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물결플러스 신간소개

<아론의 송아지>

토목공학자가 이렇게 글을 잘 쓰면 전문작가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매 장을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흥미를 끄는 필력이 돋보인다.

부제 [젊은 지구론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에 맞게 논리적 설명과 과학적 지식, 적절한 비례가 균형을 이룬다. 나열식인데도 글의 흡입력이 좋아 흠이 보이지 않는다.

 

<불온한 독서>

탄핵정국에 국가와 개인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기

나는 국민으로서 살고 있는가 온전한 개인으로서 살고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책이었어요.

불온한 독서로 온전한 개인으로 거듭나는 독서 추천!

 

<알라를 찾다가 예수를 만나다>

싸움 이전의 삶

제목만 봐도 쉽게 추측할 수 있듯이 한 무슬림의 회심기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이 도서는 단순한 변증서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순함이란 논쟁에 필요한 정보가 풍성하게 나열되었다거나 효율적인 방식으로 집약되어 기술되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고도로 집약된 신학적 논쟁이나 놀라운 체험이 벌어진 현장의 기록이 아니기에 도서명을 보고 책을 집은 독자라면 첫 장부터 실망할 확률이 높다.

이슬람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함께 개인의 회고록처럼 진행되는 앞부분만 본 독자라면 책이 본 목적을 상실했다고 평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는 첫인상의 결정을 조금만 유보해주기를 단연코 바란다. 저자가 끊임없이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인내했던 것만큼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는 책을 통해 혐오와 배제에 익숙한 우리에게 대화하려면 먼저 상대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고 존중은 상대를 알아야 할 수 있다고 설득하는 중이다.

사람의 이야기

사실 저자 나빌 쿠레쉬의 저술 방식에는 확실히 독자의 호흡을 빼앗을만큼 담담한 매력이 있다. 세세하게 써내려가는 문체 덕에 글에 입체감이 생겨 몰입하게 된다. 들려주는 이야기에 몰두한 채 한 장이 한 절이 되고, 절이 모여 굵직한 한 이야기가 맺어질 즈음에 필자는 책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 느꼈던 이슬람 전통과 성장기를 지켜주던 가족과 공동체의 모습을 꾸밈 없이 묘사하는 방식으로 본인이 겪은 (회심을 포함한) 모든 경험이 종교전쟁이나 피상적인 논쟁과 멀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각 종교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논박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지만 자극적인 표현보다는 담담한 어조로 믿을만한 논증의 경험들이 기술된다. 그의 시도는 따라서 시의적절하다는 면에서 적절해 보인다. 책의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이야기를 접하는 불특정 독자와 싸우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도리어 진리를 찾으려는, 때로는 유쾌하지만 두렵고 진지한 여정을 최대한 상세히 기록하면서 종교 너머에 있는 한 인간 충실히 그려낸다.

우정 안에서 피어난 진리

신뢰할 만한 책의 분위기는 나빌이 대학에서 만난 데이비드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그 농도가 짙어진다. 완독한 후에 저자에게 미친 영향을 알아차리는 발견은 독자에게 큰 기쁨이 되기도 하는데 그가 독자를 배려하려 책의 곳곳마다 배치해 놓은 장치는 분명 데이비드와 쌓은 우정의 산물이기 때문이라 생각해서였다. 타문화권 출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슬람의 문화를 설명하고 무슬림의 회심과 그 전과 후의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도록 돕는 세세한 설명이 등장한 배경에 친구의 마음씨가 한 몫 차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실제로 가족 다음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람은 데이비드인데 그를 그려내는 저자의 시선이 믿을만 하다면, 그의 태도가 저작방식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데이비드라는 인물이 자신과 다른 사실을 진리로 믿는 저자에게 보여준 친절한 태도와 진심을 다하는 성품, 사려깊은 배려를 고려해 볼수록 기독교인들의 대화가 어떠해야할지 고민하게 된다. 특별히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 간의 대화가 어떻게 우정 안에서 오고갈 수 있는지 마음 깊은 울림과 당혹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기도 한다.

일하시는 하나님을 찾자

당혹스러움이란 '이것은 무슬림만의 문제가 아니다'에서 시작한다. 각 장을 넘길 때마다 나빌이 조우하고 누린 우정에 미소짓다가도 쓴웃음을 남겨야만 했던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그가 솔직하게 남긴 (자신을 포함해 이슬람의 전통 안에 뿌리 내린) 무슬림의 완고함은 한국 땅의 기독교가 지닌 신앙과 닮아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슬람을 이해하려는 최초의 시도도 없이 선을 긋고보는 혐오의 선봉장 노릇을 기독교가 나서서 자처하는 현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진리에 관하여 진지한 질문과 토론을 무슬림인 자신에게 친절하게 제안해 온 그리스도인이 없었다는 저자의 지적이 한국의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데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비판하는데 중점을 두지 않는다. 여전히 담담히 무슬림이었던 때의 기억을 담담히 서술함으로써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한국인 그리스도인으로서 느끼는 필자만의 오해였을지 곡해였을지는 알 길이 없을 것 같다.

다만 저자가 두 종교에 속한 모든 이들에게 던지는 제안은 분명해 보인다. 이 제안은 지성을 이용하여 진리를 향한 탐구와 검증을 시작하고 포기하지 말라는 촉구다. 내가 믿는 것이 정말 진리라 생각하는 더 뚜렷하고 더 나은 설명을 찾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리 안에서 누릴 풍성함과 참된 위로를 보고 느끼고 이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재차 찾으라 한다.

붙이는 말

본서에서 지은이가 들려준 이야기에 대한 순수한 감정을 글의 말미에 적는 이유는, 이 책이 지닌 진정성과 공정함이 가리워질지 모르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사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감탄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저자가 얼마나 용기를 내야했는지, 그 노력과 결심의 결정체를 소개하는 책의 표지를 보며 다시 상기해보았다. '알라를 찾다가 예수를 만나다.' 어떤 열정이 알라를 찾는 영혼에게, 예수를 만나기까지 소진되지 않는 힘을 불어넣었는지 감히 짐작하지 않으려 했다. 여전히 생소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놀라웠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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