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가족예배에서 전한 메시지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연세대학교 전자공학,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현재 인천 송도거주)

이 말씀의 장면은 주님의 마지막 만찬입니다. 잠시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제자들과는 이별 직전에 갖는 마지막 만찬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별 직전이나 죽음 직전에는 가장 중요한 말이나 마지막 부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남기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런데 주님의 명령에 이상한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 “새 계명”을 준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사실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구약 율법에 있읍니다. 레위기 19장 18절을 보면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구약을 인용하여 사랑을 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구약의 율법을 요약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장면에서 주께서는 “율법에서 말하는 것 같이”, 또는 “내가 전에 말하였던 것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라” 하시며 이 계명은 분명히 새로운 계명이며 따라서 구약의 계명과는 구분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께서 당부하시는 ‘사랑하라’는 계명은 왜 새 계명입니까?

성경을 좀 더 자세히 보면 성경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그의 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을 보면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왜 이 계명은 "새 계명" 또는 "그의 계명"일까요?

34절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가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새 계명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에 이전의 사랑의 계명과 구분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단서 때문에 주의 사랑하라는 계명은 “새 계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이 오셔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니, 제자들은 주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2-17절은 구체적으로 이 새 계명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장의 구절을 통해서도 우리는 다시 한번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라는 단서 때문인 것을 확증할 수 있고 또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란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 즉 죽음을 통한 십자가의 사랑인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많은 과실을 맺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참으로 ‘서로 사랑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려는 자들 모두에게 그들이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응답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2절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따라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사랑의 새계명은 언제나 그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은 십자가에서 피를 쏟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하라고 주께서는 죽음 직전에 새계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새계명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고 나아가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이는 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도록”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고 나아가 그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생명을 성령을 통해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이 새 계명은 천국의 유일한 계명입니다. 또한 주님과의 새 언약 속의 유일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6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또한 요한일서 4장 7-8절은 새 계명을 지키는 자들만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라고 선포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즉,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증거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사랑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들만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으니, 그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증거, 제자로서의 증거는 오직 이 사랑이요, 이 사랑을 순종하여 행할 때, 우리가 구하는 데로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이 새로운 계명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드리는 간구는 다 응답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랑을 행하는 자를 통해 가정에 천국이 이루어지고 교회가 풍성해지고 직장이 변화되며 나아가 사회가 밝아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사람과 구별시키는 것이 바로 이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이 새 계명입니다. 이 계명은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지킬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사람들만이 지킬 수 있는 계명이 바로 이 십자가 사랑의 새 계명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해야만 세상과 구분되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명하시길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면서 이 사랑을 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육신을 죽이고 성령을 따라 살 때에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인데, 도리어 육신대로 살면서 새 계명의 사랑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생명을 나누어주는 역할을 못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지도 않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육신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 계명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고 기도를 통하여 성령 충만을 구할 것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는 오직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에만 이 사랑의 새 계명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새 계명을 알리시기 전에 몇가지 준비를 시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새 계명을 교훈하기 전에 겸손한 마음을 준비시키셨습니다. 이는 겸손 없이는 새계명의 사랑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3장 1 절을 보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지치지 않는 끝없는 사랑! 자신의 생명까지 희생하시는 실패함이 없는 사랑! 예수님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의 상태는 정반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이제 곧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게 될 것인지에 대해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더 높아지고 싶어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경계하고 헐뜯고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자기 제자들을 사랑하시는데, 제자들은 도리어 미움과 시기에 점점 더 빠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장 위대한 새 계명을 주시기 전의 조치로 ‘발을 닦는 일’을 생각해 내십니다. 이는 겸손함이 없이는 이 ‘새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너무나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느닷없이 대야와 수건을 가져오십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보면서도 교만한 제자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심지어 주님의 발을 먼저 닦아 주겠다고 나서는 제자마저 없었습니다. 서로 눈치만 보며 자존심을 꺾지 않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네 놈들이 먼저 굽실 거리지 않는데 내가 뭐하러 먼저 굽실거리겠는가! 네 놈들보다 먼저 내 자존심을 꺾지 않겠다!’

임박한 죽음을 앞둔 주님과 버릇 없는 제자들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이라면 제자들을 꾸중하며 화를 퍼부었을 텐데, 주님은 묵묵히 열두 제자의 발을 만지시며 그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그들의 자존심과 교만이 부서지지 않고는 이 위대한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없으며, 주님의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 동참할 인물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이때에 주께서 몸소 보여 주신 겸손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후에 제자들의 교만을 완전히 무너지게 합니다. 십자가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도망갔던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난 후 부끄러움과 자기 부정의 겸손 위에 이제는 주를 위하여 주님과 똑같은 사랑으로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제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키는 자가 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작은 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에서 가장 낮은 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진리의 문제가 아니면 양보하며 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회와 직장에서도 겸손한 마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 계명을 지킬 수 없습니다.

둘째로 중요한 사실은, 이 새 계명은 오직 주님의 사랑을 맛보고 이해하고 느낀 자들만이 지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사람에게서 찾으면 안됩니다. 주님의 깊은 사랑이 목사님이나 교우들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항상 완전한 사랑을 줄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감동합니다. 그후 예수님을 바라보면 참 좋을 텐데, 계속 같은 사람에게 이런 사랑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사람에게 크게 실망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사람에게서 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이 사랑을 찾을 수 있습니까? 오직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따라서 예배와 설교를 통해, 기도와 묵상을 통해 이 사랑을 맛보셔야 합니다. 성경과 기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십자가의 그 사랑을 체험하여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오직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체험한 자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감사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사랑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 속에 체험되는 주님의 사랑과 그 선하심을 아는 자의 축복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하고 큰 것인지요!

셋째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행하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는 삶을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주님과 함께 한 후, 형제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가장 놀라운 방법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함께’ 할 때 닮은 꼴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랜 친구는 서로 닮습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닮게 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한 후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주님을 닮은 후, 내 형제, 내 이웃으로 나를 닮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주님을 닮게 됩니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로 말합니다. 
"너희는 나를 본 받으라." 
즉, 바울을 본 받는 것이 주님을 본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새 계명은 ‘불구하고’의 사랑을 요청합니다. 새 계명은 ‘때문의’ 사랑도 아니요 ‘만일의’ 사랑도 아닙니다. 새 계명의 특징은 상대방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내게 행하신 사랑을 나도 그들에게 인내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들어 봅시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로마서 5장 6-10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의 단점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따라서 내가 괴수 같은 타락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이웃이 험악하고 나를 미워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참으로 새계명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십자가의 사랑이 바로 이 새 계명에 포함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 계명은 자신의 육의 세력을 죽이기 위하여 많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새 계명은 성령의 살아 있는 역사가 우리 마음 속에 있을 때에 실천 되어지는 사랑이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 평생 신앙의 연단과 훈련을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유일한 새 계명이요, 이 특이한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만방에 드러냅니다. 이 사랑을 행하는 주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하신 축복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미소가 그들에게 비췰 것입니다. 그들 주변의 사람들이 환하게 천국의 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사랑합시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사랑은 십자가에서 증명되었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습니다. 그후 만왕의 왕이시며 만유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백성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난 생명 가운데 성령을 따라 행하면 반드시 새계명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그러한 놀라운 사랑을 우리 이웃들에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성령으로 인하여 가능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는 길은 내가 내 십자가를 질 때에 나타납니다. 내 십자가란 죽음을 말합니다. 즉, 내가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명은 나를 통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아야만 ‘새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를 바울은 믿음의 삶이라고 정의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러한 믿음의 삶이 정확하게 새계명을 지키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인의 가장 분명한 정체성은 새계명을 지켜 행하는 것임을 확신한 가운데 철저하게 믿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도록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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