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진화론과 창조론

3. 과학주의와 과학의 한계

  (1) 창조과학이론

  (2) 유신진화론 혹은 진화적 창조론       

  (3) 지적설계론

한국개혁장로회신학교장, 실로암교회 목사

1. 서론

우주만물의 창조 과정은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의 바깥 영역이다. 그것을 알기 위한 과학적 접근과 실험을 통한 확인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창조에 대한 자유로운 사색이나 상상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매우 위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벗어난 인간들은 스스로 그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인위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고자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인다.

과학주의를 기초로 한 창조론은 크게 보아 창조과학이론, 유신진화론, 지적설계론 등을 들 수 있다. 그것들은 공히 인간들의 비과학적인 ‘과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와 같은 인위적인 억지 과학을 신봉하는 과학주의자들은 과학이 아닌 것을 주관적인 관점에서 과학으로 간주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창조과학과 유신진화론은 ‘창조에 관한 과학주의 논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 내부에서 논의되는 것으로서 우선 보기에는 정반대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 는 과학주의라는 동일한 배경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지적설계론은 기독교적인 것이라 말할 수 없다. 절대성을 지닌 어떤 신적인 존재에 의해 우주만물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는 측면에서는 유사점을 볼 수 있으나 그 본질은 전혀 다르다. 또한 일반 종교들 가운데는 창조론을 내세우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교에서는 나름대로 창조론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과학적인 배경을 가진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창조론을 왜곡하여 일부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현대화된 인간들은 대개 ‘과학’이란 이름을 거치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객관성있는 과학적인 주장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배경으로 한 합리성을 전제하고 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 사고를 하는 자들은 과학이 아닌 것을 과학적인 것인 양 착각하여 포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성경을 모든 판단의 근거이자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다. 지극히 제한적인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의존하는 것은 위태로운 논리를 양산할 따름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 주장하지만 성경의 교훈을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인 상식을 최상위에 두고 사고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특정한 시대와 지역의 영향 아래 놓인 그런 것들은 결코 불변의 진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성경만을 유일한 절대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인다. 성경의 원래 내용은 일점일획도 틀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어떤 이설(異說)도 있을 수 없다. 우주만물의 창조에 대해서도 그렇다. 성경에는 오로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실제적인 사실만 기록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 외에 인간들의 다른 이론은 존재할 자리가 없다. 따라서 맨 처음 인간에 연관된 모든 사실적 내용은 오직 성경에 근거하게 될 따름이다. 그에서 벗어나면 인간들의 무모한 사설을 내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글에서는 과학을 빗댄 비과학적 과학주의자들의 잘못된 견해를 지적하며 성경에 기록된 창조원리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에 연관된 사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확증된 바 없는 과학주의적 논설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 21세기의 혼탁한 사조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신앙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 진화론과 창조론

진화론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어떻게 하다 보니 특별한 목적 없이 우발적으로 지금의 모든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주장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전능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저절 로 현재의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생물의 경우 찰스 다윈 이래 주로 동물에 관한 진화과정을 이야기하지만 식물 곧 과일이나 꽃과 같은 대상은 가볍게 취급해 온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적자생존이라든지 용불용설 같은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기후나 기온을 비롯한 자연환경이라는 외부조건을 내세우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여기서 적용할 수 없는 내용으로서 억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진화론과 창조론에 연관된 주장은 과학주의적 사고 이전에 이방인들의 철학에서 먼저 제기된 사항이다. 우리는 흔히 고대 자연철학을 진화론적인 배경을 둔 것으로 이해한다. 그 이론을 중시하는 자들은 우주 만물의 기본 물질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 즉 물, 불, 흙, 공기 등의 변화 과정을 통해 현재와 같은 상황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상을 가진 자들은 대개 진화를 배경으로 한 무신론적인 경우가 많았다.

이에 반해 이른 바 고대 법칙철학은 유신론적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거대한 천체의 움직임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비롯하여 낮과 밤, 그리고 동물과 식물의 생성과 성장 및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지배하는 법칙을 중요시했다. 그런 사상은 유신론적이었지만 기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일반 종교들 가운데는 창조론과 유사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 경우에 나타나는 창조론의 개념은 종교적인 신념에 근거한 이론일 따름이며 그것 자체가 성경이 말하는 것과 동일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각종 기독교 이단들과 이슬람교의 창조 신앙은 유대교 혹은 기독교로부터 왜곡되게 일부 차용해 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3. 과학주의와 과학의 한계

(1) 창조과학이론

창조과학자들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에 의해 우주만물이 창조된 것을 믿으며 그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창조과학 이론은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가시적인 것들을 중심으로 한 지극히 일부분에 관하여 과학적 입증을 할 수 있을 따름이어서 그것을 통해 성경의 전체 내용을 입증할 수 없다.

인간들의 실험을 배경으로 한 창조과학 이론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의 지극히 일부를 과학적으로 증거할 수 있을지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창조과학 이론으로 사실을 입증하려면 성경의 모든 사건들에 대한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전체적인 권위를 인정받기 어렵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와 관련하여 지구 위에 흔적이 남아 있는 여러 사건들에 접근함으로써 그 사실을 어느 정도 밝히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노아 홍수에 관한 부분적인 문제라든지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바다를 건널 당시 애굽의 군인들과 전차들이 수몰된 성경의 기록에 대한 사실적 입증을 위해 그 주변 바다에서 애굽의 전차 유물을 발견하는 것 등은 고고학적으로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결코 과학과 이성으로 접근할 수 없는 숱하게 많은 기적들이 나온다. 에녹이 살아서 승천한 사건, 모세가 홍해바다를 가른 사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서 사십년 동안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은 사건,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밤낮 삼일 간 머문 사건, 쇠로 된 도끼가 물에 뜨고 당나귀가 말을 하는 사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및 부활 승천 사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그 모든 것들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과학으로 입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진화론자들이나 유신진화론자들이 터무니없이 주장하는 내용들에 대한 변증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성경을 멸시하는 자들은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을 실제로 발생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과학이론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 성경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려면 모든 것을 다 입증해야 하며 선별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으로 성경을 입증하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성경의 기록에 대하여 과학주의적인 자세를 가지게 되면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 모든 것을 검증하고자 하는 실증주의에 빠질 우려가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2) 유신진화론 혹은 진화적 창조론

유신진화론은 주로 기독교에서 많이 언급되는 이론이라 할 수 있다. 그 이론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모든 것들은 진화의 과정을 거쳤으며, 인류의 조상이 유인원과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받아들인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그의 갈비뼈를 가지고 하와를 만들었다는 것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성된 종교적인 담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설령 ‘아담과 하와’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문학적, 상징적 차원에서 이해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들은 신이 맨 처음 원시적인 창조를 시작했지만 그 이후 점차적으로 진화되어 가도록 만들었으며 피조물 하나하나에 구체적인 간섭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17, 18세기에 유행했던 이신론(Deism)과 유사한 맥락을 이루고 있다. 즉 저들에게 있어서 우주 만물은 신의 계획과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무목적, 무의도적으로 진화되어 왔을 따름이다. 유신진화론자들은 이를 신의 ‘계속적 창조’라는 말로 애써 설명하려고 한다.

따라서 유신진화론자들은 인간 역시 오랜 세월의 진화 과정을 거쳐 생겨난 존재로 생각한다. 그 이론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아담을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흙으로 만들어진 피조물로서 특정한 개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그 대신 아담이 존재하기 전에 이미 인간 혹은 유사인간들이 숱하게 많이 존재했던 것으로 여긴다.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바는 유신진화론이 순수진화론보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경계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진화론을 거부하며 비판적이지만 유신진화론에 대해서는 그 위험성을 잘 모르고 있다. 따라서 신앙이 어린 교인들은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기에 그럴듯하게 보이는 잘못된 이론을 마치 과학적인 것인 양 오해하여 매력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저들 스스로 참된 기독교인인 양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내용을 문자 그대 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기가 더 솔직한 신앙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그와 같은 진화론적 사상을 가진 자들은 잘못된 과학주의적 사고를 공유하며 서로 간 격려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되어 가는 동안 그 잘못된 이론이 어린 신앙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된다.

인간의 과거 역사에는 구석시대, 신석기 시대가 없었으며 우리가 상상하는바 원시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인원이란 타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존재하지 않은 상상속의 생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그리고 자바원인, 북경원인,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 그리말디인 등은 가상의 존재일 뿐 아담 이전의 유사인간이나 원시인들이 아니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그와 유사한 형태의 유물둘이나 두개골 등의 잔존물들은 노아 홍수와 바벨탑 사건과 더불어 남겨진 흔적들이다. 그러나 유신진화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노아 홍수 사건을 믿지 않는다. 저들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자연현상일 따름이다. 그런 자들이 어떻게 바벨탑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인간들의 여러 언어가 생겨났다는 사실을 믿을 것인가?

우리는 첨단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21세기에도 아프리카나 남미의 아마존 지역 오지에는 문명과 동떨어진 채 살아가는 미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두고 현대 문명사회에 살아가는 자들보다 덜 진화된 존재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개한 문명을 소유하고 있을 따름이며 결단코 역사적 ‘원시인들’과 유사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특별한 대상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그 사람들은 오랜 기간 동안 일반 문명뿐 아니라 현대의 첨단과학 문명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을 따름이다.

만일 어리석은 과학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진화론적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앞으로의 인간은 어떻게 진화되어 갈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수백만 년 후엔 현재 인간의 모습을 어느 정도 유지하게 되겠지만 앞으로 수천만 년이 지나면 지금의 인간들과는 달리 눈과 귀가 여러 개 달리고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어떤 괴물로 진화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존엄성이란 말은 아예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리게 된 다.

유신진화론자들은 대개 과학주의에 빠진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빅뱅이론이나 우주와 연관된 수천 수만 수십억 광년의 거리 측정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안드로메다 은하가 300백만 광년 떨어져 있다고 믿는다. 나아가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의하면, ‘GN-z11’로 명명된 은하는 지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별들로서 무려 134억 광년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빛이 134억년 가는 거리를 어떻게 인간이 측정한단 말인가?

지구의 시간 개념을, 태양계를 벗어난 우주 전체에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계산하는 모든 시간은 지구의 자전과 태양을 중심으로 한 공전에 연관된 것으로서 지구 안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이 주장하는 과학적이란 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사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전체적인 실험의 과정을 통해 확증하지 못하는 것을 참된 과학이라 말할 수 없다.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이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 저절로 질서 있게 이합 집산하는 것이 가능한가? 즉 북두칠성과 십자성이 만나거나 뒤섞여 새로운 질서를 형성할 가능성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새로운 별자리들이 끊임없이 상호 뒤엉키면서 생겨나게 되는가? 그와 같은 일들이 발생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구를 우주만한 크기로 보았을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작은 좁쌀 하나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 좁쌀보다 작은 구형물체 안에 수십억의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런 미물과 같은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온 우주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측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지극히 제한적인 지식을 가진 인간들이 주장하는 그 모든 것들은 과학이 아니라 차라리 철학적 이론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인간들은 날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북두칠성을 비롯한 수많은 별들을 보게 되지만 눈에 비치는 그 빛깔과 모양만 인식할 뿐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그것을 인간들의 과학적 실험을 통해 알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그것이 고체인지 액체인지 기체인지 물질의 성분조차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아마도 우주의 많은 별들은 고체나 액체로 된 실체가 아니라 거대한 가스덩어리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과학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멀리 떨어진 별들이 기체 즉 결합된 가스에 가까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상식에 비추어 볼 때 고체 덩어리와 액체 덩어리에서 발생하는 빛이 엄청나게 먼 거리까지 비추어진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고체나 액체를 아무리 뜨겁게 달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지구에서 보일만큼 빛을 발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식이다. 물론 그들은 또 다른 형태의 엉뚱한 주장을 펼치겠지만 말이다.

하늘의 별들은 지구 위의 인간들을 위한 일반 법칙의 준거가 되며 인간들을 위한 일종의 데커레이션 역할을 한다. 즉 방향을 알려 주기도 하고 우주의 신비함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은 그 화려한 별들을 통해 자신의 왜소함을 깨닫는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만드신 것은 그의 전능하고 거룩한 의도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유신진화론자들은 진화론의 내용을 상당부분 수용하면서도 자신이 순수 진화론자들과 다르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사람들은 막연한 태도로 신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고자 한다. 그들은 지구의 지층을 비롯한 여러 형태들도 한결같이 진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은 노아홍수로 말미암아 형성된 것이 아니라 진화의 과정에 있었던 다중 격변의 현상을 거쳐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현대 지질학자들은 노아홍수로 말미암은 짧은 기간 동안 그 지층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과학의 이름을 빗대어 지극히 일부분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펼치는 자들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바 노아 홍수에 대한 실제적인 의미를 축소하거나 왜곡하고 있다. 대 홍수와 그와 더불어 형성된 지층 변화는 진화의 과정에서 발생한 자연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역사적인 사건이다. 성경에 기록된 노아홍수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기록한 창세기에 계시된 내용보다 앞선다는 길가메쉬 서사시에 나타나는 홍수설화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유신진화론자들은 자신의 허망한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 화석과 공룡의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아무런 의미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이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대개 노아 홍수에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이는 과학적인 연구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성경의 교훈을 통한 시대 이해에 근거를 두어야 함을 의미한다.

노아 홍수 때 하늘에서 엄청난 양의 비가 쏟아져 내렸을 뿐 아니라 지진과 화산폭발과 같이 땅이 갈라지고 산이 터지는 일들이 발생했다. 그때 땅위에 존재하던 각종 동물들과 물속에 있던 물고기를 비롯한 거의 모든 생물들은 죽어 땅속에 묻히거나 썩어버렸을 것이다. 그 가운데 일부는 급작스런 지각변동과 뜨거운 열기로 말미암은 특별한 작용에 의해 화석들로 남겨지게 되었다. 공룡에 관한 문제도 노아홍수를 통한 급격한 지질 변화와 더불어 생겨난 화석으로 인해 남겨진 증거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노아 홍수전에 살았던 공룡이 대 홍수 기간 동안 바다 속 땅들이 뒤집혀지는 과정에서 화석으로 남겨지게 되었다. 다른 생물 화석의 경우도 그와 동일하게 이해되어야 한다. 화석은 지각 변동을 통해 분출된 뜨거운 마그마와 물, 공기의 조화 가운데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것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화석은 길고 다양한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아홍수 시기 매우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실 지구에 존재하는 화석들은 대개 그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지금도 지구상 어디에선가 서서히 화석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공룡의 발자국이라고 주장되는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그 주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경북 의성과 경남 고성에 남아 있는 공룡발자국만 보아도,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공룡의 큰 덩치에 비하면 그 보폭이 너무 좁다.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공룡발자국이 아니라 특별한 자연현상의 결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 같다.

동물의 발자국처럼 생긴 것은 아니지만 바위 위에 새겨진 해안가의 돌개구멍이나 신비한 모형의 흔적들은 지구 위에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 뜨거운 마그마 위를 살아있는 공룡이 자세를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은 상태로 먼 거리를 천천히 걸어가면서 발자국 흔적을 남긴다는 것 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단하지 않고 물렁물렁한 뜨거운 돌 위를 걸어가지 않고는 그렇게 굳어지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과 일반적인 상식을 통해 과학주의자들의 주장을 냉철하게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지적설계론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바 지적설계론은 1990년대 이후 근래 생겨난 이론이다. 우주 외부의 어떤 무한 능력을 지닌 지적인 존재가 의도적인 설계에 따라 우주, 지구, 인간 및 동식물을 비롯한 각종 생명체를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그 이론을 따르는 자들은 세상의 다양한 법칙들을 볼 때 자연발생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쳐 우주 만물이 생성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지적설계론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우주와 그에 속한 지구를 포함한 모든 세계와 지구 안의 정교한 물질과 법칙들을 살펴볼 때 외부의 어떤 지적인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지 않 고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긴다. 열역학 제2법칙대로 물질은 질서의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 변하듯이 모든 물체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원래의 상태로부터 점점 더 망가져 가게 된다.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지적설계론은 과학적 실험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 말할 수 없으며 일반적인 논리를 통해 재구성한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불신자들 가운데 다수는 지적설계론이 기독교의 창조론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그 이론은 본질상 기독교의 창조론과 맥을 같이 하는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의도와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에게 특별히 주어진 사명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지적설계론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을 이론적으로 전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계속>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