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예장합동 교단의 대형교회에서 원로목사를 이을 후임목사의 선임과정에서 여러 차례 스캔들(scandal)과 분란이 일어났을 때에, 한 선배로부터 “목사는 교회를 떠날 수 있어도, 성도는 결코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그러한 말의 출처는 ‘회중주의’ (Congregationalism)를 채택하는 교회들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마도 조직교회의 주인은 회중을 구성하는 신자들이라는 사고가 은연중에 작용하여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장로교회들이 생각하는 교회론은 그처럼 회중과 관련한 언급이 없으며, 오히려 교회의 표지(Marks)라고 하는 ①성경에 충실한 말씀의 선포, ②성경에 따른 온전한 성례의 시행, ③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권징의 시행이라는 세 가지의 기준이 있을 뿐이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그러한 교회의 표지들을 이상적이고 비가시적인 교회의 분별과 관련한 기준인 것처럼 여긴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표준문서로 채택하기 전까지 스코틀랜드교회의 개혁을 주도했었던 제1 스코틀랜드 신앙고백(1560) 제18조에서는 “참된 교회와 거짓 교회를 구별하는 표지와 교리에 대한 바른 판단에 관하여”라는 주제 가운데 언급하기를, “……어느 때나 이 표지들(말씀, 성례, 권징)이 보이며 시행되고 있는 곳이면, 교인의 수가 많든지 적든지, 거기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의 참 교회이다.”라고 했다. 

 

아울러 “이것은 위에서 말한 보편적인 교회(Catholic church)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고린도, 갈라디아, 에베소 교회와 바울이 사역을 시작하여 자신이 교회라고 칭했던 다른 곳들과 같은 지역 교회에 해당되는 것이다.”라고 언급함으로써, 교회의 표지들이 결코 이상적이고 비가시적인 교회의 분별과 관련한 기준이 아님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장로교회들은 바로 이 세 가지의 표지를 가지고 교회의 순수성 여부와 정도를 판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의 조직교회들 가운데 100% 순수한 교회는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 5항에서 “하늘 아래에 가장 순수한 교회들도 혼합과 오류 양자의 영향을 받고, 심지어 어떤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탄의 회중이라 할 정도로 타락한다.”고 언급한 것처럼, 이 세상의 교회는 정도에 따른 차이가 있을 뿐, 완전하고 순수한 교회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 5항은 문장의 말미에 덧붙이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지상 교회가 항상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교회의 표지를 기준으로 그 순수성을 판별해 볼 때에,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들, 그 가운데 장로교회들조차도 터무니없이 함량미달인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 6항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교회의 머리가 없고, 또한 로마의 교황도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교회의 머리일 수 없다.”고 분명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어떤 장로교회 목사라는 자가 "자신의 교인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속옷을 내리라는 자신의 말에 그대로 따를 수 있는지 보면 된다"고 말할 정도로 극심하게 썩어있다. 감히 그따위 망발을 버젓이 하는 것은, 6항에서 “적그리스도요, 불법의 사람과 멸망의 아들”이라고 한 로마가톨릭의 교황조차도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것은, 그런 말을 들으며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도, 정작 교인들이 그 집(예배당)을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치 자학증(masochism)에 걸린 듯, 막 대하며 천시할수록 소속감과 안정감을 갖는 노예근성에 사로잡힌 듯, 오히려 여전히 그 집은 일사불란(一絲不亂) 하다는 것이다. 레위기 14장에 언급한 것처럼 그 집에 온통 우묵하고 부정한 색점(곰팡이)들이 가득한데도, 담임이라는 자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 옴짝달싹 할 수 없는 것이 그 집 사람들의 모습이다.

 

왜 사람들이 그 지경이 되었을까? 그렇게 된 것이 전적으로 그 담임이라는 자의 잘못 뿐일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단언컨대 그렇게 된 책임은 그 담임이라는 자 뿐 아니라, 그에게 맹종함으로 소속감과 안정감을 찾은 신도들에도 분명한 책임이 있다.

 

사실 교회의 표지들 가운데서 알 수 있듯이, 교회가 보이게 되는 것은 늘 성경의 진리에 근거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진리로서 해석하여 설교하는 목사들이야말로, 교회를 드러나게 하며 세우는 핵심적인 일꾼인 것이다. 그런 일꾼이 그 핵심적인 일을 등한시하거나 거짓으로 만든다면, 다른 돌(일꾼)로 그 돌을 대신하며 다른 흙으로 그 집(예배당)에 바름이 마땅하다. 마찬가지로 그런 교회의 회중을 이루는 신자들이 그 핵심적인 표지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런 신자(사실은 불신자)는 긁어내어 성 밖 부정한 곳에 버려야 마땅하다.

 

그런데 일찍이 제네바를 이어 스코틀랜드에 세워진 장로교회에서는 항상 교회당을 중심으로 한 공적 신앙과 경건에 더불어, 각 가정을 중심으로 한 사적 신앙과 경건의 중요성을 직시했었다. 그래서 가정예배와 개인예배(secret worship)를 강조했었고,이를 위해 가장(head of the family)의 역할과 책임을 당회와 심지어 노회에서까지 행정적 관심으로 지도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 장로교회들, 특히나 우리나라의 장로교회들과 노회들은 사실상 가정예배와 개인예배의 중요성을 전혀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떻게든 예배당으로 신자들을 모이도록 하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신자들의 가정과 개인이 성경을 바탕으로 그 스스로 분별하여 걷도록 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신자들이 예배당에서는 그럴 듯(?)한 신자(Christendom)들이지만, 그 집(예배당)을 나가자마자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맹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맹인의 눈은, 자신들이 모인 집에 우묵하고 부정한 곰팡이가 창궐해 있으며, 그 곰팡이의 출처가 바로 자신들의 집 머릿돌이라는 사실조차 분별하지 못한다.

 

그러니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이 때에, 정작 500년 동안의 우묵하고 부정한 색점들로 가득히 채워진 교회의 돌들과 흙들을 긁어내기에 앞서, 개인과 가정에서부터 무지와 게으름의 부정한 색점들을 긁어내고 성경의 진리와 교훈들로 대신하는 진정 정결한 개혁을 시도하도록 하자. 그래야만 자신들이 속한 예배당에 있는 곰팡이와 색점들이 푸르거나 붉은지, 그리고 우묵한지의 여부를 비로소 볼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비록 교회의 두 표지(성례, 권징)는 긁어내기 어렵더라도, 가장 중요하며 근본적인 표지인 말씀, 즉 성경의 진리는, 각자 개인적으로, 그리고 각 가정에서 얼마든지 긁어내어 개혁할 수 있는 판결규례들을 제공할 것이니, 개인적으로, 그리고 가정에서, 지금부터라도 성경을 펼쳐 읽고 토의토록(way of conference)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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