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님께 용서받고 싶다면, 내가 먼저 용서해야만 합니다.

【에베소서 2:11-13】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김에스더 목사, †he 2nd Life Foundation, 뉴욕퀸즈교회, 본헤럴드 미국지사장

11절에 "그러므로"는 1절부터 10절까지 기록된 말씀 즉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크리스천이 되었으므로" 라는 말입니다. 이어서 "생각하라"(μνημονεύω 므네모누오)는 "기억하다, 유념하다, ~을 염두에 두다"(remember, to be mindful of)라는 뜻인데, 우리말 성경은 "생각하라"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라"보다는 "기억하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맞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이제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된 너희는 과거에 구원받기 이전의 모습을 기억하라"라는 말입니다. 11절과 12절은 "그 때에"라고 하며 구원받기 이전의 상태를 설명하고 있고, 13절은 "이제는"이라고 하면서 구원받은 이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1절에 "육체로 이방인이요"라는 말에서 "육체"는 출생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방인'을 뜻하는 '에쓰네'(ἔθνη)라는 말 앞에 '타'(τὰ)라는 '경멸'과 '무시'를 나타내는 관사가 붙어있어서 '이방인'(τὰ ἔθνη 타 에쓰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권을 누리는 유대인들과 비교해서 특권을 누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경멸하는 뜻으로 쓰인 말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할례당"과 "무할례당"을 비교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란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표시로 행하는 것이므로 "무할례당"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골로새서 2: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이 말은 육체적으로 하는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를 받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형식적으로 하는 것도 해야하지만, 그것보다는 내면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12절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에서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다"라는 말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과 같이 에베소 교인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에 대해 대단히 우월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4-5에서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또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자"라고 했는데, "소망"이라는 말은 미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므로 미래가 없는 자들입니다. 즉 영생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없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아쎄오스'(ἄθεος)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부정관사 '알파'(ἄ)와 하나님을 뜻하는 '떼오스(θεος)가 결합된 단어로 "하나님이 없다"(without God, knowing and worshipping no God, denying the gods, godless, ungodly)라는 말입니다. '무신론자'를 뜻하는 'atheist'는 '아데오스'(ἄθεος)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면, 지옥문 앞에 다음과 같은 글이 써있다고 합니다. "모든 소망을 버려라!" 맞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이들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실상 버릴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상에서 소망이 있는 사람처럼 무언가 열심히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헛된 소망일 뿐, 결국 지옥문 앞에 갔을 때 그 모든 소망이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게되고 그 모든 것을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1절과 12절에서 과거에 에베소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대해 설명한 바울은 13절에서 이제 그리스도를 알게 된 현재를 대조하며 설명합니다. 13절을 시작할 때에 한국어 성경에는 '그러나'를 뜻하는 '데(δέ)'가 빠져있습니다. '그러나'는 과거와 현재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과거에는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이 멀리 있었던 우리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다고 합니다. '피'라는 것은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관계가 없던 사람들이 관계가 맺어지고 가깝게 된 것입니다.

새번역성경을 보면, 본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11. 그러므로 여러분은 지난날에 육신으로는 이방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뽐내는 이른바 할례자들에게 여러분은 무할례자들이라고 불리며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12. 그 때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었고,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외되어서, 약속의 언약과 무관한 외인으로서, 세상에서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살았습니다. 13.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워졌습니다."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 있는 박물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있다고 합니다. 
"To remember the Past.(과거를 기억하라)" 
"To live the Present.(현재를 살아라)" 
"To trust the Future.(미래를 확신하라)"


과거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과거를 뭍어두고 과거를 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과거가 있었기에 현재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과거에 많은 상처와 고통이 있었다면, 그것을 잊으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과거의 아픔들을 주님 앞에 다 꺼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왜 그것이 고통스러운지를 해결받아야 합니다. 

과거의 기억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용서받기를 원하면서도, 자기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삶을 살아갑니다. 혹시 나 자신도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현재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신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고 싶다면, 내가 먼저 나에게 상처를 주고 고통을 주었던 사람을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용서의 법칙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항상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현재를 잘 살 수 있습니다.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생각하는 그 일이 아직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주님 안에서 온전히 해결되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현재를 주 안에서 올바로 떳떳이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를 주님 안에서 살 수 있는 사람만이 미래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갖고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성경 말씀을 온전히 순종할 때에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3절 앞부분에 있는 "그러나 이제는(δέ νυνί 데 누니)"이라는 신앙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과거에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에는 차마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일을 많이 했던 어둠의 자식이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과거의 나처럼 어둠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자들을 그곳으로부터 끄집어내어 빛으로 인도할 수 있는 빛의 자녀가 되었음을 고백하며 실천하며 빛을 발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나의 과거를 기억해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아프고 생각하기 싫은 것들일수록 기억해내어 하나님께 모두 꺼내놓아야 합니다. 꺼내놓지 않는 것은 계속해서 마음속 깊이 쓴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악한 열매를 삶 속에서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그 순간은 벌써 과거가 됩니다. 즉 우리는 끊임없이 죄를 지으며 살 수 있는 죄에 노출된 죄인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천국에 가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는 하나님께 택함받은 거듭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므로 아무나 회개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과거의 잘못이 생각이 났을 때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고 회개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나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며, 매순간 회개하며 주앞에서 정결한 삶을 살아 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과거의 저의 모습과 현재의 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정말 많이 달라져있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앞으로 미래에는 더 많이 달라져 있겠지요.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주님의 은혜이며 선물임을 고백합니다.
저의 과거는 감히 주님 앞에 꺼내놓기에 부끄러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어떻게 끄집어내어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저의 과거의 아픔들을 모두 꺼내놓고 고백하기를 원하오니 저를 도와주옵소서.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잊으려고 또는 덮으려고만 하지말고, 과거를 기억해내어 다시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과거에는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저였지만, 이제는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누가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겸손히 받아 넘길 수 있는 온유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저에게도 주옵소서.
과거에는 세상의 소망을 갖고 그것이 참 소망인 줄로 착각하고 열심히 달려왔지만, 그것이 지옥문 앞에 갔을 때 다 내려놓아야 하는 헛된 소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피조물인 우리의 인생에게 있어서 참된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과거에는 몰라서 그렇게 살아왔지만 그러나 이제는 주안에서 참된 소망을 갖고 푯대를 향해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저에게 성령충만함을 허락하셔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달려가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과거를 잊지말고 항상 기억하면서 과거 때문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하여 주옵소서. 과거의 아픔과 고통이 있었기에 연단을 받아 주께서 쓰실만한 그릇이 되어가고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과거가 없이 현재가 없듯이 현재가 없이는 미래가 없음을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충성된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래서 오늘도 빛의 자녀로서 어둠 속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자들을 어둠으로부터 끄집어내어 빛으로 인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저를 통하여 수많은 결박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오늘도 역사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도구로 오늘도 사용될 수 있음을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