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찬 목사의 욥기 시리즈】

욥기는 샌드위치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산문체의 서문으로 시작해서 운문체 대화로 이어가다가 산문체 결론으로 끝을 맺는다. 이러한 시작과 끝을 운문체 외곽틀(prose framework)이라고 한다. 

서문에서는 중요 등장 인물과 배경을 도입함으로써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 즉 욥이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는다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전체를 이끌고 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께 대한 신실성의 문제를 시험받기 위해 고난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욥의 신실성은 하늘에서 개최된 어전회의에서 ‘사탄’의 도전을 받는다. ‘고소하는 자’(adversary)라는 의미를 가진 이 ‘사탄’은 하나님의 원수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늘 회의에 참여하는 한 천사이며(슥 3:1이하) 지상의 일을 조사하는 것이 그 임무로 묘사된다. 여호와께서 욥을 자랑하실 때(그를 가리켜 하나님은 “내 종 욥”이라고 말씀하신다. 1:8), 고소를 담당한 이 천사는 욥의 섬김이 자신의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참소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는 냉소적인 반문으로 인해 욥의 신실성이 시험대 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1:9-11). 

그러나 이 시험에서 욥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욥이 이 시험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의 독백에서 밝혀진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두 번째 어전 회의에서 사탄은 또 다시 욥을 참소한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2:5). 욥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역겨운 부스럼이 나게 되어 성읍에서 떨어져 혼자 잿더미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욥의 아내까지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킨다고 하며 욥을 비난했다. 여기에서도 욥은 입술로 범죄하는 것을 거부하였다(2:10). 

그러나 결국 욥은 자신으로서는 그 근거를 알 수 없는 시험을 통하여 오히려 자신의 결함을 깨닫고 그 사실을 여호와께 고백하게 된다(42:5-6). 여호와 하나님은 욥의 고백을 기꺼이 받아주시고 욥의 신실성을 인정하신 후 이전보다 두 배의 복을 주신다(42:12-15). 여기에서 우리는 욥기가 추구하는 신학적 주제를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욥기는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기록된 책으로 이해되어진다. 특히 인간의 고난, 즉 인간에게 임하는 부당한 고난의 원인과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기 위한 책으로 이해되어 왔었다. 이런 이유로 욥기는 절대적인 선(善)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할 수 있도록 허용하신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대표적 표적이었다. 

실제로 욥의 세 친구는 욥의 고난에 대하여 죄의 심판과 하나님의 징계라는 교리를 주장하고 있다(참고, 레 26장; 신 28장). 욥이 재산과 건강을 잃게 된 원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려 하였다. 이에 대하여 신정론의 관점에서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어 왔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들의 해석이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볼 수 없다. 또한 신정론에 근거한 반박으로 고난에 대한 완전한 해석을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욥기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 욥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과 회복,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조성과 유지(38:26) 등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욥기는 이스라엘의 지혜에 근거하여 인간의 합리적인 신정론에 도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존재의 최고봉이시며 현상 세계에서 나타나는 과정이나 실체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피조물 전체, 즉 만유를 초월하는 창조주이시며 만유를 붙드시는 분이다(미 4:13). 이러한 관점에서 신비는 이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곤혹스러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신비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놀라움과 경이로움 속에서 응답하는 신앙의 근본적인 자료이다.

욥은 자신의 자만(自慢)이 가져다 준 죄에 대해 고백함으로써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42:3, 5-6). 이것은 인간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해답을 얻고자 하는 신정론적 관심을 일축(一蹴)한다. 사실 욥기는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성경 어디에서도 침묵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고통과 고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기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신앙의 결단(決斷)에 의해 시작된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즉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관계 속에 있을 때 그리고 그 사실을 고백할 때(시 31:15) 비로소 고통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는 신뢰를 갖게 한다.

따라서 욥기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즉 신지식(神知識)에 근거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요구한다. 단순히 막연한 신에 대한 개념은 그릇된 관계를 가져다 줄 뿐이다. 욥은 이 점을 명확하게 고백하고 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이렇게 함으로써 욥은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와 승복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