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찬 목사의 욥기 시리즈】

도서출판 교회와성경 편집인

욥은 하나님의 복을 누렸던 경험(욥 29장)을 근거로 최후 진술의 변론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현재 당하고 있는 상황(욥 30장)을 덧붙임으로써 마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련의 죄들을 열거한 후 그것을 부인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위증으로 밝혀질 경우 하나님의 저주를 받겠다는 일종의 언약적 ‘순종의 서약’을 하고 있다. 

이것은 욥이 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 시대의 관습에 따라 서약을 함으로써, 즉 피고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자신의 무죄를 맹세한 법적 구속력을 지닌 진술을 통해 욥은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려고 하다.

1.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열 가지 죄악 목록들(욥 31:1-34)

욥은 자신이 고발당할 수 있는 죄악의 목록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중에 하나라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욥은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①쾌락(욥 31:1-4) : 이것은 호색(好色)의 죄이다. 욥은 호색의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눈과 언약을 세웠다고 말한다(욥 31:1). 이것은 마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욥은 유혹의 힘을 알았으며 자신의 삶에서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②부정(욥 31:5-8) : 이것은 거짓의 죄로 다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한 것을 말한다. 진실을 왜곡하고 진리를 거스르는 이 행위는 고소하는 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요 8:44). 거짓은 인간이 타락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대상이 된다. 하나님은 거짓된 혀와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을 미워하신다. 때문에 거짓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축출될 것이다(계 22:15). 

③간음(욥 31:9-12) : 이것은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산업을 오염시킨다는 점에서 사형에 해당되었다(레 20:10). 간음은 상대가 원한다 할지라도 가정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어떤 형태를 취하든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욥은 이것은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욥 31:12)로 표현했다. 이것은 잠언의 경고를 기억나게 한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숯불을 밟고야 어찌 그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남의 아내와 통간하는 자도 이와 같을 것이라 무릇 그를 만지기만 하는 자도 죄 없게 되지 아니하리라”(잠 6:27).

④억압(욥 31:13-15) : 이것은 권세를 가진 사람이 그 권세를 이용해 타인의 인격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아무리 종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인격체로서 인권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그들을 부당하게 대우한다는 것은 그들의 인권을 유린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로 동등하게 창조되었다.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욥 31:15).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존엄성. 창 1:26) 하나님은 그들을 편애하지 않으시며 동등하게 대우하신다(동등성. 신 1:16-17; 16:18-19). 따라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지켜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이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모범적이셨다(빌 2:7-8). 

⑤궁핍한 자에 대한 거절(욥 31:16-23) : 이것은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를 학대하거나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엘리바스는 욥이 이들을 학대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욥 22:7-9).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들은 특별히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정해져 있었다. 나그네나 굶주린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물과 음식을 제공해야 했다(출 22:21).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학대와 굶주림에 시달렸고 나그네와 같이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존을 보장해 주셨기 때문이다. 특히 과부와 고아를 학대하는 것은 큰 죄였다(출 22:22; 신 27:19; 렘 7:6; 22:3; 슥 7:10).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에 근거한다.

⑥탐욕(욥 31:24-25) : 이것은 배금주의(mammonism)로 하나님의 통치를 전면 부인하는 행위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고 분명하게 경고하셨다.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 12:15). 

예수님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 6:25)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그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마 6:33).

⑦우상숭배(욥 31:24-28) : 태양이나 달에게 입맞추는 행위는 우상숭배를 의미한다(왕상 19:18; 호 13:2 참고).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언약의 파괴 행위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엄하게 금지된 사항이다.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고 자신을 명확하게 계시하셨다. 때문에 어떤 형상으로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이나 바다에 있는 그 어떤 형상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⑧복수(욥 31:29-30) : 이것은 원수가 당하는 재앙을 기뻐하거나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할 것을 요구하는 저주와 같다.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마음으로 일종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햇빛과 비를 주심으로써 우리의 원수들이라 할지라도 사랑을 베풀어주신다. 그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인내이다. 

잠언에서는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잠 24:17-18)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어야 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하신 주님의 말씀도 같은 의미이다.

⑨몰인정(욥 31:31-32) : 이것은 집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가솔들이나 손님들에게 인애를 베풀지 않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 종이나 노예는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집안 식구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그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접함과 같다(롬 12:13; 마 25:35). 

아브라함이나 기드온이나 마노아는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사자를 대접하기도 했다(창 18장; 삿 6장; 13장). 히브리서 기자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고 말함으로써 손님 접대에 힘써야 할 것을 말한 바 있다. 

⑩위선(욥 31:33-34) : 이것은 자기 죄를 은폐하는 행위이다. 부정한 사람은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 위장을 함으로써 계속적인 기득권을 유지하기 마련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눈을 피해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아담의 생각은 그가 고소하는 자의 지배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 고소하는 자는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보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외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죄악들은 우리들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말씀 아래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죄악에 대하여 한, 두 가지 의식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부분에서 결핍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욥과 같이 순전하고 경건한 사람은 모든 삶의 부분에서 철저하게 단도리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소하는 자는 아주 작은 틈새라도 찾아내 우리를 공략하기 때문이다.

2. 욥은 무죄 서약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했다(욥 31:35-40)

욥은 10가지의 죄악을 나열하고 자신은 그 죄악들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무죄 서약’에 서명한다(욥 31:35). 따라서 이제 하나님은 욥의 무죄 서약에 대해 가부간에 결정을 내리셔야 한다. 만일 욥이 무죄하다면 법적 관례에 따라 욥의 무죄를 선언해야 한다. 반면에 욥이 유죄하다면 하나님은 욥에게 저주를 내리셔야 한다. 욥은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법정 앞에서 행하던 관례에 따라 무죄 서약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변론에 대하여 결론을 내린다. 욥이 언급한 땅의 부르짖는 소리는 땅의 규례에 대한 것이다. 땅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에 따르면 땅에 두 종류의 시를 뿌려선 안 되며(레 19:19) 칠 년째에는 안식년으로 쉬도록 해야 하며(출 23:10-11; 레 25:2-7; 26:34-35) 그 위에 무고한 피를 쏟아서는 안 되었다(창 4:10-12; 민 35:33-34). 

땅에서 찔레나무가 자라고 잡풀이 무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욥은 아담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땅이 받은 저주를 거론함으로써 자신에게서 죄악이 발견된다면 아담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서약하고 있는 것과 같다.

욥의 최후 변론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본질이다(창 39:2; 출 3:12; 수 1:5, 9; 사 43:2, 5).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창 17:8; 출 29:46)고 하는 언약은 여호와의 성호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출 3:14).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9:46). 이 언약은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우리에게 성취되었다(마 1:23). 따라서 언약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 할 속성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 

언약의 속성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 중 하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가난한 친척을 노예 생활로부터 속량하는 것(레 25:41; 사 49:7, 26; 54:5, 8)은 중보자(לאג)의 대표적 기능이었다. 이것은 언약의 지속적 성취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성취로서 주어진 기업의 계대 상속은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상징했다. 따라서 중보자(לאג) 사상은 언약에 의해서만 정당하게 평가될 수 있다.

욥이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29:15)가 되었다는 것은 그가 의와 공의에 서 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언약 사상 안에서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친구였던 것이다(잠 19:17; 14:31). 따라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의와 공의의 구현으로 성취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담고 있다(마 5:3-12; 눅 6:20-21).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는데(마 25:31-46)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깊은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임재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상징하는 것이며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를 경멸했다는 친구들의 주장은 욥의 인격을 무시한 처사였다. 욥은 가난한 자들과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욥 31:13-15).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게 창조된 사실을 강조하고 이 보편적 속성이 언약의 윤리적 기초라고 간파했다.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궤사를 행하여 우리 열조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말 2:10). 욥이 언약의 성취와 관련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욥 31:16-22). 이것은 언약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의 행동 규범이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최후 변론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 생명의 모태이며 식량의 출처인 땅에 대해서 정의를 실천했다고 주장했다(욥 31:38-40). 욥은 가난한 사람들과의 관계 못지않게 땅에 대해서도 결백했다. 이것은 욥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주장한 것이며 이에 근거하여 욥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결백을 선언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있다(욥 31:35). 
과연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의 무고를 심판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이 땅에 있을까? 욥은 확실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 곧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변명하기 위해 나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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