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손에 습관처럼 들려진 핸드폰보다 주님 손을 더욱 붙잡고

김에스더 목사, †he 2nd Life Foundation, 뉴욕퀸즈교회 Pastor Esther Soo-Gyung Kim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립보서 3:12-14 )

 

새해를 맞으며 그 동안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지 못한 크리스천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말씀을 가까이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독자의 편에서 글을 써 본다. ❈편집자 주 : 필자의 글 쓴 의도를 위해 ‘구어체’ 를 그대로 인용한다.

 

현대인들 중에 핸드폰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들은 핸드폰을 마치 자기의 분신이나 그림자처럼 갖고 다니는데, 마치 손에 핸드폰이 없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보이지 않나요?

만약 화장실에 다녀올 일이 있어도 핸드폰을 갖고 가지 않으면, 그 순간에 누군가가 나에게 연락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전화를 받지 못할까봐 볼일도 마음 편히 보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거나 배터리가 나가기만 해도 충전기에 꽂는 그 사이에 누군가로부터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서두르는 모습을 봅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걸려오는 전화가 꼭 그렇게 중요한 것만은 아니거든요. 핸드폰이 물에 빠져서 못쓰게 되었을 때, 핸드폰을 잃어 버렸을 때 느낀 건데 핸드폰이 없으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 이것이 바로 자유함이구나!"라고 외치는 저 자신을 보았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자유함도 아주 잠깐, 또 다시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는 거예요. 왜 그것을 놓지 못하는 것인지, 왜 그것을 그렇게 붙잡고 있어야만 하는지, 그것을 내려놓으면 얼마나 날아갈 것처럼 자유로운데... 아무도 나를 구속할 수가 없는데...

우리는 스스로 구속당함을 선택하여 살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밥을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옷을 입혀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놓지 못할 정도로 사랑하는 대상도 아닌데, 그것은 사랑도, 믿음도, 소망도, 생명도 없는 하나의 물질일 뿐인데 왜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는지 답이 나오지 않는 거예요.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디에나 들고 다니고 묵상하며, 성경을 읽지 못하면 빛이 공급되지 않아서 답답해해야 하는데, 오늘 하루 성경 말씀을 읽지 않았다고 답답하거나 전혀 불안하지도 않거든요. 새벽 예배나 Q.T 또는 말씀 묵상과 기도를 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해도 혹시 밤 사이에 누군가가 보내온 메세지는 없는지,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부터 체크하면서 만약 누가 전화나 메세지를 보내왔으면 보자마자 답장을 하는 나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밤사이에 또는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나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실 텐데, 못 들으면 어쩌나 하는 그런 걱정은 해보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하나님께 문자메세지도, 직접 통화할 생각도 별로 하지 않는 모습, 아니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가끔 급한 일이 생기면 SOS를 쳐서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 줄 소방차가 필요한 정도 여기는 거지요.

그 이상의 연애편지(Love letter)나 감사카드(Thank you Card) 그리고 내 삶 속의 초대장(Invitation Card) 같은 것은 보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내 생일이나 가족들의 축하 파티에 사람들을 많이 초대하지만, 정작 하나님을 초대할 생각은 못했어요. 초대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분이 하나님이었어야 하는데 말이죠.

물론 하나님께 복을 내려달라고 기도는 하지요. 예배도 드리고요. 하나님의 복을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요. 하지만 그런 것은 복을 받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처럼 여겼던 것이지요. 그냥 그렇게 살았어요.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면 그 사람에게 고맙다고 인사는 하지만, 그것이 정작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보내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 하나님께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도 못했고, 보이는 사람에게만 고맙다고 했어요.

누가 문자메세지나 이메일을 보내오면 금방 답장을 보내면서도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을 주시면 금방 답장을 하지 못했어요. 기도의 응답인 줄도 모를 때가 너무나 많았거든요. 내가 잘나서 또는 운이 좋아서 일이 성사된 줄로 착각했었어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통해 이런 저런 메세지를 보내주시는데 그 중에 경고의 메세지가 있어요. 나에게 회개하고 새롭게 살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건 왜 그렇게 듣기가 싫은지 몰라요. 그래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스팸(Spam) 메일로 처리하거나 더 이상 메세지를 보내지 못하도록 차단(Block)해 버리기도 했어요. 말하자면, 핸드폰이나 컴퓨터에게 화를 내고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핸드폰이나 컴퓨터는 무생물이라 괜찮은데, 사람은 상처를 많이 받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사람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주었어요. 나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아버리면서 왜 내 삶이 이러냐고 불평과 원망은 잘 했죠.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라고 만들어 주신 입을 갖고 말이에요. 소금처럼 맛을 고르게 하듯 은혜로운 말을 하라고 한 입으로요. 부정부패가 있는 곳에 소금처럼 방부제 역할을 하라고 한 입으로요.

바로 "교만"해서 그랬어요. 하나님과 말씀을 모르니 교만해질 수밖에 없잖아요? 세상에서는 무엇을 잘하지 못하면 바보라고 하지만 성경에서는 "교만한 자"를 "바보(미련한 자)"라고 하잖아요? 정말 바보처럼 살았어요. 그런데도 성경을 몰라서 자꾸만 세상적인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면서 무언가를 잘 못하면 "바보"라고 핀잔을 주었어요. 이런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교만한 것인 줄도 모르고 또 세상의 이방인들이나 하는 행동인 줄도 모르고 말이죠.

예수님은 형제를 바보라고 하면 지옥에 간다고 하셨거든요(마 5:22). 그렇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줄도 모르고 입방정을 떨었어요. 성경을 보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여주신대요. 높아지고는 싶은 데, 겸손해지는 것은 좀 사양하고 싶었어요. 높아지는 것과 겸손은 어울리지 않잖아요? 다른 사람이 내 앞에서 겸손히 낮은 모습을 보여야 내가 높은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 겸손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높아지지 않나 봐요.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고 가장 낮은 모습으로 성도들을 섬겨주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섬겨주기만을 바랄 때가 더 많았어요.

목사님부터, 장로님부터, 권사님부터, 집사님부터 한 번 섬겨보세요! 그러면 그걸 보고 저도 해 볼테니까. 뭐 그런 자세로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낮은 모습으로 섬기는 지를 판단하고 있었어요.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라"라는 말씀보다는 "남을 나보다 더 낮게" 여기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나요? 정말 큰 일이예요. 새해가 왔는데, 내가 한 언행을 생각해보면 도무지 하나님 앞에 명함을 내밀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닫게 되죠.

주님이 만약 "너 자신을 죽였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남을 너보다 더 낫게 여겼느냐?" "이웃(가족)을 네 몸처럼 사랑하며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사랑하였느냐?" "오른 뺨을 칠 때에 왼 뺨도 돌려댔느냐?"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했느냐?" "가족과 이웃에게 미련하다거나 바보라는 말 대신에 축복과 격려와 권면의 말을 하였느냐?" "분노하는 대신에 손을 들어 기도하였느냐?"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겼느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았느냐?" "두려움을 버리고 믿음의 말을 하였느냐?" "이해가 되지 않아도 무조건 성경 말씀에 순종하였느냐?" "구제는 얼마나 하였느냐?" "기도는 하루에 몇 시간이나 했느냐?" "쉬지 않고 기도하였느냐?" "성경은 하루에 얼마나 읽고 있느냐?" "십일조와 헌금은 제대로 하고 있느냐?" "성수 주일을 잘 지키고 있느냐?" "매일 하나님 앞에 회개와 감사를 하느냐?" "대접을 받고 싶은 데로 먼저 남에게 대접하였느냐?" "하나님이 정말로 전지전능하심을 믿느냐?" "너의 가짜 확신을 갖고 있느냐, 하나님의 은사인 믿음을 갖고 있느냐?" "항상 기뻐하였느냐?" "전도는 얼마나 열심히 하였느냐?" "계획만 세우고, 말만 많이 하고 실제로 한 것이 무엇이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세운 교회를 위하여 얼마나 충성을 다하느냐?"

정말로 이런 것들을 물으신다면 난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부끄러워서 얼굴도 들지 못할 거예요. 내 형편이 지금 너무 힘들고 세상일에 너무 바빠서, 혹시 그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메일을 차단해 놓았던 것은 아닌지 지금 당장 나의 생활을 살펴보아야겠어요. 빨리 회개하고 돌아서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 같아요.

핸드폰처럼 늘 주변에 성경책이나 말씀카드를 가지고 다니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어떨까요? 요즘은 핸드폰으로도 얼마든지 성경을 볼 수 있는데, 성경을 갖고 다니지 않아도 어느 곳에서든지 가능하잖아요? 시간을 때우려고 나의 영혼을 더럽히는 것들을 찾아서 보느라 세월을 낭비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2016년 1월1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지나갔어요. 하나님께서 다시 나에게 새로운 소망의 해를 선물로 주셨어요. "present"라는 말은 "선물"도 되고 "현재"라는 말도 되는데,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지금"이예요. 지금 이 순간을 허송세월하지 말고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엡 5:16, 골 4:5)

핸드폰을 잘 때에도 머리맡에 두고, 화장실에 갈 때에도 갖고 가는 것처럼,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2017년이 되어 2017년은 반드시 주 안에서 말씀으로 승리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핸드폰처럼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메세지를 보내지 않으셨는지를 매일 점검한다면 분명히 선물로 주신 현재를 충실히 살 수 있고, 그것이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기에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올 해에는 꼭 그렇게 살 거예요. 핸드폰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에 의지하고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메세지를 주시는지 항상 살피면서 말씀이 나의 삶이 되고, 나의 삶이 예배가 되어서 내가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 사람들이 확실히 알게 할 거예요. 그런데 그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거예요. 그러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정말 기뻐하실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실 것을 상상만 해도 날아갈 것 같아요. 그저 꿈만 같아요. 그것이 바로 참된 자유함인가봐요. 그 동안 이런 자유함을 모르고 핸드폰만 붙잡고 거기에 구속된 삶을 살았지 뭐예요?

나와 함께 올 한해를 그렇게 살지 않으실래요? 아마 매일 매일이 찬송 속에서 감사가 넘치므로 정말 즐거울 거예요. 세상의 구속함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의 자유함이 있으니까요.

선택의 자유가 있지만, 정말 잘 선택해야 된다는 걸 잊지 마세요!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하니까요. 영생이냐 아니면 영벌이냐? 2017년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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