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날을 기념하여 할머니를 추억한다.

할머니에 대한 변론 


우리 시대 할머니는
베란다 구석에 있는 다듬잇돌처럼 
거기에 그냥 있기만 하면 된다
꼭 계셔야 한다고 느끼지 않는다
할머니가 자기 방에서 나올 때에야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할머니는 지난 시대 유물처럼
아파트라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그런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서 
보관함 유리창을 깨고 나오다 일찍 죽었다

할머니는 같이 사는 해피라는 개만도 못해서
바퀴벌레처럼 멀리 가라고 약을 뿌린다
그래서 작은아들 집 목동에 갔다가
또 약을 뿌리면 수유리 둘째 아들 집에 갔다가
종국에는 큰아들 집 봉천동에 반영구적으로 보관된다

할머니는 서러워하지도 않는다
세상 공기가 다 더러워지고
고향에 가도 예전같이 않다는 것을 알기에
포탄 터지는 전쟁 마당보다야 나은 것이라고
그나마 길바닥에 떠도는 눈이 노란 할머니도 많다는 소리에
낡은 텔레비전만 온종일 보다가 
혈압약, 당뇨약, 비타민 C 차례로 드시고 꾸벅꾸벅 존다

할머니는 똑똑할수록 욕을 먹는다
절인 배추 덩이처럼 몸에 힘이 없어야 할머니다
살 속에 뼈는 있는 것인지 옷을 겹겹이 입어야 할머니다
자는 것이 아니라 자야 하기 때문에 눈을 붙인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어제 아침 같은 내일이 도착해 있는 것을 볼뿐이다

할머니는 다들 깊은 잠에 빠진 새벽이면
몰래 일어나 소리 없이 자기 문을 열고 
부엌으로 나가 아침 준비 상태를 조용히 시찰하고 
다시 몰래 들어와 남이 깨줄 때를 기다리다가
그것도 잊어버리고 깊은 잠을 잠깐 그때 잔다

할머니는 아무도 올려다보지 않는 가로수처럼 
동네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 계신다
스펀지처럼 포착된 모든 광경을 흡수하고 저장한다
등껍질 무거운 거북이처럼 아무 말 않고 거기 계신다
조용히 썰물처럼 사라지는 것 같지만 
달이 힘없이 허공에 걸려 있어도 꼭 뜨는 것처럼
할머니는 언제나 거기에 빛바랜 사진처럼 살아 계신다

최충산 목사, 개금교회를 은퇴하고 경남 고성에서 바이블학당을 운영하며 시인으로 작품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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