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섭 목사,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 한우리교회 담임목사 Senior Pastor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 / 동아대학교 환경공학과에서 대기오염 수질오염 전공

앞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효력 있게 불러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주관적으로 적용시켜 간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택한 자를 복음으로 부르시면 중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논리적인 순서를 따지자면, 하나님의 부르심이 먼저요, 그 다음이 중생이지만 순서를 엄격하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부르심과 중생은 동시적 사건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이 중생이 아니고 중생을 부르심으로 대체할 수 없습니다. 구분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나타나는 중생의 경험이 일률적이지 않고 다양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1. 중생의 개념

유효한 부르심의 결과인 중생은 인간의 본성이 새롭게 출생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서 영적인 생명에로의 전환, 즉 인간의 삶의 근본적인 틀이 변화되는 것이 중생입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중생이 영혼 안에서 점진적으로 준비되는 과정이 아니라 지. 정. 의의 모든 면에 새 생명의 원리가 즉각적으로 심어지고 발현하는 하나님의 행위라는 사실입니다. (중생은 인간의 마음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 어떤 신적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성령의 인도와 교훈에 순복하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지정의가 자기중심성인 죄에서부터 하나님중심과 이웃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전환되는 것이 중생이라 할 수 있다. 유태화, 삼위일체론적 구원론 p. 205)

어떤 사람들에게 중생의 변화가 서서히 나타날 수도 있다는 말은 초기개혁신학에서 중생이란 개념을 넓은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에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그때에는 오늘처럼 구원의 서정에 대해 충분히 발전하지 못한 때였습니다. 예를 들어 칼빈은 중생을 거듭남의 개념만이 아니라 회심과 성화를 포함해서 사용한 적이 많았고 1561년의 벨직 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17세기 신학자들도 중생을 회심과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중생의 개념을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구별해서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중생이란 단어의 개념이 너무 포괄적이고 넓어지면 구원의 여러 국면들의 이해가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2. 중생의 방편(수단)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카이퍼는 말씀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통하지 않고도 중생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유아사망이 빈번했던 화란교회의 정황에서 나온 고민이라고 해도 성인의 경우도 말씀의 방편 없이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으로 중생할 수 있다는 소위 중생 전제설은 개혁주의적 견해가 아니다. 이에 대해 카이퍼의 뒤를 이어 자유대학교의 신학부 교의학을 담당했던 바빙크는 단호하게 “아니오”를 선언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요3:4-5) 그렇다면 여기서 물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국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은 거듭남의 수단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엡5:26)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3. 중생의 본질적 특성

죄로 인해 죽었던 인간을 성령이 어떻게 살리는지 우리가 다 헤아려 알 수 없습니다. 중생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다음과 같은 본질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중생은 과정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을 통한 단회적이고 즉각적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수동적입니다. 이것은 엡2:4-5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중생은 전적으로 수동적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할 때 살리셨다는 단어의 시제가 부정과거 임을 볼 때 단회적이고 즉각적인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행16:4절에서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여셨다고 할 때 사용한 ‘디노이젠’도 그 시제가 부정과거 입니다. 무엇보다도 생명과 사망 사이에 중간지점이 없다는 점에서 볼 때 중생은 수동적이며 점진적인 개념이 아니라 갑작스럽고 순간적인 사건입니다. 중생은 순간적이고 획기적인 사건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죽음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옮겨놓는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입니다.

둘째 중생은 초자연적인 변화입니다. 중생은 우리의 도움 없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사역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은 하고 돌이키는 것은 사람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후크마의 말대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놀랍고, 비밀스럽고, 표현될 수 없는 일로서 그 능력에 있어서 창조나 부활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중생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바람이 어디서 부는지 알 수 없는 것같이 중생도 그러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셋째, 중생은 철저한 변화입니다. 중생은 인격의 좌소인 마음이 전인적으로 변화되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이것은 급진적이며 통전적인 존재의 변혁입니다. 단지 그 생명이 자라나며 드러나는 외적인 현상의 차이는 개인적으로 다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넷째, 중생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인 중생은 효력 있는 부르심과 더불어 인간이 항거할 수 없는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인간의 상태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살려놓으시고 거룩과 영광을 향하여 돌려세우신 하나님을 찬송할 뿐입니다. 솔리 데오 글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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