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에 땅에 번진 독립운동의 들불

필자는 지난 7월3일부터 6일까지 3박4일의 짧은 일정으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순례했다. 이번 블라디보스토크 순례 일정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중앙연회 부흥단(단장 이재상 목사, 이하 부흥단) 임원수련회 일정에 속하였으며, 부흥단은 부흥단 임원들의 선교열정 고취와 선교지 탐방을 목적으로 매년 해외 탐방을 진행해 오고 있다.

이번에 부흥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탐방지로 결정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아있는 한국 근대사와 항일 독립투쟁사의 현장을 살펴보는 것이며, 둘째는 블라디보스토크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체에 영향을 주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와 기독교 선교 상황에 대한 이해이고, 셋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선교역사 특히 김영학 순교자의 발자취를 뒤따라가는 여정이다. 이런 주제를 중심으로 <나의 블라디보스토크 순례기>를 세 번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독수리전망대에서 본 블라디보스토크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정상궤도에 오를 즈음 준비한 시베리아 항공(S7)의 항공 경로를 살피며 북한 영공을 통과해 두 시간이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것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 국적기는 북한 영공을 지나지 못하고 중국을 돌아서 가기 때문에 30분 정도 더 걸린다. 지금은 외국 항공사만 지날 수 있는 땅. 통일이 되어서 북한을 자유롭게 지나는 때가 속히 오기를 기도했다.

잠시 눈 붙일 사이도 없이 비행기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나라 기온보다 평균 10도는 낮을 것이라 생각하고 준비했지만, 7월의 블라디보스토크도 이미 뜨거운 여름이었다. 저녁 무렵 공항에 도착한 필자는 일행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단 숙소에 짐을 풀었다. 두 시간이면 편하게 오는 거리. 하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이곳 블라디보스토크는 수많은 눈물과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목숨을 담보로 넘어오던 땅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공항

고조선에서 고구려 발해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땅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는 조선 후기인 1863년(조선 철종)부터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극심한 흉년으로 굶주린 농민 13 세대가 한겨울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이 지역에 정착을 하였고, 1865년(조선 고종) 때는 60가구, 그다음 해에 100여 가구 등 점차 늘어나 1869년에는 4,500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이주했다.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 해양공원 일대는 구한촌(당시 명칭 개척리)은 1911년 폐쇄될 때까지 약 400~500호가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1911년 콜레라 창궐이라는 명목으로 구한촌 지역을 강제 철거시킨다. 그 구한촌 지역에서 옮겨 새롭게 형성된 곳이라 하여 ‘신한촌’(新韓村)이 생겨난 것이다. 연해주 내에서 가장 큰 한인 주거지가 된 신한촌은 1911년부터 애국지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항일운동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항일운동은 신한촌을 거점으로 점차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변모했다. ‘권업회’와 ‘대한인국민회 시베리아 지방총회’는 가장 대표적인 항일 조직이었으며, 학교와 신문을 발행하며 근대 학문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교육과 독립운동을 고취시켰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기념비와 탑

 

신한촌 기념비 고려인한인회장 사무실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부흥단 일행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신한촌은 지금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일반 주택지가 자리 잡았고, 단지 기념비와 탑이 서있고 그곳은 고려인 한인회장이 지키고 있었다. 기념비에는 “연해주 신한촌은 민족적 성전(聖戰)의 요람이었으며, 1910년 국권이 강탈당하자 국내외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모여 국권회복에 앞장섰으며 성명회와 권업회, 한민학교, 애국신문발간, 13도의군 창설로 민족역량을 배양하였다.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하며 대일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1937년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하며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이에 1999년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해외한민족 연구소는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자 기념탑을 세운다”라고 적혀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필자

다음날 우리는 우수리스크에 있는 고려인 문화센터를 찾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두 시간 가량 기차를 타고 가면 우수리스크 역이 나온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도착한 일행들은 열차 출발시간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서둘러 플랫폼을 찾았다. 하지만 다시 역을 빠져나와 육교를 건너는 길을 모른 일행이 출구 방향으로 진입했다가 역무원에서 무임승차로 오해를 받아 붙잡히게 되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러시아 말로 다그치는 역무원과 시간에 쫓겨 빨리 보내달라는 우리들의 실랑이 속에 열차 출발시간만 초조하게 흘러갔다. 우리를 안내 한 현지 선교사님의 해명 끝에 풀려난 우리들은 한숨을 돌리며 간신히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유명한 시베리아 횡단 열차라고 기대를 하며 오른 열차 안은 우리가 생각했던 시원하고 쾌적한 모습이 아니었다. 30여 년 전 우리나라 열차 <비둘기호>와 <통일호> 느낌이었다. 후덥지근한 열차 안. 하지만 함께 탄 러시아인들 고려인들이 우리 일행을 바라보는 모습은 따스하고 호의적인 것을 느꼈다. 그중 84세라고 밝힌 한 할머니는 자기 할아버지의 고향이 부산이라고 말하며 반가워했다. 그리고 가는 내내 계속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 했다. 부산에서 이곳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올 수밖에 없었던 선조들의 거칠었을 삶의 고통만큼 할머니의 모습에 나무 등걸 같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우스리스크 역으로 달리는 기차 안

우수리스크 역으로 가는 중간에 작은 역 하나가 있다. 라즈돌로예(라즈돌리노예)역. 간이역처럼 작고 아담한 라즈돌로예 역은 약 17만 명의 고려인들이 열차 124대에 나눠 강제이주된 역이다. 승객열차가 아닌 화물열차에 실려 이주되던 중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죽기도 했다. 라즈돌로예 역은 당시 힘없던 조국의 현실처럼 낮고 초라했다.

고려인 강제이주를 위해 집결했던 라즈돌예역

잠깐 멈춘 기차는 다시 우수리스크로 달렸다. 어느덧 우수리스크 역에 도착한 일행은 기다리고 있던 버스를 타고 고려인 문화센터 내의 고려인 역사관을 찾았다. 고려인 역사관에는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한민족의 역사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항일 무장투쟁의 기록들이었다.

고려인문화센터 고려인역사관 내부

1901년 대한민국 초대 러시아 상주 공사로 부임한 이범진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가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일본의 소환 명령도 거부한 채 대한제국 황제의 특사로 항일 구국 투쟁을 펼쳤으며, 그의 아들 이위종을 1907년 헤이그 밀사로 파견했고 1908년 연해주 지역 항일 의병조직인 ‘동의회’ 결성에 함께했다. 동의회는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던 의병들의 근거지이며 바로 이 동의회 소속의 안중근 의사가 단원 12명과 함께 비밀 결사체인 ‘동의단지회’를 조직한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결연한 의지를 왼손 무명지를 끊어냄으로 드러낸다.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사진 속에서 나를 보고 있는 그 눈은 나를 오랫동안 멈춰 서게 했다.

안중근 의사 기록물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둘러본 우리는 연해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최재형 선생의 생가터를 둘러보았다. 생가터는 현재 공사 중이어서 들어갈 수 없었지만, 일제 헌병대에 잡혀 순국하시기 전까지 약 2년 간 머물던 집은 소박하여 그분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최재형 선생 생가터

다시 우리 부흥단 일행을 태운 버스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오던 중간 한 도로가 한적한 비포장 길로 들어섰다. 강 가 바로 옆 이상설 유허비에 도착한 것이다.

독립투사 이상설 유허비

일찍이 한학과 신학문에 능해 과거에 급제한 후에 여러 요직을 거치며 고종의 눈에 띄게 된다. 그는 고종에게 일제의 황무지개척권요구계약안(1904)에 상소를 올리며 반대를 한다. 그는 고종에게 순국할 결의를 하시라는 직언을 할 정도로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알려진 이상설은 1906년 용정 기독교 회장 최병익의 새로 지은 8간 집을 사 “서전서숙”을 창립하고, 1907년 헤이그밀사로 파송 되기도 했으며 ‘성명회’ ‘13도의군’ ‘권업회’의 핵심 창립 인물인 그는 시베리아와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이끌다가 1916년 초부터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병석에 눕게 되어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병색이 깊어지자 온화한 우수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게 된다.

운명을 앞두고 그의 임종을 지켜보던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는 유언을 남긴다.

결국 그의 유언대로 시신은 화장되어 라즈돌라니야 수이푼 강물에 뿌려진다. 수이푼 강가 이름 모를 쓸쓸한 이곳에 지난 2001년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선생의 유허비를 세운 것이다. 동해로 흐르는 수이푼 강. 그 물이 흘러 한반도 땅을 수 없이 감쌌을 테지만 분단된 조국을 바라보는 그분의 영혼은 지금도 끊임없이 중보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쓸쓸히 그 강을 바라보고 있는 유허비를 뒤로하고 우리 일행은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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