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진교회 집사, 대신대 강사 역임

신앙생활하면서 가끔 다니는 교회에 헌금하기가 싫어질 때가 있다. 이런 경우는 보통 원론적으로는 사단의 계교에 속았다든지 혹은 물질의 유혹에 빠졌거나 시험에 들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과연 헌금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모든 잘못이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우리 성도들이 교회에 헌금을 열심히 하게 되는 이유부터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은 청지기 정신으로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이 기독교 신자의 도리이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물질이 사용되도록 교회에 헌금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성경적으로 말하자면 연보를 드리는것이다. 연보는 재물로 남을 돕는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각자가 다니는 교회에 연보를 하면, 그 교회는 또한 청지기 정신으로 그 연보를 성경적으로 사용해야 함이 마땅하다. 

그런데 한국이 70년대 이후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는가운데 교회도 더불어 급성장을 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은 너도나도 헌금을 많이 하면 30배 60배 100배로 물질축복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특히 헌금가운데 십일조 헌금이 부자가 되는 지름길이라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많아졌고, 따라서 기복적인 마음으로 헌금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이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7-80년대 경제 발전기에 실제적으로 물질축의 축복을 받게 된 신자들이 많았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급성장하고 경제적으로 부자가 되어갔다. 더불어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은 엄청난 연봉의 사례비와 더불어 최상류층에 버금가는 부를 누리기도 하였다. 화려하게 지은 예배당 건물을 경쟁하듯 자랑하였고, 그 부유함을 지속하기 위해서 교회 담임목사 자리를 자식에게 세습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불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있었으니, 절에 시주를 많이하고 부자가 되었다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물론 물질을 바르게 쓰고 어려운 사람들과 그 물질을 나누기 위해 헌금하거나 기부하는 마음의 중심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답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런 중심을 가진분들에게 물질의 복을 주셨을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질적인 축복은 신앙이 좋거나 바르게 살아서 받게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신앙이 바른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어렵게 살았음도 증거한다. 특히 요즘같은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물질이 풍요하길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구원받은 신자는 물질이 아닌 하나님으로 만족해야하고 의지해야 함에도 물질의 복을 하나님의 복으로 동일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주님이 금하시는 부동산 투기나 불로소득으로 부자되는 것을 내심 바라고 자랑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제 경제가 예전처럼 발전하는 시기는 끝이나고, 헌금을 많이 바쳤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시대는 지나갔다. 헌금을 많이해도 부자가 될수 없는 경우도 많게 되었다. 그리고 그 동안 한국교회에 만연된 기복신앙과 번영신앙이 잘못된 신앙이라고 올바르게 가르치는 목사들이 있었다. 따라서 성도들도 신앙의 본질을 깨달으면서, 옛날처럼 부자가 되기위해 헌금하는 일은 자제되었다. 또한 올바른 청지기 정신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하지만 앞으로 점점 전체적인 헌금의 총액은 갈수록 줄어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너무 대량으로 쏟아져서, 이제 교인들은 목사를 신뢰하거나 영적지도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그만큼 신도들이 목회자들에 대해서 실망스러운 일들을 체험하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살고 있다. 예를들어서 솔직하게 자기교회 담임목사가 주안에서 자기를 위해 아주 조금이라도 희생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도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오히려 희생은 고사하고 그냥 신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많지만 현실은 별로 그렇지 못하다.

더구나 중대형교회의 교회의 지출예산을 보면 목회자 사례비가 제일 많이 차지하고있다. 특히 담임목사에게 과도하게 지출되고 있다. 이런 일들에 대해 비판하는 여론이 높아지자, 교인들은 교회에 헌금하기 보다는 자기가 직접 이웃을 섬김는 방식으로 헌금을 사용하고 싶어진다. 물론 목화자들에게 정당한 사례비를 드림이 마땅하고, 본질을 위한 비본질적 일에도 헌금이 사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불필요하게 쓰여지는 교회돈의 행방을 알게되는 순간 헌금이 하기 싫어지는 것을 탓할수 있을까?

이제 우리 모두 신앙개혁을 해야한다.  이사야와 동시대 선지자 미가는 타락한 백성에게 임할 심판을 슬퍼하면서 세개의 간결한 문장으로 모세율법을 요약했다. 공의로 행해야하며 헤세드의 사랑 인애를 가져야하며 겸손하게 행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회복하실 하나님의 언약을 선포했다. 우리도 공의를 회복하고 인애의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자! 목사는 교인에게 그렇게 하고, 교인은 교인끼리 그렇게 해야한다.

그리고 신자는 가능하면 많은 연보를 하되, 교회는 가난한 교우들에게는 헌금 부담을 주지 않도록 배려하고 애써야 한다. 초신자나 교회에 처음 나오게 된 불신자에게 십일조가 의무라고 강조해서 교회를 아예 안나오게 하는 일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 신앙이 자라가면서 십일조 정신을 바르게 가르치되, 먼저 헤세드사랑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는일에 집중해야 한다. 헌금액수가 줄어들까봐  전전긍긍 하지말고 교회는 하나님이 이끄심을 신뢰해야 한다. 교인은 목사를 신뢰하고 목사는 교인을 아끼는 그런 교회를 그래도 기대해 본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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