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1-18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담임목사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 서서 울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는 갈릴리 근처의 한 마을이며, 막달라 마리아란 막달라라는 곳에 사는 그 마을 처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란 이름은 히브리어의 "마라"에서 온 것으로 고통 또는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룻기 1장 20절을 보면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고 난 후에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그 만큼 남편과 자식을 잃은 슬픔이 크기에 "기쁨" 이란 뜻의 나오미가 고통이란 뜻의 "마라"로 바꾼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막달라 마리아는 그 이름처럼 정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여인이었습니다. 성경을 잘 연구해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남편도 없고 자녀도 없습니다. 부모도 없고 친척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이 자세히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는 과부나 창녀, 또는 결혼을 하지 않은 처녀였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막달라 마리아는 분명히 가난한 여인이었고 괴로운 인생을 사는 여인이었으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외로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비참한 것은 누가복음 8장 2절을 보면 그녀는 일곱 귀신이 들린 여자였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린 채 가난하고 외로운 비참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귀신이란 존재에 대하여 말하길, 귀신은 “타락한 천사”라고 말합니다. 한국의 김기동이라는 목사는 1970년대에 소위 “귀신론”이라는 신학으로 한국 교회를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그 분은 창세기 6장 3절의 말씀과 한국의 무속 신앙인 귀신관을 합쳐서 이상한 귀신론을 만들어 내어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시켜 왔습니다. 

김기동 목사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날수를 120년으로 정하였으며 따라서 그 전에 죽는 사람은 그 남은 기간 동안 구천에 떠돌면서 착한 귀신 또는 악한 귀신으로 활동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고약한 인간이 40에 죽으면 80년 동안 이 세상에 귀신으로 떠돌며 고약한 짓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좀병이든 감기병이든 다 이 못된 귀신들이 하는 짓이라 하며, 따라서 우리는 병을 낫게 하기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귀신을 내어쫓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무좀 귀신아 물러가라!"는 기도와 축술을 자행합니다.

사실 너무나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남침례회 뵈뢰아 신학"이라는 명칭 아래 가르쳐졌던 이 이단적 엉터리 귀신론이 아직까지도 여러 형태의 다른 간판 아래 많은 어리석은 성도들에게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귀신이란 죽은 사람의 영혼이 아니라, 사탄의 종들이며 타락한 천사들이며 지,정,의가 있는 영물입니다.

이와 같이 김기동 목사는 엉터리 귀신론을 가르쳤으나 또한 극 반대편에서는 귀신이나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경향도 있습니다. 과학과 이성을 믿는 현대인들은 마귀는 지어낸 이야기라며 귀신 이야기를 하는 성경을 업신여깁니다. 귀신은 단지 인간의 신체적 화학 작용이나 정신적 착란 증상으로 보며 마귀의 일을 우습게 봅니다. 이들은 현대 의학 및 과학과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지나치게 신봉함으로 사탄의 악한 역사를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에는 전통적으로 굿이 있고 무당이 있었습니다. 저도 어렸을 적에 굿을 여러 번 보았습니다. 늙은 노파가 화장을 진하게 하고 무시무시한 칼을 휘두르며 덩실 덩실 춤을 추고, 이상한 주문을 외고 야릇한 냄새가 나고, 여러 가지 천박한 색깔의 옷과 주렁주렁 매달린 천 자락들이 기억납니다.

사탄의 역사를 아는 성경학자들은 말하길, 보통 이러한 무당들에게는 한 귀신이 들락 달락 한다고 합니다. 귀신들린 상태의 증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고 하는데요, 귀신들린 상태란 간단히 요약하면, 내가 내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영적 존재인 귀신이 나를 자기 마음대로 끌고 다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귀신들린 사람들과 그들의 증상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버젓하게 생긴 사람이 귀신이 들려서 캄캄한 밤에 무덤에도 가고, 낮에는 가만히 일을 하다가도 갑자기 머리나 손, 팔, 다리 등을 칼로 찔러 피를 흘리기도 합니다. 아주 착하고 얌전하던 사람이 귀신이 들리면 이루 말할 수 없이 과감하여지고 살인도 하고 도둑질도 합니다. 힘도 얼마나 센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들리면 인간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온갖 무서운 행위를 자행합니다.

꽤 오래 전에 감옥 선교로 한국에서 크게 활동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박효진 장로라는 분입니다. 그 분의 간증에 의하면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연쇄 살인과 또는 사람을 수도 없이 죽이고 감쪽같이 흔적을 제거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주 힘이 없고 조그만 사람일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그 작고 힘 없는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데, 나중에 보면, 장정 네 다섯 명이 하루를 걸쳐 파야 하는 땅을, 밤에 사람을 죽인 후, 2-3 시간에 땅을 파서 사람을 파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보면서 박효진 장로는 이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귀신이 들려서 순간적으로 힘이 장사가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아무튼 신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귀신이 들리는 상태는 간질병이나 발악, 미치광이의 병이 동시에 함께 하고, 특히 현대는 마약이 있는 곳에, 또한 발광하는 듯한 음악으로 사탄을 의도적으로 숭배하는 곳에서 귀신이 활동하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과거에나 현재에나 꼭 같은 분명한 귀신들린 증상이 있는데 이는 바로 이중인격, 삼중인격자 등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통해 귀신이 말하고 귀신이 행동합니다. 여자인데 남자소리가 나고, 남자인데 여자로 행동합니다. 내 몸을 이용하여 귀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심지어 얼굴 표정으로 동물의 흉내도 내고 동물 소리도 냅니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 기쁨과 슬픔, 고통이 몇 초 간격으로 심하게 바뀝니다. 왜냐하면 귀신이 들어가서 귀신들린 사람의 몸을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귀신이 들린 사람의 삶은 만신창이요, 원치 않는 죄악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는 바로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일곱 명의 서로 다른 귀신이 이 여인의 마음과 몸과 입과 얼굴을 자기들 원하는 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이 여인의 상태는 구제 불능이며, 지옥자체이며, 죄악 덩어리요,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는 최악의 공포의 상태였습니다.

귀신 하나 들려도 온 집안과 마을이 난리법석이 나는데 일곱 귀신이 들렸으니 어떠했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홀로 버려진 여인일 뿐만 아니라, 무섭고 끔찍한 사탄의 죄 사슬 아래, 난폭하고 악랄한 귀신들의 폭력과 고통 속에 신음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언제라도 발작에 의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악령이 가득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친구도 없었으며 또한 모든 사람 및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일곱 귀신들에게 너무나 많이 유린당하여 만신창이가 되고, 시시때때로 원치 않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죄악과 사고들을 치고 다니는 상태의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가끔 귀신들이 쉬는 틈을 통해 자신이 벌려 놓은 일들을 보면 너무나 어이가 없어 날마다 죽고만 싶은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을 용기와 힘마저 상실한 가엾은 여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련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그날! 주께서는 이 여인에게서 일곱 귀신을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그날은 마리아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던 날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상태, 곧 마리아 자신이 자신의 몸과 마음과 입과 얼굴을 다시 얻는 날이었습니다. 정말로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더럽고 비참한 존재, 곧 더럽고 악랄한 귀신에 의해 이제 내 삶이 조절 당하지 않고,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 볼 수 있는, 영혼의 참된 자유 함을 얻는 광명의 날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있어서 주님을 만난 그 날은 그녀의 인생 속에서 최고의 날이요 가장 멋진 날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마리아 자신의 원래 모습대로 조용히 제 정신으로 앉아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귀신이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귀신으로부터 해방될 때의 그 환희와 그 기쁨과 그 감격과 감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을 귀신의 저주와 사슬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우리 예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눅 8:1-3)"

일곱 귀신이 나간 이후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깊게 사랑하고 존경하며 주님 평생에 그 분 곁에서 우리 주님을 섬겼습니다.

주님과 열 두 제자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가서 그들과 함께 다니며 이들이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일을 돕기 위해 여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기쁨과 헌신으로 했던 것입니다.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옷도 꿰매고 청소도 하고, 심지어 굳은 일을 하여 돈도 벌어와서 주님 및 열 두 제자들의 일을 온 마음을 다해 도왔습니다.

아무리 일이 고되더라도 자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주신,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주님의 일이므로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 얻은 자신의 몸, 용서 받은 죄악들, 죄로부터, 사탄귀신으로부터 구원 받아 해방된 새 인생으로 그녀는 오직 주님만 사랑하고 맘껏 주님을 섬기는 여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시게 됩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로마 병정에게 끌려가는 주님을 본 막달라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주님이 얼마나 정직하시며 얼마나 사랑이 많으신 분이신 줄을 잘 아는 마리아입니다. 그분은 마리아가 마음과 사랑을 다 바쳐 섬겼던 고귀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어떻게 해서든 막고 싶은데, 막고 싶어도, 돕고 싶어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힘없는 여인일 뿐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님이 십자가를 끌고 가시는 그 곳까지 막달라 마리아는 초조와 염려와 두려움과 좌절 속에 주님을 따라오게 된 것입니다.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따르며 섬기던 자들이요 또 이 외에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도 많이 있었더라](막15:40-41)

새로운 삶은 얻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우리 주 예수님은 새로 찾은 유일한 삶의 목적이요, 위로요,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현장에서 느끼는 이 무능하고 가엾은 한 많은 여인의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좌절과 공포는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주님의 모습은 그녀의 삶에 있어서 소망과 기쁨은 철저하게 사라지고 오직 산산 조각난 남은 삶을 의미할 뿐이었습니다. 또 언제 일곱 귀신이 다시 올 지도 모릅니다. 이제 주님을 만나 간신히 되찾은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들을 다시 다 잃어버린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 지, 무엇을 해야 할 지,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이런 슬픔의 마음으로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는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통하며 신음하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 봅니다. 그녀는 눈이 아니라 찢어지는 가슴으로 사랑하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고통 당하심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고통을 바라보는 마리아, 그리고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되돌아보는 마리아! 그 마리아는 다시 ‘마라’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너무나 많이 사모하는지라, 끝까지 예수님의 시신이 묻힌 무덤까지 본 후에야 무거운 걸음, 가슴을 치는 슬픔을 안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잠깐 주님의 무덤을 떠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의 1절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니, 안식일 끝나기를 간절히 기다린 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에 와보니 돌이 무덤에서 옮겨져 있었습니다. 무덤 안을 보니 주님이 없습니다. 난리입니다. 큰 일입니다. 더 큰 절망입니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한 마리아는 마지막으로 그 시신에 향을 뿌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길 원했는데. 그런데 잠깐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자리를 빈 시간에 주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시체를 찾으려고 급하게 뛰어다니지만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걸 어쩌나! 주님의 시체가 없어지다니. 이걸 어쩌나! 어쩌나!’
우리는 힘없는 한 여인의 버둥거림을 봅니다.

마음이 너무 급한 마리아는 간신히 제자들을 기억해 내고는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슬픔의 달림입니다. 가난한 농부의 딸이 병든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을 알리기 위하여, 들에 있는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그 슬픈 소실을 알리기 위하여 달리는 그러한 슬픔과 눈물의 달리기입니다. 이 슬픈 소식을 빨리 제자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베드로와 요한을 만납니다. 마리아는 고통 속에 좌절 속에 숨을 헐떡이며 외칩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의 시체가 없어졌어요! 우리 주님의 시체가 없어졌어요!”
퉁퉁 부은 얼굴로 하염없는 눈물 속에서 외치는 좌절의 절규였습니다.

시체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둘이 같이 달리더니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무덤에 도착했습니다. 아마도 젊고 힘있는 요한이 더 빨리 달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이 무덤 안을 먼저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무덤 안을 보니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곧 바로 베드로도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무덤 안으로 들어가 자세하게 확인을 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세마포와 수건이 있었는데 서로 딴 곳에 개어서 놓여 있었습니다.

그때 요한도 무덤 안으로 들어와서 보고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그 귀한 말씀, 곧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의 반응은 참으로 기이하였습니다. 무덤 안에서 시체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들이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아, 막달라 마리아가 말한 것처럼 정말로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구나.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네들의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시체가 확실이 사라진 것을 본 제자들의 반응은 마리아에게는 정말로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들이 눈물 흘리며 시체를 함께 찾기에 온갖 노력을 할 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시체마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허탈한 마음으로 뿔뿔이 흩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 마리아는 홀로 남아 무덤 밖에서 서서 울고 있습니다. 그래도 제자들은 갈 곳이 있었으나 막달라 마리아는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 계시는 곳이면 그곳이 이 여인의 집이었습니다. 이제 갈 곳이 없습니다. 그 당시는 도굴범들이 하도 많던 시대라 그녀는 오직 누가 우리 주님을 훔쳐 갔을까 라는 걱정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근심 속에 있던 마리아의 손에는 여전히 향유가 쥐어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시신에 향유를 부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주님의 시체라도 보며 향유를 뿌리면서 시체 썩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연장시켜 볼 수 있었을 텐데…. 이 한 맺힌 여인의 사랑과 감사를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주님의 시체가 있던 곳에서 향유만 들고 멍청이 서서 기다리고, 울고, 낙망하고, 어디로 가야 할 지 깜깜한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여인입니다.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주님은 분명히 안 계신데, 또 혹시 하고 울면서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 봅니다. 다시 무덤 안을 들여다 볼 때, 놀랍게도 횐 옷 입은 두 천사가 있었습니다. 천사 하나는 예수님의 시체 뉘었던 곳의 머리 편에 앉아 있었고, 다른 천사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마리아는 자기 앞에 나타난 천사들을 보고도 슬픔을 멈추거나 또한 놀라거나 큰 위로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에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말을 합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마리아는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라는 묻지 않고 단지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즉, 오직 이 여인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시체이며 누가 그것을 가지고 갔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천사가 앞에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말을 한 후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마리아는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요 주님을 만날 것을 조금도 기대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대답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 예수님의 시신을 옮겼습니까? 어디다 옮겼는지 말씀해 주시면 내가 그 시신을 가져 가리이다." 
눈은 퉁퉁 붇고, 고개는 슬픔으로 숙여 있고, 흐느끼는 고통 속에 마리아는 전혀 주님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16절을 보니 눈물의 여인 막달라 마리아를 우리 주님이 부르십니다. 다정한 목소리요, 마리아의 슬픈 마음을 잘 아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입니다. 
"마리아야”

부활하신 주님이 친히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실 때, 그 음성은 늘 듣던 우리 예수님의 목소리였습니다. 그러자 마리아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랍니다. 주님을 알아 봅니다. 터질 것 같은 반가움과 기쁨으로 마리아가 대답합니다. 
"라보니!" "주여" "선생님"
감격의 눈물을 터뜨리는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가 너무나 반가와 주께로 달려가 주님께 메어 달립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진정시키며 말씀하십니다. 
"마리아야, 이렇게 오랫동안 내게 메어 달리지 말아라. 나는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내가 너에게 곧 성령으로 다시 오마. 자, 너는 나의 형제들에게 가서 이 말을 전하거라. 내가 내 아버지 곧 너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 마리아는 방금 전까지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보는 순간, 그녀에게는 그 모든 슬픔과 절망이 완전히 사라지고, 도리어 감당할 수 없는 기쁨과 함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더 가까운 교제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약속대로 부활 승천 이후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성령으로 이 땅에 오셔서 그녀의 마음 속에 임하셨습니다. 그녀에게 이 사실은, 곧 부활하신 주님이 성령으로 자신의 영혼 속에 계신다는 사실은 가장 큰 축복과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는 주님을 실제적으로 눈과 눈으로 만나볼 날을 기다리며, 성령으로 자신의 영혼에 와 계신 주님을 사랑하며 주께서 그녀에게 맡기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그녀의 죽는 날까지 기쁨과 확신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즉, 우리는 주님을 두 번 만나야 합니다. 그 두 만남은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고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오직 한 번 만납니다.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만을 만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 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용서는 받았으되 날마다 패배하고 쓰러져 우는 마리아가 아니라, 진정 기독교의 승리의 시작은, 부활로 승리하신 그 주님을 우리의 실제 생활 속에 체험하며 만나는 역사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성령 강림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이 땅에 살지만 하늘 나라의 시민이며, 죄 많은 세상 속에서도 친히 우리의 경험 속에 영적으로 우리 주님을 실제로 만나며, 그 부활의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풍성한 하늘의 비밀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을 만나기 전 막달라 마리아처럼 일곱 귀신 들린 상태의 사람들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탄과 죄라는 폭군 아래 신음하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를 이기고 싶어도 이길 수 없던 비참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나요. 아니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의 마리아의 모습인지요. 아니면, 아예 아직도 죄와 미신과 무식 속에서 사탄의 노예로 살고 있는 일곱 귀신 들린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않는 신앙 생활은 아무 의미가 없는 세상 사람들의 인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모를 때, 우리는 하늘의 기쁨과 신령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미움과 시기와 분쟁과 악독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는 인생은, 자신들의 짧은 자존심과 세상에서 배웠던 이기적인 삶의 자세로 살기에, 그들의 삶에는 죄악으로 점철된 삶의 비참과 회의만을 느끼며 살 뿐입니다. 그러한 신앙 생활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능력이 없습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 계속 죄에 거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분명히 확신, 기쁨, 능력, 감격, 춤을 출 듯한 황홀함 가운데 성령 충만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의 그 아름다운 결단들이 사라지는 것일까요!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다 엉터리로 신앙 생활을 하더라도 나만은 바른 그리스도인,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리라고 결심하던 그 결단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 말입니다.

여러분! 그 이유를 알고 싶습니까? 그 이유는 다름아닌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더 이상 만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께로 돌아갑시다. 우리를 만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온갖 고통을 당하시고, 무덤에 들어가셔서 갖은 수모를 겪으신 우리 주님! 만일 우리가 오늘의 삶의 순간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을 만나지 않고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 귀한 피는, 우리에게 아무런 효력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보지 못한 성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하게 되고, 발에 밟히는 쓸모 없는 소금처럼 될 것이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이용 당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슬픈 주인공들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주님을 모르는 자들은 구원을 받은 것 같으나 구원의 능력을 모르는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서 역사하기를 기뻐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통하여 우리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성령은 부활의 영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즉,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참된 희망과 기쁨과 인생의 벅찬 감격을 날마다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 그 분은 하나님 보좌에 앉아 계신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이시고,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 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좋은 소식은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성령으로 우리 마음 속에 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 8:9-10).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났던 바울은 이 사실을 체험적으로 철저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믿으십시오. 믿고 주를 의지하기 바랍니다. 성령을 의지하기 바랍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처럼 주님의 죽음만 보는 자는 상한 심령이 되고 다시 외롭고 방황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가 될 때, "랍오니" "오 주님" 하고 외치며 감격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에게 부활하시고 승리하신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모든 슬픔, 고통, 외로움과 좌절을, 마리아가 체험했던 기쁨과 감사와 승리로 바뀌어 주시길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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