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와 이성

끊임없이 이성의 문제가 신학에서 대두되는 이유는 계시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기관이 이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때 어떻든 인간이 그것을 감각하고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을 이성을 통해서 하게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성이 아니면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감각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이성이 죄로 인해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왜곡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성 자체에 문제가 생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로 인해 이성이 어떻게 고장이 났는가? 이성이 그렇게 고장이 나고 문제가 생겼다면 신학에 있어서 이성의 역할이 어디까지인가를 분명히 해야 하는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처럼 신학의 원리를 이성으로 보는 실수를 하게 되던지 중생한 이성조차도 사용을 불허하는 근본주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홍섭 목사,교회를 위한 신학포럼 대표 / 한우리교회 담임목사 Senior Pastor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 / 동아대학교 환경공학과에서 대기오염 수질오염 전공

1.이성의 타락

인간의 이성은 죄로 인해 어떤 내용을 인식할 때 자신이 경험한 것만 인식하려고 하고 공간과 시간이라는 조건이 없으면 인식을 못하는 폐쇄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이해를 못합니다. 더군다나 경험한 것 중에도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만 인식하고 납득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경향까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존재하시며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 계신 분인데 이런 하나님을 우리의 경험과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리의 범위 안에서만 인식을 하려고 하는 문제가 이성에 생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은 합리적이지 않으면 납득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계시된 내용이 초월이라도 그냥 초월로 오면 인식이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이성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지혜를 담아서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이성이 자신이 잘나서 계시를 감지했다고 주장하면 문제가 큰 것이죠.

이처럼 이성이 계시를 인식하고 해석하는 기능이라는 점에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만 그 기능이 죄로 말미암아 합리성과 폐쇄성이라는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성이 계시를 전달하고 인식할 때 곱게 전달하지 않고 합리성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전달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전달하는 과정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뭘 추가하고 빼기도 해서 전달하고 받는다면 계시가 변질되는 것입니다. 이성이 신학의 원리가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물건을 배로 실어 보낼 때 운송수단으로서의 배의 중요한 기능은 인정되지만 배가 물건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계시가 신학의 원리라고 할 때 그 계시를 운송하고 인식하는 수단으로서의 이성의 역할과 기능은 인정되지만 이성이 계시의 자리에 가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더군다나 이성에 문제가 생겼기에 더욱 그러하다.)

2.중생한 이성의 역할

죄로 인한 이성의 문제점을 안다면 아예 이성을 배제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가 수송만 하면 되는 물건이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사상이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성을 신학의 원리로 인정하지 않지만 신학의 방법으로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부작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시를 해석하고 인식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성의 부작용과 문제점을 기억하고 그 문제를 극복하면서 신학의 방법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의 이성은 불신자의 이성이 아니고 중생자의 거듭난 이성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러나 중생자의 거듭난 이성도 타락의 영향이 있기 때문에 날마다 성경계시의 빛 아래서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3.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이성이 신학의 방법으로도 사용되면 안 된다고 이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나쁜 의미의 근본주의자들입니다. 근본주의는 이성은 계시를 운반만 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해석은 금지합니다. 그렇게 되면 계시의 풍성함을 놓치고 문자라는 한계에 갇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추운 날 옷을 벗어 입히는 모습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내용이 있다면 근본주의는 사랑은 옷을 벗어서 입혀주는 것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 외의 해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면 동일한 사랑이 상반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추울 때 옷을 벗어서 입혀준 부모가 어떤 날은 같은 사랑으로 아들을 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성은 운반만 하라고 하고 해석을 금지시켜 버리면 문자주의에 갇히게 된다. 부모가 자녀를 혼낼 때 집 나가라고 했다면 그 마음을 읽어야 하는데 그것을 문자 그대로 집 나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근본주의이다. 이렇게 되면 좋은 신앙과 나쁜 신앙은 늘 한 가지의 형태로만 이해되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다 정죄하게 된다.) 반면에 자유주의는 이성이 계시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계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합리성과 폐쇄성이라는 가위로 이것은 받을 것, 이것은 못 받을 것이라고 제단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절로 보고,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은 것을 안개 낀 날 둑을 걸었던 것을 멀리서 보니 마치 물 위를 걸은 것처럼 보였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이런 기록을 한 이유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라도 강조하고자 하는 어떤 정신과 원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성으로 성경을 제단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이다.) 이렇게 되면 신학은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창조하고 만들고 조종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인본주의 신학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둘 다 이성에 대한 극단적 오해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4.계시 의존적 방법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성을 사용하여야 하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은 계시 의존적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끊임없이 합리성을 가지고 그 범위 안에서만 인식하려고 하는 폐쇄성을 부작용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폐쇄성을 자꾸 열어야 합니다. 무엇으로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만큼 열어야 합니다. 즉 말씀계시로 나의 고장 난 이성이 어떤 지식을 합리성과 폐쇄성을 동원해서 내 취향대로 고착시키려고 하는 태도를 끊임없이 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과 범위로 인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어도, 더군다나 내 취향에 맞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하시는 것만큼 그것을 열어서 믿음으로 수납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성이 말씀을 제단 하도록 하지 않고 말씀이 이성을 주관하여 새로운 지각을 가지게 하는 것, 그것이 계시 의존적 신학방법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성의 차원에서 본다면 상호모순 되거나 서로 충돌되는 개념이 많습니다. 그 때에도 그 내용에 이성으로 손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내용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성이 합리성으로 계시의 내용을 자꾸 닫으려고 할 때 우리는 계시의 내용을 믿음으로 수납해서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픈 마인드이고 계시 의존적 신학의 방법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합니까? 기도하죠. 어떻게요? 내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소서. 바로 그것입니다. 말씀이 가는 곳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 곳에 멈추는 것입니다. 내 경험은 더 가라고 하고 내 경험은 서라고 해도 말씀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고 가라고 하면 한 번도 안 가본 것을 가는 것 그것이 계시 의존적으로 이성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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