 설명하는 것은 성경의 인간관뿐이다. 다른 인간이해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풀지 못한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성경적 인간론을 말하면서도 비기독교적 개념들이 잠입되어 들어오는 현상들입니다. 예를 들면 중세의 스콜라주의적 인간론이 그러했습니다. 스콜라주의적 인간론은 아리스토 텔레스적 철학에서 발견되는 관념론적 인간관에다 기독교적 인간론을 종합화 시키려 했던 경우로 “육체의 죄들”(간음과 같은 죄)은 “영적인 죄들”(자만, 시기, 자기중심적 이기심, 인종차별주의 등)보다 한층 더 중대하다고 생각했지 않습니까? 특별히 심리학의 득세 속에서 인간론마저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교회 안에서도 대세를 이루고 있는 현상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심리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드는 인간의 성격구조를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는 원초아(id)와 정신적 구성요소인 자아(ego), 그리고 사회적 구성요소인 초자아(Super ego)로 이루어져 있다고 정의하면서 원초아(id)는 무의식 속에서 충동과 욕구 등이 정신에너지인 리비도(Libido)에 의해 밖으로 나오려하지만 자아(ego)가 이를 지성적, 합리적으로 통제하고, 초자아(Super ego)는 도덕적이며 법적인 것으로 이상과 완전을 추구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프로이드에 의하면 인간은 태어나서 5년간의 정신성정(Mentel-sexual)체험들에 의해 이러한 비합리적인 힘들. 무의식적인 동기들, 생리적 본능과 욕구와 필요들이 결정됩니다. 그러하기에 인간의 마음속에 우연이나 실수는 있을 수 없으며 인간의 원초적 욕구인 리비도(Libido)가 각 단계에서 만족할만한 성숙을 거치게 될 때 원만한 성격과 타인에게 애정, 친절, 사랑을 베풀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이상 성격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프로이드의 이러한 인간이해는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며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써 성경적 인간이해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의식이 본래적인 요소이고, 무의식은 의식의 하치장이라고 본 프로이드와는 정반대로, 융은 무의식이 본래적인 요소이며, 의식은 사람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 적응을 돕기 위해 무의식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융에 의하면 의식은 무의식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언제라도 무의식에 휩싸일 수 있는 불안한 상황에 있습니다. 융은 무의식의 창조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마음은 의식과 무의식의 상호보완 작용에 의한 자동 조절적 체계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의식의 중심을 자아(ego), 인간 마음의 중심을 자기(self)라고 부르고 그 마음의 표현을 페르소나(Persona)-가면, 태도, 행동-라 정의합니다. 또한 그는 무의식을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나누면서 인간의 무의식에는 개인을 초월한 민족적 인류적인 보편적 무의식이 있고 개인적인 정신활동은 이 보편적으로 무의식으로부터 정신에너지(Libido)를 얻어 창조성을 발휘한다고 합니다. 융의 이러한 인간이해도 성경이 말하는 인간이해와 전혀 다른 정의로 수용할 수 없는 인간론입니다. 현대 심리학이 프로이드와 융에서 발발했다는 사실을 유념할 때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만연하고 있는 심리학적인 상담과 내적치유는 반드시 성경적으로 검토되어야 합니다. 성경적 인간론이 더욱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3.인간의 기원

인간의 기원이 하나님의 창조라고 하는 것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성경적 인간론의 기본적 진리입니다. 성경적 인간론은 창조로부터 인간의 성격을 규정합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위협하는 진화론의 도전은 거세기만 한데 정작 사람들은 다윈이 임종 시 자신이 만든 진화론을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죽음에 임해서 다윈은 호프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미숙한 개념을 알고 있었던 젊은이였소. 나는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시도해보고 언제나 모든 문제를 찾아 헤매었다오. 그런데 나 스스로도 놀랍게 그 개념들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고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종교를 만들어 버렸다오. 내일 오후 몇몇 소작인들과 이웃을 모을 테니 그들에게 말씀을 좀 해주시오. 무엇에 대해 말하길 원하는지 호프부인이 물었을 때 다윈은 분명한 목소리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하여" 그리고 이어 낮은 목소리로 덧붙여 말하기를 "그리고 나의 구원에 대해 말해주시오.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주제가 아니겠소?" 다윈의 임종과 관련된 신앙고백의 내용은 니켈 리가 1916년 3월2일자, Bombay Guardian지에 실린 글을 인용한 것으로 Enoch, Evolution or Creation(London: Evangelical Press, 1968 pp.166-167)을 재인용한 것이다. 최홍석, 인간론, p 42-43)

4.인간의 성격-피조 된 인격체

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의 성격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가장 기본적이고도 우선적인 정의는 'created person', 인간이 피조 된 인격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율적 혹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이 인간의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창1:1,27).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인간론을 시작하는 기본이고 기초적인 믿음인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느9:6, 행17:25-28).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서는 숨 쉬는 것조차 불가능하며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는 의존적 존재입니다. 반면에 사람은 피조물뿐만이 아니라 인격체입니다. 인간이 인격체라 함은 외부의 힘에 의해 만사가 결정되는 로봇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는 힘과 방향을 설정하는 힘을 가진 독립성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인격체는 결단력을 지니며, 목적을 세우며, 그 목적을 향하여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자유를 소유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가진 독립성은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 독립성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인간은 피조물인 동시에 하나의 인격체, 곧 피조 된 인격체인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피조물인 동시에 인격체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사람의 신비입니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고 말 한마디조차 내뱉을 수 없으나 인격체로서 나는 나의 손가락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며 내가 말하고자 할 때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진흙에 불과 하며 하나님은 토기장이시지만(롬9:21) 인격체로서 우리는 우리의 결단들로 우리의 삶을 설계해 나갑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함과 동시에 우리가 인격체로서 누리는 결단의 자유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신비로울 뿐입니다.

모든 비기독교적 인간학은 인간의 피조성을 거부하며, 모든 결정론적 인간학은 인간을 마치 하나님이 줄을 잡아당기거나 버튼을 눌러 조종하는 꼭두각시나 로봇으로 생각하여 인격체로서의 인간을 나타내지 못하기에 우리는 사람의 피조성과 인격성을 함께 가르치고 있는 성경적 인간론을 지키고 가르쳐야 합니다.

설령 우리의 사고로써 이 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의존성과 인격체로서의 자유가 서로 공존한다는 사실을 성경은 부단히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수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 둘 중에 어느 한 부분이라도 부인할 경우 성경적 인간론의 기초가 무너지고 편중된 인간론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피조성만을 강조하고 인격성을 경시할 경우 무분별한 결정론에 빠지게 되어 인간의 인격성 자체를 상실하게 되며, 반대로 피조성을 제외한 인격성만을 강조하였을 때 사람 자체가 신성화되며,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은 밖에 서신 채로 속수무책이시게 되는 것입니다.

(저스티누스를 비롯한 일단의 동방교부들이 자유의지를 강조하게 된 것은 당시 자유의지를 극단적으로 부정했던 영지주의에 대한 반동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죄를 인간본성의 유전적 부패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행하는 자기 결정의 결과로 인간의 책임적 국면에 더 강조점을 둔 결과는 결국 펠라기우스의 길을 열어준 것으로 드러난다. 이와 달리 이레니우스는 죄의 보편성이 모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의 타락과 원죄의 영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함으로 어거스틴 주의의 길을 닦아 놓았다고 볼 수 있다.)

한 해를 돌아보며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임원들이 이은성 목사와 함께 부부동반으로 함께 모였다. 포럼을 응원하면서 한 집사께서 귀한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덕분에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어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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