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30) - 솔로몬(2)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황금시대는 다윗과 솔로몬 왕 때였다. 솔로몬은 아버지 선왕의 나라를 더 공고하게 하고 더 발전시키는 지혜로운 왕이었다.

이 솔로몬의 평가와 기사는 신명기 역사서(열왕기상1-11장)와 역대기 역사(역대기상 1-9장)에서 다르게 나온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 때는 승승장구 성공하는 인생을 살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우상 숭배할 때는 실패와 어려움을 당한다는 기록이 열왕기상에 나온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그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령하사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 하셨으나 그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내 언약과 내가 네게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반드시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왕상11:9-11).

하지만 역대기 역사에서는 다윗과 솔로몬의 부정적인 기사는 없다. 성전 건축을 준비한 왕으로서 다윗을, 성전 건축을 완성한 왕으로서 솔로몬은 이상적인 왕이며 역사에서 본받을 왕의 모델이 되었다. 다윗왕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 솔로몬은 이 수도를 더욱 발전시켰다. 솔로몬은 왕궁을 큰 규모로 세우고 성전과 연결하였다.

열왕기상에서는 건물의 자세한 사항이 나온다(왕상5:1-7:51). 외국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받는다. 건축가와 일꾼들이 페니키아에서 들어와서 상당히 발전된 문명으로 궁전과 성전이 설계되었다. 지성적이고 종교적인 중심지로서, 온 이스라엘에서 예루살렘의 중요성은 성전건축이었다.

다윗이 이미 법궤를 옮겨오면서 건축을 시작하면서 솔로몬이 예루살렘 시온 산 위에 성전을 건축한 것은 이전의 예배 형태가 바뀌는 것이었다. 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하나님 임재가 있는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솔로몬은 종교적 안정을 찾은 다음, 지적이고 문화적인 생활을 가져왔고 활발한 외교활동으로 수많은 나라 왕의 딸, 이방 여인을 왕비로 삼아 국교를 수립하고 국력을 신장하였다. 또 무역을 활발하게 하였지만 이웃 나라를 굴복시키며 다윗의 제국을 유지시키는 데는 실패하였다.

Solomon and the Queen of Sheba, painting by Giovanni Demin (1789-1859)<솔로몬과 시바 여왕>

더욱이 성전과 왕궁, 건설 사업을 통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짐을 부여함으로 막대한 재원이 상실되고 백성에게 부담이 크게 되었다. 또한 이방 여인과의 혼인은 우상 숭배를 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것이 나라를 위기에 빠지게 하는 화근이 되었다.

더 나아가 여로보암의 반란과 노동력의 과중한 부과는 나라가 어렵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로의 아히야 예언자는 한 나라가 분열되어 새 나라가 세워질 것을 말했다(왕상11:29-39).

여로보암은 반란에 실패했지만 애굽으로 피신하였다가 솔로몬 사후에 다시 돌아와 북 이스라엘을 세우게 된다. 주전 926년 솔로몬이 죽자 르호보암은 북 이스라엘과의 협상에서 실패하고 베냐민 지파와 더불어 남쪽에서 조그만 나라로 남아서 다윗 왕조를 이어가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 왕국의 찬란한 첫 시기는 솔로몬의 실패와 더불어 끝나게 된다. 역사는 솔로몬 치적의 명암 있는 이중성의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돼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시니”(왕상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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