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구 목사 푸른초장교회 담임(1996- ), 대신대를 거쳐 총신대에서 교회사 전공으로 Ph.D 학위취득 , 교갱협 목회분과위원, 푸른초장공공도서관 관장, Calnet 초대사무총장 역임

우리는 지난번 ‘번역이 종교개혁을 가져왔다’는 제하의 글을 읽었다. 분명 종교개혁에서 번역이 가져다 준 영향을 배제할 수 없겠지만, 왜 종교개혁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은 교회의 타락에 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중세(The middle age)를 일컬어 종종 암흑기라고 부르는데, 이런 표현을 처음 쓴 사람은 이탈리아의 계관시인 프란치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였다. 바로 교회의 타락이 중세를 암흑기로 물들였던 것이다. 교회사(敎會史)에서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와 근현대교회사의 중간에 위치한다.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까지의 역사에서 몇 가지 중요한 사건 중에 A.D.313년의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칙령(Edict of Milan)을 들 수 있는데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을 받는 순간이었다.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동방의 리키니우스 황제가 공동명의로 내린 밀라노 칙령은 수 백년 동안 많은 황제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온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박해받던 기독교는 특혜받는 기독교로 입장이 바뀌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이때부터 교회 타락의 역사는 시작된다. 권력과 돈이 들어가고 몰리면서 타락은 가속화되고 조직화되고 신학화 되었다. 박해기간 동안 쌓았던 경건의 능력은 무너지고 교회의 첨탑은 높아만 갔다. 특히 콘스탄티누스는 하나의 제국(one Empire), 하나의 법(one Law), 하나의 시민(One Citizen), 하나의 종교(one Religion)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는데, 소위 기독교 세계와 교회에도 정치성이 도입되었고 이는 교황제도의 신호탄이 되었다. 기독교 공인 이후 교회는 방대하게 커졌고,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디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교구 등의 이른바 거대교구들의 감독들이 정치적 수위권을 다투게 된다. 이런 수위권 다툼은 제국의 수도가 로마라는 이유로 행정상의 구분에 불과하던 교구의 차서가 교회의 수위권으로 오해되고 고착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타락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교황, 사제, 수도사들이었다. 8세기 이후 교황은 세속 군주화되었고, 사제들은 주교제후(Prince bishops)로서 자신은 주교로서는 독신이지만 봉건 제후로서는 기혼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수도원 역시 가난한 수사들의 집이 아니라 부요하게 되어 약탈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칼을 차고 대비하였고, 시류에 편성해 교황들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쇠퇴와 함께 교회의 몰락이 시작되었고, 14세기부터 재정이 악화된 교회는 교구와 수도원으로부터 돈을 쥐어짜기 위한 온갖 수단을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십자군 운동은 이런 분위기를 더욱 가속화 시켰다. 상업은 부활되었고, 화폐가 교환수단으로, 교회의 재원 역시 현물세입에서 금전세입으로 바뀌었다. 이른바 교회의 바벨론 포로기(1305-1378)가 지나면서 아비뇽의 교황들은 교황청 금고를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돈을 끌어 모을 수 있다면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이때 면죄부(indulgences)가 도입되었다. 이 제도는 십자군 전쟁 기간에 성전(聖戰)에 참여한 병사들에게 그 대가로서 그들이 고국에 그대로 머물러 고행제도가 요구하는 보속(補贖)을 실천했을 경우 받게 되었을 일체의 면죄를 허락해주기 위해 시작되었다.

그 다음 단계로서 십자군 전쟁에 종군할 수 없었지만 이를 위해 금전을 기부했던 사람들에게 특전처럼 면죄를 베풀게 되었다. 이런 시혜는 확장되어 병원, 교량, 성당과 각종 건축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발행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잉여공로(superflous credits)로 하나님의 보물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교회가 가진 공로를 교황이 자기 죄 값을 치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자유로이 전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론은 점점 발전하여 마침내 연옥에 갇혀 있는 죽은 자들에까지 확대되어 그들의 형기를 삭감내지는 완전 면제해 줄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실로 살아있는 신자들에게서도 돈을 걷고 죽은 자들에게서까지 돈을 걷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던 것이다. 이 결과 아비뇽의 교황들은 프랑스 왕이 징수하는 국세보다 3배나 더 많은 돈을 면죄부로 거두어들였다. 이와 같이 성직과 사죄를 매매하는 장면이 중세교회의 마지막 얼굴이다. 중세교회는 권력과 돈에 눈이 먼 교회였다. 바로 무지와 타락의 모습이었다. 무지라는 것은 면죄부가 왜 성경에서 벗어난 것인지를 몰랐다는 것이요, 타락이라는 것은 거룩과 성결을 돈으로 거래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다시 500년 만에 우리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이고서 들판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종교개혁은 오늘 교회를 향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신자와 교회는 권력과 돈으로부터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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