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꺼내어 빛으로 인도하신 은혜를 노래해

주민정 찬양사역자를 처음 만난 것은 여름 연합수련회에서였다. 지역 내 작은 교회들을 자비량으로 섬기는 엘림공동체 연합수련회의 스태프로 참여하며, 농촌교회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과 재미있게 어울려 웃고 떠드는 목소리가 그렇게 맑고 시원할 수 없었다. 한눈에 봐도 그녀가 성악 전공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주민정 찬양사역자는 엘림공동체를 통해 자비량 작은교회 비전캠프를 섬기고 있다

조별 특별활동 순서를 맡은 주민정 찬양사역자는 아이들에게 ‘뮤지컬’을 함께 연습해 보자고 제안했다. 사실 뮤지컬은 서울의 대학로나 큰 공연장에서 몇 만 원 티켓을 사야 듣는 낯설고 생소한 영역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금세 뮤지컬에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저녁 집회 전 그녀의 특별 공연이 펼쳐졌다. 자신의 지나온 삶을 뮤지컬로 간증하듯 노래한 것이다. 강원도 태백 탄광촌 낡고 허름한 집. 작은 방 한 구석에 쪼그려 앉아 독백하듯 말하는 한 시골 여고생의 이야기는 바로 주민정 자매 자신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생전 처음 보는 뮤지컬이지만 시간이 흐르자 여기저기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녀의 뮤지컬 노랫말에 거기 모인 아이들이 하나 둘 또 다른 주민정이 돼 가고 있던 것이다.

주민정의 첫번째 솔로 앨범 <다시 그길>

그녀는 3살 때 부모님의 손에 끌려 강원도 태백으로 이사를 왔다. 서울에서 연고지도 없는 태백의 광산촌으로 왔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로 온 것이 아니다. 그 후 그녀는 22살까지 20년을 그곳에서 살게 된다.

갑자기 힘든 광부의 삶이 너무 버거워 매일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아버지와 막장과 같은 환경에서도 아이들만큼은 바르게 키우고 싶었던 어머니 사이의 갈등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벗어나고 싶은 집. 하지만 강원도 태백의 광산촌에서 집을 피해 갈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었다.

주민정 자매는 그 시절을 이렇게 말한다. “교회는 언제나 재미있고 즐거운 일들이 가득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린이 성가대에 들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 성가대를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그리 노래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 너무 좋아서 늘 교회를 떠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태백 어린 소녀의 인생에 전환점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이었어요. 서울에서 찬양팀이 와서 찬양집회를 한다는 거여요. 그저 놀고 싶어서 재미있어서 다니던 신앙생활이었는데 그날 전 처음으로 찬양으로 드리는 예배를 맛본 거여요”

그 날 찬양팀의 집회는 꿈꿀 수 없던 소녀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된 것이다. “그 날의 기억이 너무 생생해요.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바라나’ 그날 이후 제게 꿈이 생겼어요”

그 날 이후 그녀는 찬양사역자의 꿈을 꾸며 매일 하나님께 서원하듯 기도했다. ‘하나님 저도 저분들처럼 평생 찬양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 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소원을 우리들의 기도에 붙여주시고 결국 그것을 우리의 꿈이 되게 하신다.

“그 날 이후 제 꿈은 변한 적이 없었어요. 매일 그 꿈을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구체적으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성악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지요. 그리고 고 3 여름방학 그러니까 대학입시가 고작 4개월이 남았을 때, 성악을 하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아버지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 친구들과 선생님도 “갑자기 무슨 성악이냐? 불가능하다”라고 반대했다. 어머니는 돈이 없어 가르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사실 모두의 말이 맞습니다. 가난한 태백의 소녀. 그리 노래를 뛰어나게 잘 부르는 것도 아닌 것 같고 태백에는 노래를 가르쳐줄 선생님조차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서원기도를 드렸고 꿈을 이루고 싶어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엄마에게 딱 4개월만 배워보고 떨어지면 바로 전문대를 가겠다는 약속을 했어요. 그리고 당시 태백 출신으로 서울에서 중학교 음악 선생님을 하고 계시는 분께 배우게 되었지요”

방학 때가 되어 어머니와 서울의 선생님 집으로 첫 방문을 했을 때 믿음의 선생님이셨던 그분은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를 제자 삼았다. 그냥 돌려보내기에 너무 안쓰러운 마음에 받아 준 것이다.

어쨌든 그후로 4개월. 매주 토요일 4교시 수업종과 동시에 기차역으로 달려가 1시 기차를 타고 기차 안에서 교복을 갈아입고 선생님 집까지 기차로, 지하철로, 버스로. 그렇게 편도 7시간, 왕복 14시간의 시간을 투자하며 서울행 레슨이 시작되었다.

“제가 첫 레슨을 받는 날 다른 고3 학생들, 재수생 언니들이 레슨을 받고 있었는데 정말 저랑은 비교도 안 되는 월등한 실력이었어요. 순간 내가 저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그렇게 20번도 안 되는 횟수의 레슨을 받았고 왕복 14시간을 다니며 고생을 했지만, 금새 실력이 늘지 않자 속상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매일 수업 후 야간자율학습 대신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3시간씩 교회에 갔어요. 혹시 전기세 많이 나간다고 연습하지 말라고 할까 봐. 유난히도 추운 태백의 겨울을 고스란히 몸으로 견디며 불빛도 없는 예배당에서 그렇게 캄캄하도록 연습을 했지요.”

그녀의 집안 사정상 국립대에 가야만 한다는 조건에 맞춰 지원한 몇몇 국립대학교 모두 합격을 하게 된다. 같이 연습하던 재수생 언니들이 오히려 같은 대학에 시험 쳤는데 떨어지는 은혜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그렇게 입학을 하여 장학금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녀의 솔로 타이틀곡 <다시 그 길>은 이런 그녀의 이러한 간증을 담은 곡이다.

‘보이지 않네요 여기 어둔 골짜기가 내가 보이나요 어디에 있나요 걸을 수 없네요 여기 험한 파도 위를 내말 들리나요 아무도 없나요’

대학교에는 들어갔지만 꿈을 이루기 위한 관문이 아직 남아있었다. 어떻게 찬양사역자가 될 것인가?는 그녀의 모든 관심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실기성적도 우수해서 유학을 권유 받았지만 성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니기에 단호히 거절하고 찬양팀 오디션을 알아보고 다녔다. 서울로 상경한 그녀는 친구 집 신세를 지며 찬양팀 오디션을 보았지만, 너무 성악적인 목소리라서 CCM과 맞지 않는다며 떨어지고 만다.

마냥 찬양팀 오디션을 위해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학교에서 장학생들에게만 주는 중등 음악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딴 것으로 초등학교 음악 선생님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밤마다 오디션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렇게 선생님을 하던 중 <마르지 않는 샘>이라는 팀에서 팀원을 뽑는다는 공지를 보았다. 대학교 때 CD를 자주 들었기에 마르지 않는 샘을 알고 있었고 당장 신청을 해서 오디션을 보았고 드디어 합격했다.

주민정 찬양사역자는 자신의 신앙의 체험을 간증하며 찬양의 자리에 초대받고 있다

너무나 행복해서 학교를 그만 다닌다고 하자 학교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은 물론 부모님과 이웃 어른들은 그 좋은 직장을 그만둔다고 걱정했다. 그냥 선생님 하면서 하면 안 되냐고 말렸다. 그녀를 좋게 보신 교장선생님은 관사도 주시고 더 좋은 혜택을 주시겠다는 파격적인 제안도 해주었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찬양사역자라는 꿈, 서원을 이루게 되었다는 기쁨에 거절했다. 이때의 그녀의 고백, 세상이 주는 평탄한 길보다 하나님께 가는 평탄한 길을 걷겠다는 의지의 찬양 <평탄한 길>을 작사 작곡하였다. 그 후로 지금까지 15년. 짧지 않은 시간 속에 수많은 어려움도 겪었지만. 어려움이 많을수록 은혜는 더욱 넘쳐났다.

주민정 찬양 사역자는 강릉원주대학교 성악과 학사를 나와 국민대학교 종합예술대학원 뮤지컬 시어터 석사과정을 마쳤고 서울 종합 예술 학교를 출강했다. 2003년 4인조 보컬팀 <마르지 않는 샘> 사역을 시작으로 찬양과 기독교 뮤지컬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가 지난 2015년 솔로 음반 1집 <다시, 그 길>로 찬양 사역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강원도 탄광촌, 그 깊은 곳에서 하나님은 보석과 같은 일꾼을 캐내고 깍으시어, 그녀를 통해 영광 받고 계시다. 주민정 찬양사역자는 자신의 경험과 꿈 이야기를 간증하며 이 시대 아이들에게도 또 다른 꿈을 심어주는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사역문의 : 010-3234-2692 최승호 간사)

주민정 찬양사역자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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