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긍선(吳兢善, 1878년 10월 4일 ~ 1963년 5월 18일)은 구한말의 계몽 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의학자, 사회사업가이다. 피부과, 내과 의사였으며 피부과학 개척의 선구자로 인정된다.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개화파로서 이상재, 서재필 등과 함께 협성회,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일하다가, 미국에 유학하여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피부과 의사가 되었다. 의학 공부와 함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자격도 얻은 뒤 귀국하였으며, 군산, 광주, 목포 등 미국 남장로교 선교지역인 호남에서 의료 선교를 통한 사회사업에 종사했다. 이 기간 중 군산과 목포에서 중등학교 교장을 지내며 교육인으로도 활동했다.

생애 초반

1. 출생과 초기 삶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극(重克), 호는 해관(海觀). 아버지 오인묵(仁默 : 군산구암교히 초대 장로임)과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의 장남으로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8세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관직에 올라 상경하였다가 일찌감치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1896년 관직에 올라 내무부주사(內務部主事)에 이르렀으나 1897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협성회(協成會)와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 간부로 활약하였다.

2. 계몽 활동과 피신 생활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배재학당 안에 조직된 학생단체인 협성회의 간부로도 활동했다. 그는 이승만과 함께 협성회의 간부로 청년 계몽 사상가를 길러내고 지도하는데 힘썼다. 그 뒤 이승만과 함께 협성회,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척족파와 대한제국 정부에 날조된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파면당하고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하고 있을 때, 침례교 선교사 스테드만(Steadman)의 집에 숨어 지내며 공주, 논산, 군산 등지에서 선교사의 개인교사를 하였다. 다시 상경하여 1900년 배재학당을 졸업한 그는 스테드만에게서 침례를 받았고, 군산에서 선교사 알렉산더(Alexander)의 어학교사로 일하였다. 또한 남장로교의 선교사인 윌리엄 불(다른 이름은 부위렴, 미국명 윌리엄 포드) 선교사 집안의 가정교사로도 활동하며 생활비를 조달했다. 유교사상의 허례허식과 위선적인 점에 환멸을 느끼고 고민하던 그는 스테드만 목사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의 세례를 받고 세례교인이 되었고, 후일 유학하면서 장로교도로 전환한다.

3. 대학 재학 시절

1902년, 본국의 부친 별세 소식을 받고 급히 귀국하던 알렉산더 의료 선교사와 함께 배편으로 일본을 거쳐 미국유학을 떠났다. 알렉산더가 그의 학비 일체를 담당해 주었기 때문에 오긍선은 걱정 없이 미국에서 공부에 전념하며 센트럴 대학 교양학부에 입학, 물리와 화학을 수료하였다. 그 뒤 1904년 센트럴 대학 졸업 후, 켄터키 주로 건너가 루이빌 의과대학(루이빌 대학교의 전신) 대학원으로 진학한다. 재학 중 미국 의사면허를 취득 후, 1907년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인으로서는 서재필에 이은 두 번째 의학박사인 것이다.

4. 의학, 사회 활동 : 인턴의 생활과 귀국

1907년 루이빌 시립병원에서 6개월간 피부과인턴의 생활을 하던 그해 10월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파견 선교사자격을 얻어 1908년 초 귀국하였다. 그해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의 야소병원을 설립하고 원장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의료봉사 겸 선교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한편 1909년 자신의 사재와 월급으로 옥구군의 구암교회 예배당을 설립, 헌당하였으며, 또한 교육선교사업에도 관심을 쏟아 군산에 안락학교와 영명학교를 세웠다.

5. 일제 강점기 후반

1921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일본 문교성 지정학교로 승격시켰고,인력과 시설을 확충시켰다.

한편 그의 대가 없는 사회사업과 선교, 의료 사업이 남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에도 알려져 1934년 모교인 센트럴 대학에서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추대하고 명예이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또한 같은 해 루이빌 대학교(루이빌 의과대학의 후신)에서는 명예법학박사를 받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을 옹호, 보호하는 등의 태도와 신사 참배 거부 문제로 조선총독부 학무국과 갈등, 마찰을 빚다가 1942년 압력으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직을 사임하였다.

생애 후반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그에게 친서를 보내 미군정 민정장관을 권하였지만 사양하였다. 1946년 전국사회사업연맹 이사장에 추대되었고, 1948년에는 대한기독교서회 이사로 참여하였다.

1. 건국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관계에 진출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안양기독보육원장으로서만 진력하였는데, 한때 불우한 처지에 빠진 나혜석을 돌보는 한편 일본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던 김명순을 국내로 데려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대한성서공회 이사장, 기독교청년회이사, 서울여자의과대학 재단이사 등을 지냈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회부장관을 제의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1950년 대한기독교성서공회 이사장이 되고, 그해 YMCA의 이사를 겸임했으나 곧 사퇴했다. 1950년부터 1951년 다시 부산 피란 시절에 구황실재산관리총국 국장직을 맡았으나 이승만과의 불화로 그만두었다. 그가 잠시나마 공직을 맡은 이유는 비록 주사였지만 한때 황실의 은혜를 입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구황실에 대한 이승만의 태도와 정부의 처사가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따졌다가 이승만 대통령과 갈등했고, 결국 총국장 직을 사직하게 된다. 이후 사회사업에 전념하였다.

1963년 5월 18일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운명할 때 '이제 여관에 있다가 이제 내 집으로 돌아간다'는 유언을 남겼다.

5월 22일 신문내예배당에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의해 의과대학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한 뒤 경기도 양주 망우리에 장사하였다.

2. 사후

1918년 좋은집의 전신인 경성보육원, 1931년 경성양로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사업 분야에서 공을 세워 많은 포상을 수여받았으나,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사상과 신념

1. 자신에 대한 엄격함

오긍선은 평소 자신에게도 엄격하였고 가족들에게도 대단히 엄격하였다. 그는 아들 오한영이 개인 병원을 설립하려 하자 의사는 이익을 취해서는 안된다며 반대하였다.

한편 당대의 지식인들과 사대부들이 첩을 두고, 기생첩과 내연녀를 두는 것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또한 자신보다 나이가 5세 연상에다가 마마를 앓다가 얼굴이 곰보가 된 아내 밀양박씨와 평생 해로하였고, 다른 여자들의 유혹을 모두 물리쳤다. 또한 그는 자식들에게도 평생에 이혼이란 있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다. 엄격한 태도 중간 중간 그는 농담을 즐기기도 하였다. 하루는 그의 한 외손녀가 서양인들은 왜 털이 많으냐고 묻자 그는 그래서 전털맨(全)이라 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젠틀맨을 한국어화한 농담이었다.

2. 자유주의적인 가치관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만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웠다. 초기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를 엄격하게 금지했지만 술과 담배는 하나의 취향이라며 금연, 금주를 거부하였다.

평가와 비판

의학 교육과 선교, 보육, 사회봉사사업에 헌신하였고 사심이 없이 사회환원을 하였다는 반면에, 권위주의적이고 자존심이 강하다는 시각이 있다. 윤치호는 그가 외국인 선교사들을 너무 고압적으로 대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오긍선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 최초의 양의사로서 서양의학의 선구자이며 기독교적 양심을 지닌 사회사업가, 또는 기독교와 의술을 출세에 이용한 기회주의적 친일인사라는 이중적인 판단이 상존하고 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후신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은 해관 오긍선 기념사업회와 함께 매년 기념 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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