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이를 예수님처럼 섬기다 떠난 정도인 목사

고 정도인 목사 영정

뉴욕 새소망장로교회를 개척하여 38년간 목회를 해온 고 정도인 목사는 지난 2월 11일 새벽 2시30분 플러싱병원에서 향년 72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천국 환송예배는 2월 14일 오후 7시에 해외한인장로회 동북노회 주관으로 약 3백여 명의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샌포드 중앙장의사에서 열렸다. 발인예배는 2월 15일 오전 9시30분 뉴욕목사회와 교협 주관으로 열렸으며, 하관예배는 무궁화 동산(Washington Memorial Park)에서 바울선교회 주관으로 열렸다.

입관 예배는 인도/이수영 목사(동북노회 전 노회장), 기도/장동일 목사(뉴욕모자이크교회 담임), 찬양/선한 사역자 모임(회장 김수경 목사), 설교/송병기 목사(해외한인장로회 전 총회장), 약력보고/조병광 목사(동북노회 새하늘교회), 조가/주상원 권사, 추모사/이종안 목사(친구)ㆍ김수경 목사(뉴욕퀸즈교회 담임)ㆍ김이식 권사(처제), 축도 김명하 목사(동북노회 전 노회장)의 순서로 진행됐다.

다음은 고 정도인 목사 천국 환송예배에서 김수경 목사(본헤럴드 미국지사장)가 낭독한 추모사이다.

설교하는 송병기 목사

故 정도인 목사님을 추모하며​

바울처럼 살고싶어 하시며 목사들이 바울처럼 살기를 원하셔서 바울 선교회를 만드신 고 정도인 목사님. 뉴욕과 미국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그리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동산처럼 만들고 싶어서 선한 사역자 모임을 만드신 고 정도인 목사님. 목사님은 정말 아름답고 선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신 하나님의 종이셨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뵙고 싶으시면 이렇게 저희를 남겨두고 빨리 가셨습니까?

목사님은 저에게 자주 "나는 김목사도 좋지만, 김목사 언니... '무지개의 집' 하는 언니도 좋아해. 그리고 남동생 김용일 목사도 참 좋아해. 우리 뉴욕이 그런 목사를 잡지 못한 게 제일 큰 실수야"라며 항상 저희 가족을 많이 사랑해 주셨습니다.

추모사하는 김수경 목사

사랑하는 고 정도인 목사님을 제가 존경하게 된 때가 벌써 저희 아버지 고 김리관 목사님께서 살아계셨던 27년 전입니다. 정목사님께서는 저희 아버지보다 많이 젊으시지만, 아버지와 같은 노회에 계셨고 저희 아버지처럼 하나님의 공의를 사랑하신 분이며, 정이 많으셔서 누구에게나 상냥하게 대하시며 모든 것을 퍼주며 잘 해주려고 하셔서 제가 아버지나 삼촌처럼 생각했던 분입니다.

제가 갓 미국에 왔을 당시에 새해가 되면 노회 목사님 가족들이 모여서 예배도 드리고 식사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저희 아버지께서는 출타중이셔서 저는 어머니를 모시고 참석했는데, 그때 어떤 해프닝이 일어났습니다. 예배도 잘 드리고 식사를 한 뒤에, 어느 목사님이 뭐 놀만한 것이 없냐고 하자, 마침 그 집에 화투가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님 집에 그런 것이 있다는 것에 너무나 놀랐고, 또 그것을 해본 적이 없는 목사님들은 그걸 어떻게 하냐며 말이 오고갔습니다.

저는 그 상황이 너무나 당황스러우면서, '만약 아버지가 계셨으면 저런 것은 꺼내지도 못했을텐데... 이 가운데 저걸 말릴만한 목사님이 한분도 없는가' 하면서 속으로 기도하고 있는데, 그때 마침 정도인 목사님께서 "아니... 목사들이 모였으면 기도회를 해야지 화투장이 뭡니까?"라며 큰 소리로 말씀하시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멋지고 존경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때 저는 "아... 저런 목사님께서 계시니 희망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제가 목사가 된 후에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다시 목사님과의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저에게 착한 사람들을 소개해줄테니,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고 멋있게 사역을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너무나 교계가 혼탁하다보니 선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은터라, 목사님은 한달에 한두명씩을 저에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른쪽부터) 김혜식 사모, 아들 정현의, 처제 김의식 권사

목사님은 한참 어린 저에게 "난 김목사 팬이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목사가 하라면 김목사가 하라는 대로만 할거야"라며 항상 저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만약 의견이 좀 다를 경우에는 "난 이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맞을 수도 있어"라시며 전혀 주장하지 않으셨고, "김목사가 ... 줄 알겠는데, 나도 귀신 내쫓고 그런 거는 잘 해~"라시며 친구처럼 맞추어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기도하는 중에 목사님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더니, 마침 그날 수술하고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래전 월남전에 가서 고엽제를 맞은 후유증과 대상포진으로 목사님은 고생을 하셨는데, 한쪽 엄지발가락을 절단하고 발바닥을 엄지 발가락이 있는 부분부터 발뒤꿈치까지 1인치 정도를 파내었습니다. 그것을 보며 얼마나 놀랬는지... 누가 보험을 해준다고 해서 그걸 기다리다가 썩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1, 2백불 더 벌겠다고 그래서 기다리다가 이렇게 됐어"라고 하시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매일 밥을 해다 드리면서 병상일기를 쓰시라고 권해드렸는데, 그때 목사님은, 교계를 걱정하시며 목사들이 정치 좀 그만하고 거짓말들 그만하고 술 그만 먹고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글을 쓰려고 하면, 목사님 자신의 회개부터 나오는데 무슨 글을 쓰겠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목사님은 너무나 정직하고 아름다우셨습니다.

'주 날개 밑'을 부르는 선한 사역자 모임

제가 병원을 나가면서 "목사님~ 제가 좀 바빠서요. 혼자서 괜찮으시겠어요?"라고 여쭈어보면, "나 여기서 하루종일 예수님과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아~. 걱정말고 빨리 가봐~"라고 하시며 정말로 매일마다 예수님과 만나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목사님은 병상에서 천국을 보고 계셨습니다. 곧 그곳에 가실 것을 목사님은 알고계셨기에 천국에 대한 글을 쓰신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당신의 아픔을 많이 나누셨습니다. 왜냐하면 저와 너무나 잘 통했기 때문이며, 저에게 기도 받는 것을 매우 좋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김목사~ 기도해줘"라고 항상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목소리로 부탁하셨습니다.

목사님과 저는 정말 신기할 정도로 공통분모가 많았습니다. 목사님은 "야~ 나와 똑같은 사람을 만나니까 정말 신기하네~!"라며 매우 좋아하셨습니다. 형제 중 둘째이며 머리가 좋고 학구열이 높아서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녔고, 학창시절에는 좀 빗나가는 친구들에게 예수님 믿으라고 좇아다니며 전도하고, 친구들 중에 항상 제일 큰 편이고, 글 쓰는 것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어린 아이들을 무척 사랑하며, 무엇보다 예수님을 깊이 사랑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외면하지 못하고 예수님께 하듯 돌보아주고, 받기보다 주기를 좋아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있는 것 다 퍼주고, 그래서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라는 찬송을 참 좋아하고, 매사에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즐겁게 살아간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주위 사람들이 마음 아플까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생활하며, 대단한 인내심을 갖고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요단강 건너편에"를 부르는 주상원 권사

그래서 대화가 참 잘 통했습니다. 상대방이 한 마디만 해도 또는 그냥 제스츄어만 보아도 모든 것을 이해했습니다. 목사님께서 "나는 착한 사람이 좋아"라고 하시면, 저는 "예. 저두요. 그러니까 착한 사람끼리 예수님 기쁘게 해드려요~"라며 항상 만나면 긍정적이며 즐거운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영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대화가 통하기 때문에...

목사님은 고엽제로 인해 온 몸에서 피가 나는데, 목욕탕에 들어가서 물을 틀어놓고 하루에 15시간씩 그 피고름을 닦아내시기를 십수년간을 하며 사셨다고 했습니다. 물론 처음엔 사모님께도 말씀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사모님께서 왜 그렇게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냐고 하셔서 "내가 조금만 이야기 했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모님을 무척이나 배려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정목사님께서 많이 나아지셨다고 생각했으나 "15시간에서 이젠 하루에 대여섯 시간만 목욕탕에 있어"라고 하면서 웃으시는 정목사님을 바라보며 "목사님... 제가 목사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저도 그렇게 살았어요. 제가 엄살을 부릴 줄 모르잖아요? 그래서 아무리 아파도 아픈 걸 무시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활동을 많이 하니까 사람들이 전혀 아픈 줄을 몰라요. 만약 아프다고 해도, 아픈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역을 하냐며 아무도 믿기지 않으니까 동정해주지 않아요.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목사님도 저랑 똑같으셔서 말씀 안 하실 것 알지만... 그렇지만, 사모님이나 가족들에게는 엄살 좀 부리세요"라고 말씀드렸지만, 목사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말하면 뭐해. 모르는게 낫지~"라시며 "난 괜찮아"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장동일 목사

저는 "목사님~ 괜찮지 않으신 거... 알거든요"라고 말씀드리면, "김목사만 알면 됐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돼. 김목사가 기도해 주잖아~ 그럼 됐지 뭐~ 우리 집사람... 나 때문에 고생 많이 했어"라고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예, 목사님.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안다고 나아질 것은 없지요... 알겠어요. 제가 기도 많이 할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 다니시는 병원이 저희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병원에 갈 때 목사님은 자주 저를 불러내셨습니다. 혼자서 병원에 가시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족한 저를 목사라고 그렇게 의지하셨는데, 너무나 제가 주변에 돌봐주어야 할 이들이 많다보니... 목사님께 흡족하게 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지금도 죄송해서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병원에서 치료 후에 의사가 붕대를 더 주겠다고 해도, 집에 있는데 또 가져가면 도둑질하는 거라며 받지 않으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더 받아가지 못해서 안달인데, 정목사님은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 없이 사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수술이 잘못 되어서 한쪽 다리가 짧아지는 바람에 한쪽 신발에 굽을 1인치정도 높여서 신으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괜찮아"라고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제 마음은 목사님을 뵐 때마다 너무나 아픈데, 그걸 아시기에 목사님은 "괜찮아. 나 봐~ 나 멀쩡해"라고 하셨습니다.

추도사 하는 친구 이종안 목사

정목사님께서는 매주 목요일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나가서 점심을 대접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잘 만드신다며 반찬도 손수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갖다드리셨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위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도 그렇게 아픈 몸으로...

목사님과 함께 있다가 사모님과 통화하게 되면, 항상 "다알링~"하면서 얼마나 사모님께 다정하게 하시는지... 그 모습이 저희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정목사님과 같은 신랑감은 저희 아버지 빼고는 세상에 또 없을 것 같았습니다.

특히 가정들이 파괴되어가는 것들을 무척 가슴 아파하셨고, 그런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회복시켜주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보면 "너 나랑 친구할래?"라며 아이들 수준으로 맞추어주어서 아이들도 정목사님을 참 좋아했습니다. 주변에 도박하는 사람을 비롯해서 문제 덩어리 인생들을 항상 예수님처럼 대해주시던 정목사님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트러블 메이커를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정목사님은 그들을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섬겨주셨기에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라는 찬송을 부르며 항상 기뻐하며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살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헌화하는 김수경 목사

정목사님께서는 항상 뉴욕 한인교계를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슴에 품고 사셨습니다. 목사님은 저에게 "많이도 말고 7명에서 12명 정도 괜찮은 목사들의 그룹을 몇 개 만들어 놓으면, 교계가 좀 나아질 것 같은데..."라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날 데려가시기 전에 기회를 주시면, 남자 목사 그룹과 여자 목사와 사모 그룹을 몇 개만 만들어놓고 싶은데... 목사들이 내 뜻을 잘 몰라. 왜 저 나이 먹은 늙은이가 젊은이들 사이에 끼냐고 그래?"라고 하시며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그러면 저는 "목사님이 왜 늙은이에요? 모세가 하나님께 부름받을 때보다도 열살이나 젊으신데요? 그런 말 하는 사람 있으면 저에게 데려오세요. 제가 손 봐줄께요~^^"라며 같이 웃곤 했습니다. 정목사님께서는 이미 천국에 갈 준비를 하고 계셨는데, 그것을 다른 이들은 알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정목사님께서는 자주 7명의 친구들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어린 학창시절 때 목사님을 포함해서 친한 친구 7명이 있었는데, 만약 결혼을 하더라도 그 친구들 중에 한명이라도 반대하면 결혼을 못하는 걸로 해서 여자친구들이 생기면, 그 여자친구들이 남자의 부모님보다 그 친구들에게 잘하느라고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 그 친구들 중에 3명은 목사가 됐고, 나머지 친구들도 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좋은 언니와 착한 여동생과 같은 목사나 사모를 소개해줄테니 7명 정도가 참 좋으니까 목사님처럼 그렇게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절대로 정치성이 있으면 안된다며, 인원이 많아지면 정치를 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아픈 건... 정치를 해서 하나님께 벌 받은거야. 정치를 안 하려고 했는데, 교계가 너무 잘못되니까... 목사들이 목회는 안 하고 엉뚱한데 가서 앉아있고 엉뚱한 짓을 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내가 나섰기 때문에 그래도 좀 조용해진거야.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도 싫어하신 것 같애..."

매사에 "김목사. 이건 어떻게 할까?"하고 저에게 물어보시며, 제가 기도하고 말씀드리는대로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할께"라고 하시던 목사님께서... 마지막에 어떤 일에 제 말씀을 듣지 않으시고는 난처해 하시며 "미안해. 김목사 말 들었어야 했는데, 내가 잘못했어. 난 내 생각대로 될 줄 알았지. 노인네가 너무 불쌍해서..."라고 하시며 "앞으로는 정말 말 잘 들을께"라며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말씀하시던 목사님... 그 모습은 저희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하시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도인 목사님,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을 무시하고 낮추려고 하는데, 목사님께서는 조카뻘쯤 되는 저를 한번도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시고 목사로서 무조건 존중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사셨기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십수년간 가족들 몰래 혼자 그 고통을 감수하며 그 모든 것을 저에게 말씀하신 것은... 이렇게 목사님께서 저희 곁을 떠나신 뒤에... 목사님께서 얼마나 사모님과 아들 Joshua를 사랑하셨는지 알려주기를 바라셨던 것임을 알기에, 그리고 예수님께서 피값으로 사신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신 것을 알리기 원하셨다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추모의 글을 씁니다.

이제 사랑하는 고 정도인 목사님께서는 하나님 곁으로 가셔서 저희 곁에 안 계시지만, 목사님의 정직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은 영원히 저희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마지막으로 전화하셨을 때, 참지 않으시고 아프다고 한 마디만 말씀하셨으면 제가 아무리 바빠도 달려갔을텐데... 왠지 목소리가 마음에 조금 걸리면서도 주말 지나고 월요일에 뵙기로 약속했지요. 그런데 토요일 아침에 사모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와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하시는데, 저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슬픔에 휩싸였습니다. 만나고 싶어서 전화를 하셨을텐데, 그날 뵙지 못한 것이... 지금도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목사님... 정말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천번 아니 만번을 죄송하다고 말씀드린도, 제 마음은 결코 편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는 여전히 지금도 "난 괜찮아~ 뭘 그런 것 같고 그래? 나 지금 좋은 데 와 있잖아! 걱정하지 마~. 아마 김목사가 날 부러워할 걸~^^" 이라고 하시며 웃고계실 줄 알기에 감사할 뿐입니다.

하관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함께

사랑하고 존경하는 정도인 목사님,

목사님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모두 목사님의 뜻을 받들어 혼탁한 교계를 주님의 사랑과 공의로 변화시켜 나갈 것입니다.

목사님... 너무 너무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리셨다가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목사님... 저희 모두 목사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2017년 2월14일 화요일에

사랑하는 故 정도인 목사님께 김수경 목사가 드립니다.

<고 정도인 목사 약력>

정도인 목사는 1945년 6월 충북 청주에서 정혜옥 장로와 유기봉 권사의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믿음의 가정에서 자랐다. 월남전에 참전하였다가 후에 고엽제 후유증을 겪었다. 1976년 김혜식 사모와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정현의(Joshua)를 두었다.

미션스쿨 청주 세광고와 예장통합 장로회신학대학을 거쳐 뉴욕신학대학에서 목회학박사(D.Min) 학위를 받았다. 1978년 예장 충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온양 영은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목양의 첫발을 내딛었다. 1979년 도미, 뉴욕에서 새소망 장로교회를 개척하고 38년간 목회를 했다. 뉴욕교협의 임원과 뉴욕목사회 23대 회장을 지냈다.

평소 어린이교육과 한국교회의 문제, 예배의 모범이 충분치 않은 것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여러 책을 저술했다. 저서로는 <신생아 교육과 양육>, <한국교회의 진단과 과제>, <예배의 모범과 실재>, <예배의 새 조명> 등이 있으며, 천국에 관한 책을 쓰는 도중 미완성으로 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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