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죽 최복이 대표의 무릎경영 이야기 (5)

한국에서 잘되는 브랜드라는 자신감은 최복이 대표로 하여금 해외로 눈을 돌리게 했다. 2004년도쯤 미국 LA에 가서 월셔가에 좋은 자리를 얻어 매장을 열었다. 하지만 준비하는 과정부터 식재료를 공급하는 부분까지 한국과는 너무 다른 환경에 한국에서와 같은 맛을 내는 것이 정말 쉽지 않았다. 한하나 해결책을 찾으며 드디어 오픈하는 날 <한국일보> LA지사에서 많은 기사를 내 주어 초반 출발이 상당히 좋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문제들이 속출했다. 한국인을 채용하지 못해 외국인을 주방인력으로 고용했지만, 한국인들처럼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한국에선 2명이면 충분한 일들이 5~6명이 하는 것도 힘들어 하는 것이다.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문제나 주방을 운영하는 방법도 한국과는 너무 달랐다.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고 오픈하는 기쁨도 있었지만 무거운 마음도 있었다. 한국인 매니저에게 매장을 맡기고 한국으로 돌아온 내내 계속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조마조마 했던 사건이 터졌다. ‘헬스’라는 위생 점검반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후드 배기량이 기준치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그 날로 문을 닫게 했다. 위생에 그렇게 신경을 쓰고 준비를 해서 자신이 있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후드 배기량의 문제로 문을 닫았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미국으로 갔다. 그리고 후드를 고치고 재접수를 하면 검사가 나온다고 기다렸지만, 몇 달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다. 6개월간 월세는 꼬박꼬박 나갔고, 언제 오픈할지 모르니 직원들도 출근해서 대기했다. 많은 손실이 생겼다. 그 후 다시 허가가 났을 때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그 무렵 최대표의 시누이 부부가 LA매장을 맡아 보고 싶다는 이야기에 걱정반 기대반 하며 맡겼지만 2년 가까이 무척이나 고생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후 시매부가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가봤다. 영어도 안되는 상태에서 법률문제, 시장보기, 매장 운영 등을 책임지다 보니 스트레스와 우울 상태에 짖눌린 것이다. 일단 시누이 부부가 운영하던 매장을 다른 적임자에게 맡기고 딸 둘만 남긴채 시누이 부부를 돌아오게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시누이 부부가 방에서 죽은채로 발견된 것이다. 그 때 온 가족이 받은 충격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최대표의 남편은 본인이 가라고 해서 여동생 부부가 그렇게 되었다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당시 일본 매장도 오픈을 준비하고 있던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일본매장을 오픈 하였다. 일본 아카사카에 일본 본사를 세우고, 이어 신주쿠, 오오쿠보에 차례로 매장을 열었다. 미국에서의 시행착오를 보완하기 위해 한국의 직원들을 보내고 매니저 한 명만 일본의 한인교민을 세웠다. 일본 매장은 상당치 잘됐다.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는 매장으로 알려지면서 금새 유명세를 탔다. 하지만 3년이 지나 건물 계약을 잘못한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일본을 향한 하나님의 기업이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며 세웠지만 일본 진출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미국에서의 크나큰 상처와 일본에서의 아픈 경험에 ‘해외매장 진출’의 꿈을 접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 꿈을 포기 하지 않도록 하셨다.

그 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이어 말레이시아, 베트남, 북경을 다니며 준비하고 오픈했다. 특히 중국에서의 오픈도 쉽지 않았다. 중국에 온 신경을 쏟을 무렵 한국에서 터진 ‘불만○○’ 사태는 한국에서 보다 해외로 촛대를 옮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같았다.

2013년 본아이에프에서 분리된 주식회사 ‘본월드’는 국내사업과 해외사업 분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 이뤄 놓은 기업에서 편하게 대접받던 자리를 내려놓고 다시 출발점에 서있는 초라함마저 들었다. 많은 직원들이 함께 하기를 회피했지만, 그래도 자원한 10여명의 직원들과 첫 예배를 드리며 많이 울었다.

하지만 얼마 후 하나님은 최대표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꿈을 꾸게 했다. 일본 사업일로 출국을 위해 인천공항을 걷다가 섬광과 같은 비젼을 보여주신 것이다. “해외사업은 인천공항 같은 역할이야. 아, 거거였구나. 맞아. 그래!” 최대표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지고 직원들을 위로 했다. “우리는 지금은 터를 닦고 있지만 머지않아 인천공항처럼 세계를 무대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감사함으로 나갑시다.”

여전히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중국 재계에서 수위 안에 들던 대기업과 업무협약을 진행하다가 그들의 어이없는 요구에 사업진행을 멈췄다. 하나님은 중국에서 대기업을 등에 업고 일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모시고 직접 그 땅에서 경영을 하도록 이끄셨다.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여기저기 캐리어를 들고 수 없이 왕래하면서 하나님은 최대표에게 선교사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해주셨다. ‘선교사님들이 어린 자녀들 데리고 더 낲설고 더 외진 곳에 가서 자리를 잡으며 얼마나 답답하고 혼란스러우실까? 그래도 나는 선교사님에 비하면 더 좋은 환경이 아닌가’

작은 아파트에서 여직원들과 함께 생활하며 최대표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작은 캐리어 안에 몇 가지 단촐한 짐들을 보며 그 동안 살며 누린 것들이 군더더기처럼 느껴졌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야, 상해 좋다, 진자 좋아, 나 여기 온 거 축복이네, 너무 감사하다” 하나님은 최대표에게 작아짐을 통해 오히려 크고 광활한 중국을 품게 하는 꿈을 주신 것이다.

중국에서 하나님이 하나하나 계약을 넓혀 가시며 길림, 연길, 호북성, 산둥성, 장춘, 하얼빈 등 상담의 열매들이 맺혀간다고 생각될 무렵 우리들은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계약들이 위법의 소지가 있음을 발견했다. 하나님의 사람들로 위법을 하면서 일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 중국에 먼저 가맹점 두 곳을 열었는데, 중국은 매장들이 1년이 지나야 가맹점 사업을 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러니까 그 전의 계약이 모두 무효계약이 된 셈이다. 눈을 감고 넘기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신뢰받는 기업이고 무엇보다 기도로 세워가는 기업을 그렇게 이끌 수 없었다. 늦고 더디고 손해가 되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기업을 세우는 것이 맞았다.

다시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계약서를 회수했다. 헛짓 같아 보이는 일이었지만 그런 일들이 오히려 계약자들에게 신뢰를 얻게 했다. 하지만 해외 사업의 난항을 겪으며 최대표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여기서 해야 하는 게 맞나요? 어쩜 계약부터 이리 힘들까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신 마음이 생겼다. 그것은 첫째, 최대표 본인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의지하던 모습이 발견되었다. 둘째, 사랑이 없었다. 그 땅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한국에서 잘나가는 브랜드라는 으스대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간 것이다. 셋째, 목표와 목적이 뚜렷하지 않았다. 넷째, 허세와 과시, 명예욕이 있었다. 결국 최대표는 해외사업도 다시 신앙의 터전위에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함을 깨달았다.

신앙의 기틀을 든든히 다지자 다시 새로운 꿈이 생기고 구체적인 미래 행동 지침이 생겼다. ‘2020비전’2020년까지 중국에 20개 마스터프랜차이즈, 세계 20개국 2,000 가맹점을 통해 20개 교회와 20개 학교를 세우는 꿈. 하나님은 지난 10년의 혹독한 수업을 통해, 더 맑고 선명한 하나님의 소원을 보여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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