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식의 변혁이 한국교회를 개선한다

김요한 새물결플러스 출판사 대표

1980년대까지 한국개신교회의 사회윤리 인식은 참으로 조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기독교 사회윤리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복잡한 사회구조에 대한 명쾌한 이해와 더불어 그 사회체제가 만들어내는 현대인의 심리적-정서적 질환 현상까지 꿰뚫어봐야 하는데, 나아가 그런 사회 체제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소위 정사와 권세라는 영적 실재에 대한 혜안이 필요한데 한국 개신교회는 그런 작업을 수행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이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를 지배했던 보수 개신교의 사회 윤리 수준은 고작 '줄 잘 서라', '새치기 하지 마라', '술 담배 하지 마라', '욕 하지 마라' 정도였다. 주일 설교는 대개 이런 수준의 도덕적 권면으로 일관했고, 거기에 십일조, 헌신 등이 덧붙여져 도덕주의와 기복주의가 결합된 형태를 띠곤 했다.

하지만 교회에서 제 아무리 '줄 잘 서라', '새치기 하지 마라'고 외쳐도 막상 신자들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그것을 지키기는 난망했다. 일단 강고한 이원론에 입각하여 주일 하루의 신앙과 엿새 동안의 삶이 철저히 괴리되어 있던 상황에서 주일 설교 내용을 고스란히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이도 드물었거니와, 설령 줄 잘 서고, 새치기 안 하려고 해도 사회 분위기가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즉 당시만 해도 새치기가 일상화 되어 있었음) 혼자만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때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어느 날 갑자기 사회 전체가 줄을 잘 서고, 새치기를 안 하게 되었다. 특히 이런 현상은 은행 창구 앞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바로 '번호표'가 등장한 것이었다. 좀 거칠게 말해서, 한국은행 창구 앞 풍경은 '번호표' 등장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갈라진다. 번호표 등장 이전에는 도때기 시장 같던 은행 창구 앞이 번호표가 등장한 이후부터 질서 정연하게 자리를 잡아버린 것이었다. 이렇듯 어느 종교의 도덕율로도 해결 못하던 사회 질서란 것이 아주 작은 제도나 법, 기능 한 두가지를 새로 도입함으로써 혁신적으로 정착하게 된 사례들이 제법 많다.

'종교'란 단어는 한자어로 으뜸 되는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기천불로 상징되는 한국의 주요 종교들은 저마다 자신의 가르침이 진리이고, 법이고, 도덕이고, 따라서 자신의 계율과 종교적 이상을 따라 새로운 천치가 열릴 것처럼 설파한다. 하지만 지금껏 한국의 어느 종교도 한국사회의 실질적 진보를 위해 제대로 기여한 예는 없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 전래된 그 어떤 종교도 한국사회의 공공선의 함양을 위해 실질적 기여를 한 적이 거의 없다. 개신교 식으로 표현한다면, 한국의 어떤 종교도 한국 사회의 성화를 위해서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한 적이 없다. 오히려 대체로 한국의 주요 종교들은 겉모양만 각 종교 특유의 형태를 띨 뿐이지, 실상은 우리 민족의 면면에 흐르는 무속적 심성의 영향 하에 현세구복적 형태를 강하게 발출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나는 종교 혹은 신앙을 통한 사회 변혁이 과연 이 땅에서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다.

교회만 해도 그렇다. 상당수 교회가 여전히 의사결정이 불공정하고 불투명하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재정의 투명성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도 많은 교회에서 목회 세습이 다양한 갈래로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지역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리고 있는 교회도 흔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에서 제 아무리 세상의 소금 어쩌고 빛 어쩌고 해도, 결국 교회 내부용 선전선동 수준에 불과하지 실제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데 이바지 할 수 있는 어떤 동력이 발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차라리 나는 사회 변혁에 대해 더 천착하게 되었다. 시민사회의 공공의식 수준과 제도의 정비 및 법령의 시행 수준이 더 향상될 수록 개신교를 포함하여 우리 사회 종교 및 각 분야 전체가 이에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 함께 수준이 향상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회계와 재정의 투명성이 높아질 수록 교회의 재정 관리 수준도 덩달아 높아지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의사결정 수준이 높아지면 덩달아 교회 안에서의 의사결정 구조 및 실행 과정이 공정해지고 투명해질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은 교회가 있다면 결국 그런 교회는 시대에 역행하고 뒤쳐져 도태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금 교회 구성원의 대다수를 이루는 60대 이상이 생물학적으로 더 이상 교회 기능의 중심축을 떠맡지 못하게 되고, 어느 순간 새로운 의식과 이념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가 교회의 중심축이 되는 순간, 사회의 이런 변화와의 공명은 필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교회가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교회가 세상 일에 왈가왈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자들은 피상적으로는 신앙의 본령에 충실한 자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실상이 만들어내는 역학관계를 조금이라도 심도 깊게 들여본다면, 그런 언설이 얼마나 한국교회를 병들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런 교회들이 작금에 한국시민사회에 얼마나 큰 부담과 짐이 되어버렸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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