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에 기초한 그리스도 중심의 성경 해석 설교]

잠언 9:1-18

1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2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3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4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5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7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8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9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11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네게 더하리라 
12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13 미련한 여인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14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15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인들을 불러 이르되 
16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17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18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보혈교회, 연세대학교 전자공학, 미국 필라 웨스트민스터 목회학 석사, 비블리컬신학교 신학석사. 현재 인천 송도거주)

대부분의 사람은 잠언에서 삶의 지혜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잠언을 삶의 지혜서로 보는 사람들의 문제는 성경 잠언을 일종의 도덕책으로 보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란킨이라는 학자는 잠언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고대 중동 지역의 지혜를 모아 놓은 책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세상의 여러 다른 도덕책들과 구별됩니다. 즉,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잠언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말이 18번이나 나옵니다. 즉, 잠언의 목적은 사람들이 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잠언은 도덕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없이는 참 지혜를 얻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임을 보여주는 계시입니다. 즉, 잠언의 내용은 주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하는 지혜라는 점에서 도덕책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복음의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잠언의 저자 솔로몬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서 이 잠언을 쓰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잠언을 쓸 당시의 독자는 다름 아닌 솔로몬이 사랑하는 젊은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잠언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들에게 인생을 말합니다. 솔로몬은 인생은 누구와 식사를 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잠언은 놀랍게도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남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지혜로운 자는 인생 가운데 만나는 만남들 가운데 바른 선택을 하는 자입니다. 즉, 누구를 만나 누구와 식사를 하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가 나뉩니다. 그것이 잠언의 주제이며 여호와 하나님과 식사를 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알려줍니다.

잠언에서 ‘길’은 인생입니다. 길을 걷는 남자는 솔로몬에게 있어서는 그의 아들들입니다. 그러나 잠언의 계시는 인생 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생 길에서 우리가 만날 수 밖에 없는 두 여인을 소개합니다. 잠언은 그 두 여인을 등장시킵니다. 그 두 여인은 지혜라고 불리는 여인과 음녀 또는 미련한 계집, 어리석은 계집, 탕녀로 불리는 여인입니다.

이 두 여인은 각각 음식을 차려 놓고 길을 가는 청년들을 부르며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각 청년은 자신의 인생 길에서 두 여인 중 한 여인을 선택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잠언은 그 표현을 “누구와 식사를 하느냐?”로 질문합니다. “지혜 여인과 식사를 할 것이냐 아니면 미련한 계집과 할 것이냐?”

잠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중동 사회의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고대 중동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한 자리에 앉는다.”라는 뜻으로서 “너와 나는 같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같은 편이다”라는 뜻입니다. 특히 남녀가 함께 식사를 한다는 뜻은 몸을 섞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한 청년이 어떤 여인과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 여인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됨에 따라 그 청년의 인생이 판가름 나는 것을 잠언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대칭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9장 1-6과, 9장 13-18에 각각 등장합니다. 1-6절에는 지혜 여인이 등장하고 13-18절에는 탕녀 또는 미련한 계집이 나옵니다.

절수도 똑같고 히브리어 글씨도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본문 중앙에 10-11절이 있는데 그 내용은 잠언의 주제로서 지혜 여인이 외치는 메시지의 골자입니다.

본문은 지혜와 어리석음을 여인으로 각각 의인화하여 그 여인들의 초청과 그리고 인생의 길을 가는 청년들의 선택을 그려줍니다. 인생 길을 걷는 청년이 서로 다른 이 두 여인의 초청 사이에서 선택을 하고 있으며 그 선택의 결과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7-9절, 그리고 12절을 보면, 지혜 여인을 선택하는 청년과 미련한 계집을 선택하는 청년에 대해 말해 줍니다.

그러면 지혜 여인을 선택하는 청년의 특성과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리석은 탕녀를 택하는 청년의 특성과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 내용을 본문 잠언 9장은 기가 막힌 대칭 구조로 다루고 있습니다.

1절에서 3절을 다시 봅니다. 
“지혜가 그의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자기의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지혜 여인의 집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집은 일곱 기둥으로 세워진 집입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상징으로서 완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곱 기둥의 집이란 흔들림이 없는 안전한 집, 완전한 만족을 주는 참된 안식처를 뜻합니다.

2절에는 지혜 여인이 차려놓은 잔치 상이 보입니다. 고기와 포도주가 풍성하게 놓인 잔칫상입니다. 잔칫상을 차려 놓은 지혜 여인은 성중 높은 곳에 올라가 지나가는 사람을 부르며 외칩니다. 14절을 보면 미련한 탕녀도 성중 높은 곳에 올라가 자기와 함께 식사를 하자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고대 중동 사회의 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고대 중동 지역에는 성중 높은 곳에 그 지역 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을 섬기는 여인들이 어떤 축제를 맞이하는 때가 되면 시장으로 나와서 자신들이 섬기는 신을 자랑하며 초대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혜 여인도 부르짖고 음녀도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혜 여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참신으로 모실 것을 간절히 부탁하며 호소하는 것이요, 반면, 어리석은 음녀 계집은 바알과 아스다롯 등을 예배하는 이방 계집들로서 우상신을 믿으라고 호객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창녀는 이방신을 섬기도록 유혹하는 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아합 왕의 아내 이사벨 여왕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알 신을 섬기도록 유혹한 창녀와 같은 자였습니다.

복음의 시대에도 세상 종교 및 영지주의와 같은 이단 사상, 그리고 세상의 거짓 철학들과 마귀 숭배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늘 있어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거짓의 아비인 사탄을 섬기도록 미혹하는 영적인 창녀들이었습니다. 즉, 지혜 여인은 참 하나님이신 삼위일체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도록 인도하는 반면에, 탕녀들은 거짓과 미혹을 사용하여 마귀를 숭배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잠언 8장 1-4절을 보기 바랍니다. 지혜 여인이 부르는 소리입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 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

반면, 7장 7-18절을 보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음녀가 호객하는 소리입니다.
“어리석은 자 중에, 젊은이 가운데에 한 지혜 없는 자를 보았노라.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의 집쪽으로 가는데 저물 때,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라.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여인이 그를 맞으니 이 여인은 떠들며 완악하며 그의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여 어떤 때에는 거리, 어떤 때에는 광장 또 모퉁이마다 서서 사람을 기다리는 자라. 그 여인이 그를 붙잡고 그에게 입맞추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얼굴로 그에게 말하되 내가 화목제를 드려 서원한 것을 오늘 갚았노라. 이러므로 내가 너를 맞으려고 나와 네 얼굴을 찾다가 너를 만났도다. 내 침상에는 요와 애굽의 무늬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5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잠언 5장을 보면, 지혜 여인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탕녀에게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지혜 여인의 우물물에서 물을 마시고 그 샘에서 마시라고 당부합니다.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연모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 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잠 5:19-20). 
잠언 5장 역시 청년에게 “누구의 품을 안겠느냐”고 하며 선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혜 여인을 선택하여 사는 삶은 평탄과 풍성함과 함께 결국 영생이 보장되지만, 탕녀를 선택하여 사는 삶은 비참과 죄악 가운데 죽음을 통해 영원한 멸망에 빠지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1장과 2장도 마찬가지입니다. 1장 20-23절을 보겠습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2장에서 16-20절을 보겠습니다.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그는 젊은 시절의 짝을 버리며 그의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린 자라. 그의 집은 사망으로, 그의 길은 스올로 기울어졌나니 누구든지 그에게로 가는 자는 돌아오지 못하며 또 생명 길을 얻지 못하느니라.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라”

다시 말하면 잠언 9장은 독자들에게 “어떤 신을 섬길 것이냐? 지혜 여인이 가리키는 여호와 하나님이냐? 아니면 어리석은 계집이 유혹하는 세상 신들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지혜 여인이 외치는 내용입니다. 4절부터 6절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돌이키라는 말은 회개하라는 뜻입니다. 
“돌이켜 내게 와서 먹고 마시라. 어리석음을 버리라. 그 대신 생명을 얻으라. 그리고 그 얻은 생명을 따라 명철의 길을 살라.”

누구든지 지혜 여인과 식사를 하게 되면 지혜와 하나가 되면서 그 여인의 잔치 자리에서 배가 부르며 생명 및 구원을 얻을 수 있고, 또한 그 인생은 명철의 길을 행하며 풍성한 삶을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혜 여인의 간절한 호소를 비웃는 자들이 있습니다. 7절과 8절을 보면 거만한 자들, 악을 좋아하는 자들은 지혜 여인을 능욕하고 조롱합니다. 교만한 그들은 지혜 여인을 싫어하며 대항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지혜 여인의 말씀을 듣고 더욱 지혜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결국 지혜로운 자는 지혜 여인의 잔치에 와서 더욱 배부르지만, 거만한 자는 지혜에게 도전하며 지혜를 미워하는 모습으로 그 본성을 드러내더니 멸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잠언을 보면, 악인, 거만한 사람, 교만한 사람은 같은 통속으로서 지혜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잠언 8장 13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인데 교만과 거만과 악행과 패역한 입술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만과 거만은 지혜의 상극으로서 가장 어리석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오늘 본문의 7-8절에서 말합니다.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이 잡히느니라.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비슷한 의미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 7: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서 개와 돼지란 위선되고 교만한 바리새인들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교만하고 거만하고 악한 자들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 일에 있어서 어리석음의 극치를 나타내며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이제 지혜 여인이 지혜의 핵심을 선언합니다. 다 함께 10절-1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네게 더하리라.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지혜 여인은 자기와 식사하는 자에게 진리를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그 진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복을 누리며 영생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는 지혜 여인의 외침을 멸시합니다. 그 후 때가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10절에서 말하는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를 아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물론,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볼 때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해 주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갖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즉, 지혜 여인을 듣고 복음을 알아서 그리스도를 통해 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자는 생명을 얻지만 지혜 여인을 대적하고 거만하게 구는 교만한 자는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 당할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거만한 자와 교만한 자는 악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13-18 절을 보겠습니다. 미련한 계집도 높은 곳에서 떠들며 길을 가는 행객을 부릅니다. 이 악하고 간사한 미련한 계집은 음식을 차려 놓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계집의 집은 기둥도 없습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릅니다.

지혜 여인은 정성껏 진실한 잔치를 마련하여 진정한 잔치를 제공하였으나, 이 미련한 계집은 도적질한 음식으로, 또한 독이 든 썩은 음식으로 손님을 초대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로 들어오는 손님을 사망으로 인도합니다. 악한 계집의 속삭임입니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17절). 
이는 거짓으로 사람을 기만하는 사탄의 음성이요, 음녀의 음성입니다. 함께 누군가를 속이며 불의를 행하자는 제안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리석은 자들과 교만하고 거만한 자들은 그 음녀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 여인과 죄를 범합니다. 세상 신들을 섬깁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18절의 스올입니다.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들이 거기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스올”은 히브리 단어로서 신약의 헬라어 “게헨나”와 같은 뜻입니다. 스올 또는 게헨나는 불신자들이 가는 고통의 장소입니다. 끝없는 고통의 처소를 의미합니다. 즉, 지옥을 의미합니다. 
“주께서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이르게 하시고” (벧후 2:9).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13:42).

지혜 여인이 어리석은 탕녀를 보니 그 미련한 계집은 수없이 많은 영혼들을 그녀의 엉덩이에 깔고 앉아 있습니다. 그 창녀의 집을 들여다 보니 그 집안에는 온갖 해골과 뼈들과 함께 썩은 시체들로 가득합니다. 이 악한 계집은 그 시체들을 엉덩이 아래에 살짝 숨겨 놓은 것입니다. 즉, 그 탕녀에게 빠지는 자들마다 잡아 먹힌 것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지혜 여인의 음성을 거절하는 거만한 자들마다 그 미련한 계집에게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문에 들어가는 순간, 그들은 다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스올에 떨어집니다. 
“그의 객들이 스올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스올은 결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고뇌의 장소입니다. 지혜 여인의 부름을 외면하고 자기의 교만으로 인생 길을 걷는 자들은 결국 가장 무섭고 영원한 멸망의 장소인 ‘스올’로 끌려가는 것을 잠언은 선명한 그림으로 독자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길을 가는 젊은이는 인생을 걷는 우리 모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두 가지의 길에서 선택을 직면하게 됩니다. 그 선택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냐, 아니면 자신의 거만함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짧은 지식을 의지할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이냐 아니면 불순종할 것이냐? 성령을 따라 행할 것이냐, 아니면 자신의 육신에 따라 살 것이냐? 지혜의 말씀을 따를 것이냐 세상의 타락한 달콤한 거짓을 따를 것이냐? 불의를 따를 것이냐 의를 따를 것이냐? 죄를 따를 것이냐 아니면 선을 따를 것이냐? 어둠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빛을 따를 것이냐?”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 대한 선택의 결과는 지혜 여인을 따를 때는 의와 거룩함과 경건과 생명이지만, 어리석은 음녀를 따를 때는 불의와 더러움과 악함과 죽음 및 멸망인 것입니다.

특히 이 세상을 떠나 죽음이라는 문을 통과할 때 가장 자명한 엄청난 사건이 발생할 것입니다. 자신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져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지나는 그 순간 생생한 의식을 가지고 해골과 시체가 즐비한 죽음의 영역으로, 오직 고통 만이 가득 찬 곳으로, 다시는 나올 수 없는 스올이라는 곳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탕녀의 집에 들어간 그 사람은 스올에 안 들어가려고 팔을 버둥거려 봅니다. 마치 푸주간에 가는 소가 결국 자기 운명을 깨달으면서 푸주간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올 길이 없습니다. 나올 힘도 없습니다. 이미 그는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스올에 빨려 들어갑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면 그 때야 음녀에게 속은 것을 발견합니다. 욕을 합니다. 저주를 합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그는 영원히 후회하며 이를 갈며 눈물 흘리면서 그 곳에서 영원토록 실제적인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 9장의 내용을 주님께서는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죽은 후에 스올로 내려가서 고통 중에 슬피 울며 이를 갑니다. 부자가 스올에서 외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니이다.” 
이때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너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이 있어서 서로 건너갈 수 없구나.”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지혜는 사망으로 향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목이 터지라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음성입니다. 성령께서는 그 어디서나 목이 터지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깊은 지혜이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외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 지혜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 가장 큰 목적은 우리의 구원과 영생입니다. 주의 음성을 듣고 지혜를 얻어 구원 받게 하는 것이 여호와 삼위 일체 하나님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

성령의 외침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곳으로 가면 안됩니다. 그곳으로 간 자들마다 스올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세요.” 
성령의 외침은 잠언의 지혜 여인의 외침과 정확하게 같습니다.

지금도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성령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와 그분의 십자가와 보혈을 의지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 15:26).

이 시간에 지혜의 근원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속에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거듭난 주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지혜 여인을 따라 살기 바랍니다. 육체의 소욕을 죽이고 주의 말씀을 기억하며 성령을 따라 행하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음성을 따라 살면 그 곳에는 풍성함과 사랑과 잔치와 감격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교만과 거만함과 많은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6장 8절에서 선포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으로 심으면 영원한 열매를 얻음이요, 육체로 심으면 헛수고입니다. 헛수고의 극치는 영원한 부끄러움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인생은 누구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경과 성령으로 말씀하는 지혜 여인의 음성입니까? 아니면 세상 종교와 철학과 초등 학문과 세속 문화의 어리석은 음성입니까?

혹시 구원 받은 이후 다시 어리석은 탕녀에게 돌아가 돼지나 개처럼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으며 사는 배교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아닙니까? 

(벧후 2:20-22)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영적인 음행을 주의하기 바랍니다. 이단을 주의하기 바랍니다. 타종교를 멀리하며 경계하기 바랍니다. 사탄 숭배를 하는 더러운 광란의 음악들과 접신을 돕는 뉴에이지 운동 및 온갖 종류의 신사도 운동을 철저하게 경계하기 바랍니다. 더럽고 음란한 세속 음악과 영상을 멀리하기 바랍니다. 탕녀와 어리석은 더러운 계집들의 현란한 유혹들을 멀리하기 바랍니다.

거짓교회인 로마 카톨릭교회와 종교통합운동을 대항하기 바랍니다. 마리아 숭배 및 교황 숭배를 멀리하기 바랍니다. 로마 카톨릭은 큰 음녀로서 인류 역사 상 지금까지 참된 성도들의 피를 가장 많이 흘림으로 복음의 가장 큰 원수로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성연애를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거짓 교회들과 종교 다원화를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을 멀리하기 바랍니다. 이는 지혜 여인을 노골적으로 대항하는 미련하고 악하고 교만하고 거만한 탕녀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영적 음행은 반드시 육적인 음행과 병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영적으로 음행하는 많은 교단들이 동성애를 지지하게 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이는 영적 음행은 곧바로 육적인 음행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성적으로 음란한 것은 그 만큼 이 시대가 영적으로 음란하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 이 세상은 더욱 음란하여질 것이고, 음행은 더욱 많아지고 음행의 수법이나 질도 끝없이 악하여질 것입니다. 온 세상이 인터넷으로 하나되면서 가장 번성하는 사업은 음란 사업이며, 바벨탑처럼 인권이라는 슬로건 하에 세상이 하나가 되면서 더욱 강렬하여지는 욕구는 변태와 음행과 이혼과 간음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기독교 통합이라는 가면을 아래 복음을 제거하고 결국 거대한 종교 통합으로 나아가는 마지막 영적 미혹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의 탕녀는 먹고 사는 문제와 세속 문화를 수단으로 영혼들을 사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걸려드는 자들마다 저 무서운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으면서도 잠깐 누리는 달콤한 죄악과 교만한 마음과 거만함이 좋아서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아직 전세계를 독재하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 정도로 세상이 더럽고 무서운데, 하물며 마지막 적그리스도와 마지막 거짓 선지자가 등장할 때 이 세상은 얼마나 부패할 것이며 또한 그러한 시대에서 신자들이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때는 바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때가 될 것이고, 노아의 홍수 직전의 때처럼 포악과 음행과 접신이 무한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과 삶을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기 바랍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까지 주시며 보혈을 흘리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어둠의 죄악과 저주 가운데서 구하기 위해 보내주신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그분은 주 여호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이끄시는 우리의 대언자요 중보자이십니다.

지금과 같은 순탄한 때에 바르고 열정 있는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세상이 더욱 어두워질수록 우리는 신앙을 잃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잃으면 우리 자녀들의 시대에는 참 신자를 찾아보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처럼 희귀하고 드문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영생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늘 바라봅시다. 잠깐 있다 없어지는 세상의 것들에 정들지 않기 바랍니다. 세상의 쾌락과 풍요를 포기하기 바랍니다. 성공보다 주를 향한 충성을 선택하며 잠깐의 안일함보다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지금은 아직 구원의 때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면 얼마든지 복음의 능력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때입니다. 온 힘을 다하면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의 형상을 닮아 거룩하여질 수 있는 때입니다. 오늘 지금 당장 주 예수님을 죽도록 사랑하며 왕으로, 구세주로, 대제사장으로, 선지자로 모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주 예수님께 철저하게 돌아와 큰 음녀 및 붉은 빛 짐승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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