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이해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다.

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 한우리교회 담임목사 Senior Pastor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 (M. Div.)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특별하게 창조하신 피조 된 인격체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무엇입니까? 수메르와 바벨론의 창조 설화에서는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신들의 멍에를 메고 가기 위한' 것에 있다고 합니다. 즉 신들이 해야 했던 무거운 고역의 짐을 지우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아트라카시스 서사시'(The Atrachasis Epic)에서는 인간창조의 설화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매일 고된 노동의 책임을 진 하층계급의 신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들은 회의를 소집한 후, 인간에게 그 고역을 맡기기 위해 인간창조를 결정하였다. 그래서 신들은 고역의 멍에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인간창조를 축하했다.

수메르에서는 아주 고대로부터 대대적인 민중부역이 있었는데, 그것은 언제나 성전건축과 종교의식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은 바로 이런 부역을 위해, 신들을 섬기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바벨론의 아카드 제국의 창조설화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 제 6편도 같은 내용을 전해준다: 마르둑(Marduk) 신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피를 모으고 뼈를 만들겠다. 내가 야만인을 창조하겠다. 그의 이름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진실로 야비한 인간을 나는 창조하겠다. 그는 신들을 섬기는 책임을 맡을 것이다. 신들이 편안해지도록!" )

그러나 성경은 인간창조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인간이 그 목적대로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질 (본질의 사전적 정의는 “현상 배후에 있는 실재”이다. 그것으로 그것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없으면 더 이상 그것일 수 없게 하는 것이 본질이다. 인간의 본질이라 할 때 다른 피조물과 비교해서 인간만이 가지는 독특한 유일성을 본질이라 할 수 있겠다.) 인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되게 합니까? 호모 사피엔스(이성적 존재, 지혜), 호모 파브르(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호모 로퀴언스(언어를 구사하는 존재), 자기반성, 이성, 영혼, 등등 많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을 놓치면 사람을 바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개념 속에 이 모든 것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1.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증거

기독교 인간학이 가장 중요시하는 인간이해의 열쇠인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성경 어디에서 증언하고 있습니까?

1)구약의 증거

구약은 직접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창세기에 세 번을(창1:26-27, 5:1, 9:6) 말하고 있으며 간접적으로 시8편이 언급합니다. 먼저 창1:26-27에서 동물들은 각기 종류대로 창조함을 받았지만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 곧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고 합니다.

2)신약의 증언

약3:9 “이 혀를 가지고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기도 하고 이 혀를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도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고후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골3:9-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니라.”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등의 구절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2.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진술하는 창1:26-28절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형상’이 ‘첼렘’이라는 단어이고 ‘모양’은 ‘데무스’라는 단어로, 이 두 단어는 라틴교부들과 자연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서로 다른 뜻으로 사용되어진 것이 아니라 둘 다 ‘~과 비슷하다’는 의미로 교차 사용된 단어입니다.(Keil and Delitzsch의 주석, Biblic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1, The Pentateuh, trans. James Martin, p63에서 루터를 인용해서 말하고 있다. 70인 역과 라틴어 번역은 형상과 모양 사이에 접속사를 삽입했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이 두 단어 사이에 접속사가 없다.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의미적 차이가 없다. 창1:26절에서는 형상과 모양이 같이 사용되었고, 27절은 형상으로만 인간창조를 설명하고 창5:1절에는 모양이라는 단어만 사용되고(한글성경은 형상으로 번역) 또 창5:3절에는 다시 두 단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은 두 단어가 같은 뜻으로 혼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레니우스는 창1:26의 형상은 신체적인 특징과 관련시키어 인간의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성품이라고 하고 모양은 영적인 성질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덧입혀주신 신성한 의복이라고 하면서 타락 시에 모양만 잃어버렸지 형상은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건재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이 중세까지 이어져 스콜라주의적 신학자들에 이르러서는 인간이 타락시에 상실한 것은 단지 ‘덧붙여진 은사’뿐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자연주의자들-오리겐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플라톤적인 성향을 가지고 신학 작업을 함, 희랍적이다, 이원론적 사상이 강하다)-은 창1:26-27에서 26절은 계획이고 27절은 실행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26절에 있는 모양이 27절에서 어디로 갔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으로 인간이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이성적 존재가 되었는데 그런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순종하면 그 대가로 모양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 자연주의자들에서도 형상과 모양이 다른 것으로 분리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원래 상태가 어떤 본질을 가졌는가하는 물음에 적극적으로 선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악하지도 않으며 성결하지도 불순하지도 않은 도덕적 중립의 상태로 지음 받았다는 펠라기우스와 같은 주장들이 나타났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은총 없이(자연적으로) 스스로 완전해 질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의 영향은 그 이후 16세기 소시니안파와 17세기 알미니안파, 18세기의 이성주의자, 신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파라다이스를 인간이 창출할 수 있다는 불트만의 소망의 신학도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과 닮은 것이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같은지를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거울이 실체를 반영하듯이 인간은 하나님을 투영하는 존재이며 하나님을 대표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모양대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시켜 주는 유일한 특성입니다.

바빙크는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며 인간의 그 전체성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이해되어져야 한다.”(Dogmatiek, 2:595-6)고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어쩌다 덧붙여진 부산물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무엇이 하나님을 닮았고 무엇이 하나님을 반영시키고 있습니까?

3.그리스도를 통해 본 하나님의 형상-삼중적 관계의 존재

성경은 인간의 어떤 점과 어떤 면이 하나님을 닮았고 반영하는지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형상 개념에 대한 합의가 아직까지는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인간의 무엇이 하나님을 닮았고 반영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골1:15).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있었던 그리스도와 온전히 이웃을 향하여 서 계셨던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서의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그에게 나올 때에 언제나 그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만물을 다스렸습니다.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하게 했고, 물위를 걸으셨으며, 초자연적인 고기잡이를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처럼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의 지상적 삶을 통해 만물의 통치권이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적 요소 중의 하나임을 보게 됩니다.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진 상태, 이웃을 향하여 열려진 상태, 그리고 자연을 통치하는 행위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 인간, 자연이라는 삼중적 관계 속에 존재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하여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듯이 인간도 하나님께 속해 있으므로 그의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야 합니다. 물고기가 물로부터 자유로움을 추구할 때 자신의 생명을 잃게 만들 듯이 인간도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할 때 죄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참되고 옳은 것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인간론은 마땅히 거짓된 인간론으로 배격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은 인간은 다른 인간을 향하여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 창1:27절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을 떠나 홀로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창2:18절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면서 돕는 배필을 지어주신 것이죠. 남자와 여자는 서로 보완하면서 부족을 채워 온전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다른 인간을 떠나서 참된 인간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그의 모든 재능을 자신의 개인적인 만족과 세력 강화의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보완하고 풍요롭게 하는 수단으로 여겨야 합니다.

세 번째로 인간은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창1:26-28절은 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권과 지배권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인간이 땅의 자원을 찾아내어 토지를 경작하고 농업, 원예, 축산업, 학문, 과학기술, 예술 등을 발전시켜야 함을 보여줍니다. 시8:5-6절도 “저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고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청지기적인 사명을 갖고 자연을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이 모든 관계 속에 넣으셨기에 우리는 이 세 관계 중 어느 하나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바르게 기능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거짓말이 되며(요일4:20), 나아가 이웃사랑이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바른 지배와 돌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인간은 이 세 가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형상의 올바른 기능도 이 세 가지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하나님 형상의 두 측면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같은 것으로 보고 그 형상을 광의적인 형상(구조적)과 협의적인 형상(기능적)의 두 측면으로 구분합니다.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구조적 측면의 형상으로 인간이 맺고 있는 삼중적인 관계성과 소명들 속에서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도록 하는 모든 은사들과 재능들이 총체적으로 부여된 상태이며,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은 그 모든 것을 바르게 작동하게 하는 올바른 기능성으로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성이 그것입니다(골3:10, 엡4:24).(안토니 A.후크마, 기독교 문서선교회, p106) 그러나 이 둘은 구분하는 것이지 분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5.본래적 형상과 타락하고 변질된 형상, 그리고 회복된 형상과 온전케 될 형상

1)본래적 형상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지녔던 하나님의 형상을 본래적 형상(The Original Image)이라고 부릅니다.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그때에는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으며 조금 전에 말했던 삼중적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서로를 사랑하고 섬겼으며, 하나님께서 맡기셨던 피조세계를 지배하고 돌봄으로 그들의 역할을 감당했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은 아닙니다. 그들은 죄의 가능성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신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향하여 나아가야 했습니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은 행로의 마지막 단계에 서있던 자가 아니라 행로의 초기에 서있는 자였다. 그의 상태는 잠정적이요 임시적인 상태였으며 그 상태로 그냥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더 높은 영광의 단계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죄와 사망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Dogmatiek, 2:606)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다음과 같은 유보적 명령을 하셨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6-17).

2)타락이 형상에 미친 영향-변질된 형상(The Perverted Image)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논할 때 두 가지의 입장이 있습니다. 한편에서는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됨이 완전히 상실되었거나 중지되었다고 하는 견해와 다른 한 편에서는 타락한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견해가 그것입니다. 루터파는 죄와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근래에는 클라스 스킬더, 베르까우워 같은 화란의 신학자들에게도 유사한 경향을 발견한다. 최홍석, 인간론, p80)

개혁파는 전적상실의 개념이 아닌 전적부패와 타락을 주장합니다(창6:5, 롬7:18, 롬3:10-13). 즉 인간은 타락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창9:5, 약3:9). 성경은 타락 이후 하나님의 형상이 모두 없어진 것이 아니라 심하게 파괴되고 변질되고 일그러졌다고 말합니다. 타락을 통해 인간이 재생 불가능한 마귀가 된 것이 아닙니다. 마귀의 종노릇 하지만 인간이 마귀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타락으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빙크는 또한 이렇게 말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타락했지만 여전히 인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의 모든 능력, 재질, 재능들을 변질되었으며 방향이 너무도 크게 바뀌었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고 오직 육체의 법을 만족시킬 뿐이다.”(Dogmatiek, 3:137 ) 그러므로 개혁주의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 후의 인간에게도 있다고 말합니다. 창9:6과 약3:9은 타락 이후에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죄와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중요한 것은 죄로 인한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전적으로 부패되었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인간 존재의 어느 한 부분도 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참된 선이나 구원 받을 만한 그 어떤 능력도 인간에게 없음을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의와 거룩과 참된 지식과 같은 기능적 측면의 형상이 완전히 파괴되어서 광의의 형상인 구조적인 형체마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되고 왜곡되고 비뚤어지고 썩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지만 그 방향이 틀어지고 그 기능이 전적으로 부패했기에 이러한 이성과 감성, 재능, 능력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위한 그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으며 오직 자기 자신의 만족과 정욕만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의 심각성과 심화성을 볼 수 있습니다.

타락 이전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생생하게 나타내었으나 타락 이후 인간에게 있는 좁은 의미의 형상은 전적으로 상실되었고, 넓은 의미로서의 하나님의 형상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되고 그 방향이 삐뚤어져버려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없게 되고 만 것입니다. 칼빈은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미친 영향을 말하면서 그 형상이 전적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없어지고, 도말되어서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삶 속에는 끊임없는 무질서와 격정이 위험스럽게 도사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간 안에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으며 그 흔적과 잔여물이 여전히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시켜 준다고 합니다.(기독교 강요, Ⅱ. 2.17)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의 구조적, 기능적 측면의 구별을 통해 타락 이전과 이후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여 구조적, 혹은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기능적,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도 생생하게 나타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 사람은 좁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넓은 의미의 형상인 하나님이 주신 모든 재능과 능력들조차도 죄악의 불순종한 방법들로 사용해서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최상의 것이 부패하여 최악의 상태가 된 것이죠.

3)새롭게 된 형상(The Renewed Image)

타락으로 변질된 형상은 갱신과 회복의 필요성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구속의 과정에서 일어납니다.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고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과 거룩케 하는 역사를 통해 회복이 가능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참된 의와 거룩으로 다시 나게 되고(엡4:24) 우리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며(골3:10), 다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벧후1:4).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른 방향으로 서 있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향하여도 올바른 방향으로 서 있을 수 있고, 피조세계를 향하여도 바르게 설 수 있게 됩니다.

그럼 이 회복은 손실된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돌아오고 완성되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형상의 갱신과 회복은 사람의 생애 가운데 계속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온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사건이며 다가올 세상에서 그 형상의 부요함과 완전함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후7:1)고 말하고 있고 엡4:22-24절에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새롭게 된 형상으로 온전케 될 형상인 영화를 소망하면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어진 형상의 회복이 은총의 문제인 동시에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한 성화의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온전케 된 형상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은 최초의 창조상태로 돌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은 상태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는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게 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죄를 짓지 않고 죽지 않을 수 있는 존재였지만 영화롭게 된 성도는 죄를 지을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가올 세상에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빌3:21). 그때 우리는 인간이 창조된 삼중 관계의 무한한 풍요로움과 온전함을 누리게 될 것이며 인간 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형상은 비로소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6.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른 견해

1)로마 카톨릭(천주교)의 견해

로마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다양한 이론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창조 시 인간은 두 가지 은사, 자연적 은사(dona naturalia)와 초자연적 은사(dons supernaturalia)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연적 은사란 이성, 양심, 판단력, 도덕성, 의지, 자유 등을 가리키는데, 이들이 서로 충돌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상태로 창조되었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저급한 욕구가 있어서 이성이나 양심에 대항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경향 자체를 죄로 보지는 않지만 의지가 여기에 굴복하여 행동으로 나타나면 죄가 된다고 하는데, 이러한 경향을 인간이 스스로 제어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자연적인 은사 위에 추가적으로 초자연적인 은사를 덧붙여주셨다고 합니다. 그들에 의하면 자연적 은사만으로는 초월적 세계에 들어갈 수 없으며 초자연적 은사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한 초자연적 은사가 실제로 있었다면 아담은 범죄 하지 않았을 것이란 측면에서 이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여기에서 개혁파가 말하는 형상의 기능적 측면과 천주교의 초자연적 은사를 구별할 수 있으신지요? 개혁파의 기능적측면의 형상은 추가로 덧붙여진 것도 아니고 경향성을 제어하기 위한 정도가 아니라 통전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로마교회의 형상견해는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아담 안에서 시작된 모든 사람들의 원죄성의 개념을 피상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은혜의 상태에서 영광의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 인간의 공로를 개입시키게 됩니다.

2)루터파의 견해

루터파는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되, 전적으로 상실해서 죄악 덩어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에게는 기본적인 양심도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하면서 타락 이전의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참지식과 의(義) 및 거룩 등의 영적 특성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봅니다. 루터파의 견해는 로마 교회의 선행 공로주의 반동으로 나온 것으로 원의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결과 타락 이후 인간의 상태를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편협성을 면치 못합니다. 그러나 루터파의 이러한 단조롭고 비연속적이고 단절된 주장들은 개혁파의 일반은총의 교리에 의해 완화됩니다.

3)칼 바르트의 견해

바르트는 인간 내의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유사성이 아니라 관계론적 유사성으로 파악합니다. 즉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사람사이, 남자와 여자 사이의 나-너의 관계, 대면적 관계성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그것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상실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타락 전의 인간과 하나님의 교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르트는 타락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타락의 심각성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롬3:9-18).

4)기타 여러 파의 견해

소시너스파와 일부 알미니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의 하등피조물 위에 가진 ‘주관권’(主管權)으로 이해하였고, 자유주의자의 대부인 슐라이어마허와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인격’만을 포함한다고 주장했습니다.

7.하나님의 형상 결론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요, 타락한 후에도 여전히 그의 형상이다. 둘째,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고 왜곡되어 전혀 하나님을 닮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기형적인 형상이 되었다. 셋째, 왜곡되고 부패한 형상은 성령의 거듭나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은총의 사역을 통해서만 회복이 가능하다. 넷째, 형상의 회복은 은총의 문제인 동시에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야 하는 성화의 과제이며 동시에 온전케 된 형상을 입는 영화의 날을 소망하는 소망의 주제이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