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선 목사(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교회를 위한 개혁주의 연구회 회원)

오늘날 우리시대의 설교자들이 거의 다루지 않는 설교의 주제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서, 주로 ‘죄’(sin)와 관련한 주제들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전적 부패’(Total Depravity)의 교리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으며, 그런 만큼 이해되지도 않는 주제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서 전적 부패(혹은 타락)에 대한 이해는, 우리 자신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교리다. 왜냐하면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의 초반부에서 다루는 중요한 신학적 맥락이 바로 ‘비참’(misery)인데, 바로 그 비참에 대한 이해가 깊을수록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고 한 사도바울의 고백에 온전히 동참하게 되며, 바로 그러한 깊은 탄식을 배경으로 비로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라고 한 사도바울의 감사에 참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을 통해 고백되어 우리에게까지 알려진 인간의 ‘부패’는 참으로 전적인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어느 것 하나도 부패하지 않은 곳이라고는 없는 것이니, 심지어 우리의 신앙심(혹은 종교심)조차도 부패하여 온전하지가 못한 가운데 있을 뿐인데도 흔히 이를 망각하기가 쉽다. 성경은 사람(Adam)의 타락과 동시에 모든 형상(image)에 있어서 타락한 인간의 실상을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고 표현하며, 동시에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게 되었다고 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스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 3:7)고 했으니, 이처럼 사람은 타락과 동시에 어둡게 총명해져서 곧장 스스로를 은폐하게 된 것이다.

노벨리의_카인과_아벨

한편, 성경은 그처럼 교묘히 부패한 인간의 상태를 곧장 언급하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 4장 초반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와 관련한 본문이다.

사실, 창세기 3장의 본문들로 보건데 인간은 창조와 동시에 그 안에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 곧 신앙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 지니는 독특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 반영된 것이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도 사람은 유일하고도 탁월한 존재로서 동산에 거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타락 후 인간이 지닌 신앙심조차 어떻게 부패했는지에 관해, 창세기 4장은 곧장 소개하고 있다.

우선 정황상으로 보건데,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에게 제물을 요구하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부패한 채로 남아 있는 신앙심 가운데서 사람의 후손들은 각각 자기가 수고한 것들의 일부를 가지고 제사의 예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 26:1-11절의 본문으로 보건데 창세기 4장에서의 제물은 그 외양에 있어서는 가인의 것과 아벨의 것이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가인이 바친 제물의 성격이 무엇이었는지는 곧장 드러나고 마는데, 그 성격은 창 4:5절에서 단적으로 표출되어있다. 그러므로 요일 3:12절은 창세기 4장의 가인에 대해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고 했다. 가인의 제물드림은 오히려 자기 자신의 공로(contribution)를 드러내려는 악행이었고, 그에 반하는 아우의 의로움에 질투와 분노가 불타올랐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가인의 제물이 어찌 존중(respect)될 만한 제물이었겠는가? 잠 21:27절 말씀과 같이 “악인의 제물은 본래 가증하거든 하물며 악한 뜻으로 드리는 것”이겠는가!

반면에 히 11:4절에서 사도는 아벨의 제물에 관해 이르기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존중하시어(열납하시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셨다.

그러나 그런 아벨의 ‘의’와 ‘증거’의 결과는 참혹한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그의 믿음이 존중됨과 동시에, 그의 몸은 형의 분노한 눈빛 가운데 휘두르는 폭력에 피를 흘리며 부서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벨의 제물만이 아니라 아벨 자신이 친히 희생물이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희생(구속)을 바라보는 믿음의 예표로서 지금도 말(증언)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가인의 후손으로서의 그런 악한 질투와 분노가 모든 인류에게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빌 2:3)기보다는, 남들보다 자기를 낫게 여기는 마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 집중되는 사랑과 관심을 도무지 감당하지 못하여, 겉으로는 축하하며 부러워하지만 속으로는 질투와 분노를 일으키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함께 고생하며 곤란 가운데 있을 때에는 언제까지나 도움을 주고 싶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내가 저 자와 무엇이 다르기에 저 자만 잘되는가? 하는 질투와 시기로 바뀌기가 십상인 것이다.

결국 신자라 할지라도, 우리 속에는 여전히 부패가 교묘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그리하여 가장 고상하게 보이는 신앙의 형상 가운데까지 비릿한 타락과 부패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가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비난과 질시로서가 아니라 조용한 권면으로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창 4:7)고 말씀하셨다. 자기 의(혹은 자기 애)와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창 2:16-17)에 착념하는 것이야말로, 죄를 다스리는 최고요 유일한 첩경인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읊조리는 자로다.”(시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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